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셨다. "너는 그의 준수한 겉모습(용모)과 큰 키만을 보아서는 안 된다. 그는 내가 세운 사람이 아니다.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외모)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주는 중심을 본다." (삼상16:7, 새번역)
우리는 각자 인생에 대해 논하지만 정작 삶의 본질은 잘 모른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깊게는 모른다.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음을 알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관심은 대단히 적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경배하며 절절한 사랑을 고백하고 예수님과 24시간을 함께 동행하자는 마음 끌리는 권면에 뜰뜨지만, 예수님이 정작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한 더 많은 앎에는 그다지 열심이 없다. 이미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 있고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뜨거운 찬양과 눈물어린 기도와 화려하고 풍성한 예배가 예수님께 드리는 최상의 것이라고 그 누가 말했던가?
우리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등지고 잊어버린 것으로 오해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중요하게 여겼고, 새롭게 형성되는 여호와 신앙과 유대주의의 규범들을 준수하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었다.
(물론 여호와 신앙과 바알 숭배를 동시에 수용함으로 두 마음을 품은 것이 하나님 책망의 근본 원인이었다. 화려하고 정성스런 제사와 약속된 풍요라는 당시의 혼합된 종교형식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엄격한 바리새적 교육을 받고 그 기조에 충성을 맹세했던 바울은 내부자로서 그들을 고발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롬10:2)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세밀하게 현실에 적용해서 상황에 따른 규칙들을 만들고 매일 실천했다. 성전을 잃어버린 유대인들이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었다.
사람의 본질상 그들의 그런 신앙행위는 형식에 대한 충성으로 변질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는 무관하다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으로 확인되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율법교사)으로 대표되는 율법지킴이들은 구체적 행동양식으로서의 기도와 금식, 구제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유대인들의 철저한 십일조 지킴은 그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나타내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철저한 십일조 준수를 인정하시지만 하나님이 제정하신 율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잊고 있다고 책망하셨다. (마23:23)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그것을 잘 지켰느냐를 따지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은 율법의 가장 중요한 뼈대가 되는 정의와 긍훌과 믿음이 네 삶에서 드러나느냐를 보시는 분이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대해 알려고 열심을 냈으나 결국 하나님을 아는데는 실패했다. 우리가 신이신 예수님을 예배하는데만 집중하면서 정작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깊은 관심이 없다면 우리는 유대인들의 전철을 밟는 것이다.
사무엘이 아말렉 진멸의 명령을 어긴 사울을 책망하자 사울은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좋은 것을 남겼다고 변명했다. 그러자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다.
아무리 화려하고 풍성한 예배를 드릴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원하시고 바라시는 뜻을 분별하고 그것을 삶으로 나타내는 것을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고 기뻐하신다. 같은 맥락으로 예수님께서는 호세아서의 말씀을 두 번 인용하셨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 [호6:6, 새번역]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자비요, 희생제물이 아니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9:13, 새번역]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너희가 죄 없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12:7, 새번역]
오늘의 본문은 외모와 중심의 대비를 통해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왕의 자질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기회가 된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들이다. 왕은 기름부음을 받은 특별한 존재이지만, 그 중심에 무엇을 채워가느냐가 그 왕을 평가하는 하나님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다.
그 갈망은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참된 앎으로 연결되어져야만 한다. 그 앎이 내 삶에 구체화되기를 힘쓰면서 동시에 우리 주님의 손길과 성령의 비추이심과 동행하심을 기다리는 것이 그 어떤 외부적인 여건보다 중요하다.
왕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는 크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왕을 세우셨다. 하나님은 물으신다. "왕은 그 중심에 나의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꼭 붙잡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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