♧성경 살펴보기 (삿10:6~12:7)
◇입다의 불행한 출생과 굴곡진 인생여정
사사기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 땅 입성 이후 주변 족속들의 침략과 압제가 빈번함을 보여줍니다. 원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매번 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신음하며 부르짖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사사라 불리우는 지도자를 세워 그 곤란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반복되는 내용입니다.
♤ 사사기에 나온 12명의 사사 중 입다는 매우 독특하고 인상적인 인물입니다. 입다는 길르앗 가문 출신의 큰 용사였습니다. 힘이 세고 싸움기술에 능한 전사였다는 말입니다.
그는 불행히도 창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것을 이유로 부모의 재산을 나누지 않으려는 정실 부인의 자식들로부터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돕이라는 외진 곳으로 가서 거주했는데, 잡류라 불리는 건달패들이 모여들어 입다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사로 부름받다
이웃나라 암몬의 침공으로 이스라엘이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했을 때, 길르앗의 장로들은 대적과 맞서 싸울만한 무리를 가진 입다에게 지휘관으로 참전해줄 것을 요청받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임한 입다는 파죽지세로 암몬을 쳐 항복을 받아내었습니다.
◇경솔한 서약으로 무남독녀를 번제물로 희생시키다
전쟁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올 때 처음으로 집에서 자신을 환영하는 사람을 번제 제물로 바치겠다는 황망한 - 그러나 당시 문화에서는 아무렇지 않을? - 서약을 합니다. 그리고 이제 입다는 무남독녀 딸을 불태워 제물로 바쳐야 하는 끔찍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었습니다.
입다는 딸을 번제물로 바쳐야 하는 상황이 되자 옷을 찢으며 울부짖었습니다. 입다의 딸 사건이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풍습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면 애곡 관습이 생길 이유가 없습니다. 인신공양은 성경에서 비판을 받습니다.(예레 7:31, 19:5, 겔16:20~21, 23:39)
[렘7:31, 새번역] 또 그들은 자기들의 아들과 딸들을 불태워 제물로 바치려고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이라는 산당을 쌓아 놓았는데, 그런 것은 내가 명하지도 않았고, 상상조차도 하여 본 적이 없다.
[렘19:5, 새번역] 그리고 그들은 제 자식들을 바알에게 번제물로 불살라 바치려고, 바알의 산당들을 세움으로써, 내가 그들에게 명한 적도 없고, 말한 적도 없는, 내가 상상조차도 하여 본 적이 없는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겔16:20-21, 새번역]
20 또 너는, 우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과 네 딸들을 데려다가, 우상들에게 제물로 바쳐 불사르게 하였다. 너의 음욕이 덜 찼느냐?
21 네가 내 아들딸마저 제물로 바쳤다. 또 네가 그들을 불 속으로 지나가게 하였다.
[겔23:39, 새번역] 그들은 자기 자식들을 잡아 죽여서 우상들에게 바친 바로 그 날에, 내 성소에 들어와서 더럽혔으니, 그들이 내 성전의 한가운데서 그런 일을 하였다.
전쟁의 승리와 통치자로서의 첫 행보에 한껏 우쭐했을 입다의 비극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또 다른 비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와의 내전으로 4만2천명을 학살하다
왜 전쟁에 부르지 않았냐고 시비를 거는 애브라임 사람들과 길르앗 사람들이 내전에 돌입했습니다. 입다의 길르앗 사람들은 그 내전에서 이겼습니다. 도망치는 에브라임 사람들을 요단 강 나루터에서 선별해 죽였는데, 그 때에 죽은 에브라임 사람의 수는 무려 사만 이천이나 되었습니다.
◇6년간의 사역과 그 끝
길르앗 사람 입다는 6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었습니다. 사사기의 12명의 사사 중 평화시기가 언급된 사사 중 가장 짧은 기간입니다.
♤질문들
사사 입다, 그는 복된 삶을 살았을까요? 그가 이끈 무리들이 소망의 공동체, 대안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번 설교에서는 본문을 가지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입다의 이야기처럼 우리의 눈에 보이는 삶 그 너머에 펼쳐질 하나님 선한 뜻과 계획, 놀라운 섭리를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입다는 복된 인생을 실았고, 그가 이끈 무리는 소망의 공동체, 대안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과연 그렇게만 볼 수 있을지 살펴보겠습니다.
설교자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입다의 인생에는 눈에 보이는 삶 그 너머에 펼쳐질 하나님 선한 뜻과 계획, 놀라운 섭리가 있었다.
◇그러므로 입다는 복된 삶을 살았다.
◇입다가 이끈 무리는 소망의 공동체, 대안 공동체였다.
입다는 자신이 갑작스럽게 민족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진 통치자와 전쟁 지휘자로,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사가 되어 전쟁에 참전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꿈에라도 생각했을까요?
건달패들의 두목으로 지내다 민족의 지도자로 부름받는 것은 훗날의 다윗왕이 연상됩니다. 가족에게서 버림받고 쫓겨났던 입다는 통치자로서 금의환양하였고, 그간의 설움과 인고의 세월이 보상받았다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을겁니다.
제도권의 안정된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 한없이 음울한 인생이 찬란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슈퍼스타의 위치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눈에 보이는 거칠고 험한 삶 그 너머에 펼쳐진 하나님의 선한 뜻과 계획, 놀라운 섭리로 입다의 인생이 역전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복된 인생이 되었습니다.
또한 입다가 이끈 건달패의 무리가 길르앗을 암몬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킨 군사적 대안이 되었고, 민족을 괴롭히던 오랜 올무에서 해방되어 맘껏 자유을 누릴 수 있게 한 소망의 공동체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늘 그렇듯 오늘의 이야기도 본문의 내용을 가지고 전하는 설교가 자꾸 마음에 걸려 블편한 반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 문맥에는 관심이 없다?
성경에는 독특함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성경 안에 하나님의 마음과 감정이 자세하게 표현된 부분이 있지만, 어떤 사건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응 없이 내용들만 나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기독교의 경전으로서 장래의 신자들이 부정적인 내용은 되도록 가리고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면들만 부각시킬법도 한데, 성경은 전혀 그러지 읺습니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성경을 더 신뢰하게 됩니다. 휘몰아치는 감정적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심정을 분명하게 전달받지만, 담담하고 건조하게 기록된 내용들을 살피는 시간도 하나님의 진심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볼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의 순간임을 날이 갈수록 깨닫게 됩니다.
사사기 10장 6절에서 12장 7절까지가 사사 입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입다에 관한 그리 길지 않은 전체 내용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그의 인생을 따라가보면, 참으로 험난한 세월을 살았노라고 스스로 인정한 야곱처럼 매우 굴곡진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제일 불편한 지점은 입다에 관한 전체 줄거리를 왜 참조하지 않을까 입니다. 성경에 백 개 정도의 진리가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성경 본문의 어떤 부분을 보고 발견한 몇 가지 개인적 통찰을 전하면서 그것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대표하는 듯 청중들에게 이해를 요구하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 되버립니다.
앞뒤 문맥을 조금만 살펴봐도 설교의 내용이 본문의 문맥속에서 상충되는 주장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럴때는 서로 충돌하는 해석을 모두 설명해주고 상황논리에 따른 선택적 해석의 다양성을 청자들에게 인식시켜 주는게 설교자의 의무라고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는건 왜 일까요? 본문주해에 성실치 못하거나 자기 주장에 너무 매몰되어 있거나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어떤 이유이든 이런 식의 설교가 반복되면 문맥을 따라 본문을 대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듣기에 너무 거북하고 견딜 수 없습니다.
이것을 우스개 소리로 '캡쳐설교'라고 합니다. 성경의 특정본문이나 한 구절, 특정 단어를 '캡쳐'하고 그것에서 복음의 진리를 어떻게든 뽑아내려 하는 것을 일컫습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자신이 말하고 싶은 어떤 신앙적 신학적 깨달음이나 교리를 성경 한 구절, 한 단어를 수단으로 삼아 전달하려는 무리수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때문에 문맥을 따라 알려주는 본문의 진정한 의미가 가려집니다. 또한 올바른 성경읽기에 실패하게 만듭니다.
입다에게 찬란했던 순간이 분명 존재했지만 그것은 짧았습니다. 입다의 인생 전반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백성의 영웅이 된 입다의 성공담에 주목하지 말고, 하나님이 당시에 하신 일을 통해 우리가 진정으로 무엇을 붙잡야야할 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들은 우리가 빛을 통해 선을 추구하면서 어둠을 통해 악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내용들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서는 다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문장의 의미는 문맥이 결정합니다."
2. 나무를 보면서 숲을 상상하지 못하게 한다
♤성경에 대한 해석의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 본문에 대한 성실한 주석(주해, 강해)이 없는 해석은 본문의 원 뜻과는 무관한 자의적인 내용이 되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걱정되고 우려스러운 점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본래의 의미를 벗어나 의도치 않게 왜곡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청중들이 이 성경 본문에 그런 내용과 뜻을 담고 있다고 그냥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로 그러한가를 신앙의 습관으로 삼고 성경에 묻고 찾는 사람들에게는 본능적으로 이상한 낌새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권위를 가지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을 의심없이 믿고 따르는 것이 믿음의 순종과 충성이라고 당연스레 배워온 이들은 더 이상의 반응을 하지 못한다는게 슬픈 현실입니다.
입다의 한 편의 이야기에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있어 어려운에 처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는 말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입다의 잿빛 인생의 의미와 더 나아가 사사기 전체의 주제를 살펴보면 아주 다른 이해를 가질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사사기는 하나님 백성의 거듭된 불신앙과 불순종을 고발합니다. 여호와 신앙의 처참한 실패의 여정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엿보게 합니다.
오직 작은 나무에만 집중하면 큰 숲의 풍경을 놓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숲에 대한 큰 그림을 바탕으로 나무들을 봐야 합니다. 그래야 그 나무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3. 동어반복이 주는 결과
해 아래 새 것이 없고 세상은 빈복적인 일의 연속입이다. 그러나 오늘은 어제가 아닌 새로운 날입니다. 똑같아 보여도 어제의 내가 아닌 오늘의 나는 새로윤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해진 운명을 따라가는 자들일끼요?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는 지들일까요? 구분할 수는 있지만 분리되지 않는 개념들이 우리의 신앙을 온통 채우는데, 결정론과 자유의지의 충돌도 그외 같은 것이라고 언젠가부터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교리의 가장 근본적인 뼈대는 우리 죄를 사하시려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유월절 어린 양 되신 예수님임니다. 여기서 복음의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섬깁니다. 성령 하나님은 임의로 말하지 않고 성자 예수님의 말씀을 가지고 활동하십니다. 성자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성부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십자가 복음만을 말한다고 더 신앙이 특별해지고 기독교 신앙이 완벽하게 수호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선의에서 시작된 구별이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이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동어반복은 복음에 대한 충성에서 시작됩니다. 성경 모든 본문에서 십자가 복음의 은혜를 추출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박처럼 작용되는 것입니다.
동어반복은 결국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설교, 마음을 울리지 못하는 설교, 예리하게 세상과 사람을 해부하지 못하는 설교를 양산합니다. 그 결과 셩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행하신 일의 내용과 의미를 완전히 비켜가게 합니다.
성경 본문에 대한 성실한 주해가 바른 해석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런 자연스럽고 충실된 과정은 성경 잔체를 통해 우리를 진정으로 똑바로 힘있게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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