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셨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용모)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외모)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삼상16:7, 새번역)
질문들))
성경을 읽고 질문하는 것은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묻고 질문하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가 그릇된 신앙 안에 있을 때 그것을 바르게 교정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신앙이 어렵지 않고 단순하고 쉬운 것이면 좋겠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간단히 않고 녹록치 않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앙도 그러하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이성과 영감은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 펼쳐진 바른 진리를 향한 도전적인 탐구를 가능케 한다.
본문에서 외모와 중심은 대조되는 단어로 쓰인다. 또한 그것은 문맥상 사울왕(엘리압같은)과 다윗왕으로 대표된다. 즉 외모를 보고 사울을 왕으로 세웠고, 중심을 보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다는 것이다.
1)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지시하심이 아니었는가?
사울이 왕으로 세움을 받는 짧지 않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분명하다. 사무엘은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 앞에서 사울을 공식적인 왕으로 추대할 목적으로 기름부음을 행했다. 사무엘이 직접 사울을 선택한 상황은 아니었다.
사울은 용모가 준수하고 특히 키가 컸다. 다윗 역시 키가 사울왕만큼 크지 않을지 모르나,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표현이 있을정도고 외모가 준수한 홍안의 소년이었다. 그래서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상하다. 둘 다 외모는 상당히 뛰어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심과 대조되는 외모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성경에 사용되는 예를 살펴보자.
본문 삼상 16:7에 나오는 '그의 용모와 키'는 다윗의 큰 형인 엘리압을 표현한 말이지만, 지금의 왕인 사울왕의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용모:>
(창38:6)~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삼성 17:40)~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왕상 1:6) 그는 (아도니야)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단1:4) 곧 흠이 없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모든 지혜를 통달하며~
<외모>
(신1:17)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말고(한쪽 말만을 듣지 말고), 귀천을 차별없이 듣고 사람이 낮을 두려워하지 말것이며,
(신10:17~18) 너희의 하나님 여호화는 신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오,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차별하여 판단하지 않으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신16:19) 너는 재판을 굽게 하지 말며,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며(정의를 따르며), 또 뇌물을 받지 말라
(옵34:19) 고관을 외모로 대하지 아니하시며(한쪽 편을 들지 않으시며), 가난한 자들 앞에서 부자의 낯을 세워주지 아니하시나니
(마22:16, 막12:14, 눅20:21)~(바리새인들의 말)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라
(요7:24) 외모(겉모양)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하시니라
(름 2:11) (유대인 헬라인)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차별하여)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고후 5:12)~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려 하는 것이라 (속에는 자랑하는 것이 없으면서 겉으로만 자랑하는)
(고후10:7) 너희는 외모(겉모양)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갈2: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겉모양으로 판단) 아니하시리니)
(엡6:9) 상전들아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차별하여 대함) 일이 없는줄 너희가 앎이라
(골3:25) 불의를 행하는 지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차별하는 일)이 없느니라
(벧전1:17) 외모(겉모양으로 판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이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성경에서 사용되는 '외모'는 사람의 겉모습을 뜻하며, 외부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차별하여 대할 때, 공의와 정의를 따르지 않고 사람의 겉에 드러난 조건들을 보고 판단할 때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
<중심>
외모와 반대쪽에 있는 단어는 중심이다. 사람의 중심되는 마음을 의미한다.
(창8: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마음)에 이르시되
(시51:6)~주께서는 중심(마음속)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시109:22)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나의 중심(마음)이 상함이니이다
(사26:9)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마음)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막2: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마음)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연단하신다.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시고 단련하셔서 온전하고 단단한 믿음을 갖게 하신다.
<연단>
(잠17: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시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단련)하시느니라
(사48:10)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불에서 택하였노라
(렘9:7)~보라 내가 내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
(단11:35) 또 그들 중 지혜로운 자 몇사람이 몰락하여, 무리중에서 연단을 받아 정결하게 되며 희게 되어 마지막 때까지 아르게 하리니
(단12:10)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렬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자는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지는 깨달으리라
(슥13:9)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가운데 던저 은같이 연단(단련)하고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말3:2) ~그는 금과 은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롬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인내력은 단단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력은 희망을 낳는 줄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새번역)
(딤전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전에 이르도록 연단(훈련)하라
(히5: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경험)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히12:11) 무릇 장계가 당시에는 즐거워보이지 않고 슬퍼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훈련)받은 자들은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벧전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단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올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벧전4:12) ~너희를 연단(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계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정련)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단련)
(욥7:18) 아침마다 권장하시며 순간마다 단련(시험)하시니이까
(욥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은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시험)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시12:6)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번 단련한 은 같도다
(시26:2)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시66:10)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기를 온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시105: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그의 진실을 증명해주셨다/새번역)
(잠27:21)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 (사람됨을 달아볼 수 있다/새번역)
(렘 6:29) 풀무불을 맹렬히 불면 그 불에 납이 살라져서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느니라. 이와같이 악한 자가 제거되지 아니하리니
2) 사울왕은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후, 여호와의 영이 임하고 예언을 하고 새 사람이 될것이고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다고 하셨는데,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의 마음(중심)과는 별개의 것이라는 말인가?
다윗 역시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이 되었다고 했다. 구약에 나온 성령의 감동, 성령충만은 능력적이고 은사적이다.
성령의 은사는 인격적이지 않다. 성령이 하나님의 일에 필요할 때 적당한 사람에게 단기적으로 부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곧 성령의 은사이다. 반대로 성령의 열매는 인격적이고 성품적인 삶의 열매들이다. 성령의 은사는 지속적이지 읺고 성령의 열매는 시간속에서 성숙되어간다.
사울도 다윗도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열매는 정반대로 맺어졌다. 그렇다면 사울이 새 마음을 받아 새 사람이 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사울은 가장 작은 지파인 베냐민지파에 가장 미약한 가문 출신이었고, 미스바에서 온 이스라엘 앞에서 왕으로 뽑힐 때 짐보따리속에 숨어있을 정도로 소심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강하게 임할 때 그 당시 예언자들처럼 춤을 추고 소리를 지르며 예언을 하게 되었다. 또 암몬사람들이 쳐들어와 이스라엘을 모욕하자 사울은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되어 큰 분노를 터트리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암몬을 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신다는 징표로서의 새 마음, 새 사람은 이것이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한 사울은 전혀 '딴 사람'이 되었다. 예언자가 되었고,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용맹한 전사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의미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과 순종의 마음을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완전히 다른 성품과 인격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착각함으로 믿음의 궤도에서 이탈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것은 어떤 것을 얻게 해달라고, 어떤 능력의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마술의 비법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겪게 하신 대속의 죽음과 부활은 무엇을 위함이었는지, 삼위일체 하나님이 합심하여 일구시는 창조와 구원과 새창조의 섭리 안에서 발맞추어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음의 첫걸음이다. 이는 참되게 믿는 자의 본분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 예수믿고 죽으면 천국 보장, 살아서 교회에 충성이면 현실의 복을 얻는 것이라는 너무나 가볍고 얄팍해져버린 프로파간다를 버릴 때가 되었다.
사무엘은 마지막 경고를 남겼다. 이스라엘 백성과 왕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면 조상들처럼 너희도 심판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만일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의 목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지 아니하며 또 너희와 너희를 다스리는 왕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면 좋겠지마는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조상들을 치신 것 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 (삼상12:14-15)
3) 사울과 다윗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보시는 중심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본문은 분명히 외모와 중심이 대조된다. 그렇다고 성경은 사울은 외모로 뽑혔고 다윗은 중심을 보고 뽑았다는 쉬운 공식을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는다. 사울왕과 다윗왕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알면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외모와 중심의 본 뜻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사울왕은 대단히 경솔한 사람이다. 사울왕은 전쟁의 급박한 상황에서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번제를 드렸다. 아말렉의 진멸명령을 자의로 판단해 행함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 세운것을 후회하셨다. 사울은 무엇을 중심했는가? 세상의 평판과 인기, 체면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보다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이유는 있지만 해서는 안될 경솔한 행동들이 계속 나오는 것이다.
다윗왕은 어땠을까? 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의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때의 내용이다.(행14:22)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 (내 마음에 합한)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다윗은 사울의 상황에 반응하는 경솔함 대신 매순간 하나님을 의식하는 진중함을 텍했다. 어떤 상황에도 참고 인내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도달하려 부단히 애썼다. 어린 나이에 기름부음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현실의 문제, 더욱 악화되어가는 사울과의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때만을 기다리며 눈물의 빵을 먹으며 보냈다. 뮬론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 민족의 지도자로, 무리들의 우두머리로 나타나는 역량과 위상은 겪는 고난에 비례해 점점 쌓이고 있었다.
하나님은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하셨지만(삼상16:1), 사울은 왕의 자리에 40년 동안이나 있었다. 반면 일찌기 후임 왕으로 선택받았던 다윗은 사울의 살해위협 속에서도 끝까지 사울에게 손을 대지 않았고, 하나님의 때가 될 때까지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 적국인 블레셋에서 미친척하며 지냈고, 아둘람굴에서 무리들의 우두머리로 지냈다. 다시 블레셋땅으로 피신을 했고, 사울과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은 후에야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이 되었다. 그후 7년 6개월이 지나서야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죄 문제에 있어서 다윗 역시 사울왕과 다르지 않았다. (삼하2:9) 네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다윗은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차지함으로 십계명을 어기는 심각한 죄를 지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졌다. '칼이 네집에서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고, 재앙을 일으켜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네 이웃에게 주어 백주에 동침하게 할 것이고, 불륜으로 얻은 아이는 죽을 것이다'
끔찍한 죄책이 자식들에게 이어졌다.
밧세바에게서 낳은 아이가 죽음, 큰 아들 암논이 압살품의 여동생 다말을 강간, 압실롬이 암논을 살해, 압살롬의 반역, 압살롬이 이스라엘 무리 앞에서 아버지의 후궁들과 동침, 암살롬을 군대장관 요압이 살해, 아도니야의 반역..
또 다른 죄인 인구조사도 있다.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연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내가 이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였나이다 (삼상24:1~10)
인구조사가 정확히 어떤 부분에서 죄가 되었는지를 알 수 없다. 다윗은 3가지 재앙, 7년의 기근, 원수에게서 3달을 도망, 3일동안의 전염병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그리고 선택한 전염병으로 7만명이 죽었다.
(왕상1:2) 어린 처녀 아비삭으로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한 것도 작은 문제가 아니었다. 아도니야의 반역 이후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후 다윗이 죽기 전의 귀뜸을 듣고 요압과 시므이를 처형했다. 후에 아도니아가 아바삭을 아내로 청하자 분개한 솔로몬이 처형을 명했다. 다윗의 집안에 여전히 칼이 떠나지 않았다.
사울처럼 다윗도 죄와 허물이 많았다. 그럼에도 다윗이 특별한 것은 그의 인생을 걸쳐 인내하며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의 말과 행동속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이 있었고, 주어진 일마다 하나님께 먼저 물었고 주의 명령에 순종하기를 즐거워했다. 자의로 판단하고 경솔하게 행했던 사울과는 정반대다.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앞에서 오래 참고 자신의 판단으로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이 구절은 다윗의 인생이 농축된 것이 틀림없다.
(름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
4) 다윗은 하나님의 연단을 받았는데, 사울은 왜 연단받지 못했는가? 아니 왜 그 연단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을까? (사울이 실패하기로 작정된 사람이라면 연단의 과정은 불필요하다. 마찬가지로 다윗이 성공하기로 예정된 사람이라면 연단의 수고 역시 의미가 없다.)
사울은 세상과 사람을 의식하며 살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다. 사울은 세상의 평판에 민감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의지하였다. 사울은 체면을 중시했지만 다윗은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셨다.
그랬기에 팔방미인의 화려함 이면에 가려진 수많은 삶의 질곡속에서 시인으로 음악가로 전사로서 지도자로서의 감수성과 능력과 영예가 제한받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분의 섭리안에 남아있을 수 있었다.
사울왕은 외부적인 환경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미 외모를 따라 빠르게 살아가는 중이다. 그러나 다윗은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더디고 답답한 현실속에서도 그 중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윗을 그리스도에 빗대지만 사실 다윗은 그리스도인의 좋은 본보기이다.
사울은 연단의 문턱도 밟지 못했다. 그는 순전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인생에 걸쳐 연단하고 그 마음의 중심을 시험함으로 단련하는 과정에 들어갈 수 조차 없었다.
반면 다윗의 마음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신전의식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쉽게 왕위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셨지만, 다읫은 오랜 세월들 속에서 시험과 연단을 받고 왕위에 오르도록 하셨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심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제 불편한 이야기를 해야할 시간이다.
'우리의 완성되지 못한 마음을 하나님이 연단하시는 중이다. 그러므로 남을 함부로 규정 짓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이런 설교의 요지는 개인적으로 들을만한 신앙적 교훈을 말하고 있지만, 성경의 역사적 인물들이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 보여지는 모습들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의미와는 꽤나 거리가 있다.
주 예수를 믿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사울처럼 새 마음을 받고 새 사람이 되었지만 여전히 불완전하고 악한 본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성령의 임재 속에서도 우리는 잘못된 판단과 선택으로 주님의 책망을 받을 때가 많다.
그에 따라 우리는 여전히 주 예수의 말씀의 연단을 받고 우리의 속사람까지 완전히 변화받기를 고대하며 주님의 은혜에 기대어 살아간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는 중이므로 미완성의 서로를 함부로 판단하고 규정짓지 말아야 한다는 설교의 내용은 합당하다.
그러나 그 설교의 내용이 본문이 가지고 있는 역사문법적 의미와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 본문이 말하는 외모와 중심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설교는 두 단어를 붙잡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 다른 결론을 내놓는다.
성경 본문을 문맥을 따라 다루지 않고 성경 이야기에 대한 통전적인 이해에서 벗어난 교훈은 언제나 단편적이고 국지적이다. 과녁을 빗나간 화살처럼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를 빗겨간다. 다분히 자의적으로 구성된 내용이 하나님의 이름표를 달고 나옴으로 성경을 오독하게 만든다. 그것은 성경의 본문을 다루는 태도와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다. 유익하게도 우리는 이미 사울과 다윗의 전생애를 알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정보들을 가지고 다시 돌아가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되새겨볼 수 있다. 물론 그리스도의 빛으로 비추면서 말이다.
본문의 내용이 현재 우리의 주변적인 정황에 대한 도움말 정도로 취급당해서는 안된다. 이는 성경에 대한 접근이 게으르거나 단순하게 보여지게 한다. 어쩌면 진짜 이유는 따로 있을지 모르겠다. 성경이 이미 기독교의 교리에 의해 재정의 되었고, 구약의 내용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그림자요 모형과 같으므로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인식이 그것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사울과 다윗은 하나님께 어떤 의미였을까?
'설교 되새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사 입다, 그는 복된 삶을 살았는가? (1) (0) | 2025.04.05 |
---|---|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3) (1) | 2023.12.07 |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1) (2) | 2023.12.07 |
은혜의 나라입니다 (0) | 2023.10.29 |
만물을 다스리는 자 (0) | 2023.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