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되새김

들리신 인자를 바라봄

강가딘777 2019. 12. 18. 11:03

요한복음3:1~16 들리신 인자를 바라봄

 

(키워드: 거듭남, 하나님 나라, 들리신 인자를 바라봄, 믿음, 영생)

 

바리새인 랍비이자 당시 유대의 최고의결기구인 산헤드린공회의 회원인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다. 낮 시간에 만나기엔 주변의 눈이 껄끄러웠음이라. 온 수리아 땅에 놀라운 행보를 거듭하고 있는 예수님을 유대종교인들은 도끼눈을 치켜뜨며 의심스럽게 지켜보는 상황이다.

 

그는 먼저 예수님을 자기와 같은 랍비라고 부르며 존중을 표한다. 그리고 표적들, 여러 기적과 이적을 행하는 것은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으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그는 예수님의 진정한 정체가 하나님의 역사인지, 아니면 새로운 이단의 출현인지를 직접 파악해보고 싶어 어려운 발걸음을 했을까? 아니면 진리를 찾으려는 구도적 열망에서 결코 평범치 않은 놀라운 일을 하고 다니시는 예수님과의 개인적 교제를 위해서였을까?

 

예수님은 그의 생각을 아셨다! 예수님은 (갑분싸~)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다. 니고데모는 속으로 많이 당황했겠지만,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는 게 도대체 가능하냐고 되묻는다.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다.

 

(마태복음에 세례요한이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자.

 

불과 성령, 물과 성령. 물은 씻고(겔36:25~28) 불은 태운다. 성령이 임하심은 우리의 죄를 씻고 태우신다. 우리는 진정한 회개와 회복을 통해 그리스도를 통해 임한 하나님 나라를 보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이 본문에서 우리가 나중에 죽어 갈 천국만을 생각한다면 대단히 좁은 해석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임하기 시작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 임할 하나님 나라의 그림을 우리에게 그려주고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한 거듭남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영적인 생명을 받는 것이다. 거듭난 자는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종말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자다.)

 

예수님은 니고둥절하고 있는 니고데모에게 육신의 태어남과 영의 태어남은 다르고, 바람이 불지만 보지도 만지지도 못하듯 성령으로 난 사람도 이와 같다고 하신다. 이 말은 성령으로 거듭남은 우리가 눈으로 분명하게 보이는 형태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바람과 성령의 헬라어 단어는 pneuma(프뉴마)로 같다. 숨, 호흡의 원뜻을 가진 단어로 언어유희를 사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니고데모는 끝까지 진지한 관찰자의 입장을 견지하며 묻는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예수님의 말씀과 하신 일을 본 사람들이 그것을 증언하는데도 너희들은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기 위해서 예수님이 하셔야 할 일, 하늘의 일을 마침내 드러내신다.

 

민수기21장 이집트를 떠나 광야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모세에 대한 원망과 불평으로 인한 하나님의 불뱀 심판을 상기시키신다. 모세가 놋뱀을 들고 기적적으로 민족을 구해냈듯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인자가 (십자가에) 들려야 한다. 이것은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다.

 

(니고데모는 이 순간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어느 정도 이해했을까 궁금해진다. 이후 그는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자 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 앞에서 말과 행동을 다 알기도 전에 심판을 내리면 안된다고 예수님을 변호하기도 했다.(요7장) 또한 같은 산헤드린 공회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신을 내어달라고 한 후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와서 함께 새 무덤에 장사를 지냈다.(요19장) 아리마대 요셉과 함께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전승도 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의 인생에 큰 전환점이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예수님은 복음의 진수를 이렇게 선포하신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내가 지금 행한 여러 기적과 이적은 별 게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신 사랑으로 인자로서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십자가 들림과 부활의 역사가 나타난다, 이것을 온전히 믿는 사람들은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중이다.

 

영생을 우리가 죽어 천국가서 영원히 산다는 뜻으로 보통 받아들인다. 이 좁디 좁은 구원관을 버려야 교회가 산다. 영생은 그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수용하는 가운데, 우리가 하나님의 신적 성품과 자원 안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베드로후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후1:3-4)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영생은 죽어서 영원히 사는 것만이 아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과 의와 사랑의 통치 안에 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를 바로 앎으로 일어나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신적 성품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무한하며 풍성한 신적 자원이 사용될 때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영생을 산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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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되새김)

-니고데모는 인생의 문제와 답을 들으러 왔다. '내가 죽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 지극히 현재적 해석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강대국들 사이에서 오랜 속국으로 시달리면서 메시아언약에 대한 강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구약에 다윗과 같은 지도자를 보내신다는 언약과 관련되어 있다. 유대인들에게 모세와 같은 선지자, 다윗과 같은 왕은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영적인 의미의 존재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바라는 하나님 나라는 지금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죽어서 가는 천국 개념하고는 다른 실존적이며 현실적인 개념이었다.

 

-놋뱀을 보면 되는 것처럼, 그냥 쉽게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된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된다. 그 믿음안에서 영생을 얻는다. 너무 쉬운 영생의 복음을 주셨다. 그렇게 함으로 사망과 죄의 독이 빠지고 영원한 생명이 우리안에 들어온다. 저주, 멸망항 존재, 놋뱀을 통해 너희가 받은 저주를 보라. 십자가는 저주의 형상이다. 그 형상이 내 실상이고 내 실체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구원시킬 수 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증한 옛 사람을 볼 것이다.

 

: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 주권으로 주어지는 선물, 은혜에 속한 것이다. 우리의 선행, 공로가 구원을 가져오지 않는다. 아쉬운 것은 단지 하나만 이야기하는 것이다. 구원에 대한 다양한 말씀들이 성경에는 많다.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도 있다. 이것을 해결해주지 못하고 명제적 교리만 반복하는 것은 이제 그만하자.

 

놋뱀을 보는 것도 단순하지 않다. 모세의 말을 구원의 말로 믿고 놋뱀을 보는 것이 가장 합당한 행동이겠다. 당장 뱀에 물렸는데 놋뱀을 볼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겠고, 믿음의 눈이 아닌 막연히 요행을 바라는 기계적인 행동으로 볼 수도 있다. 물론 우리가 어떤 조건 아래에서 보고 안보고를 따져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구원은 아주 쉬운 것이라는 전제를 이 구절을 통해 얻어낼 수는 없다!

 

예수님이 심판과 저주의 십자가에 달리심(들림)을 멸망과 저주의 형상인 놋뱀에 비유하면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당시의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바울은 말했다. 저주의 상징같은 것으로도 하나님은 인류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달리심이 저주처럼 보여도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행위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삼으셨다. 당장에는 말도 안되고 이해도 안되는 사건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을 요구하시고 그 자발적 사랑과 순종의 믿음이 우리를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맛보게 하신다. 본문에서 쉽게 차용되는 피상적인 이미지를 마치 견고한 진리처럼 말해서는 안된다.

 

성경은 언제나 전체적인 내용 아래에서 작은 본문을 읽고, 모든 본문들에 대한 이해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읺아야 한다. 놋뱀을 보는 것이 단순하고 쉽다는 평가는 어디에도 없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음을 고백하는 것을 쉽다 어렵다는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신실한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심에 대한 우리의 반응으로 예수님만 바라보면 된다는 쉽고 간결한 길을 주신 것은 너무나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믿음의 문제는 쉽고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모두들 경험적으로 안다. 복음은 단순한 명제적 진리로 주어지지만, 그 그리스도에 의한 복음이 우리에게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것은 대단히 다층적이고 복합적이다.

 

쉬운 복음을 통한 쉬운 구원이라는 도식이 그동안 심각한 문제를 가져왔다. 값싼 복음, 값싼 은혜가 그것이다. 지금 교회에서의 많은 문제의 원인이 이런 편협하고 왜곡된 구원이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구원은 감정상태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 한전 태어나면 사람이듯이, 한번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나면 계속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후는 성장의 숙제가 남은 것이다. 자기부족을 구원과 결부시키지 마라. 하나님의 은혜로 선물로 주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만의 성령으로 주어진다. 구원의 백성으로 자라가고 성장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의는 없다.

 

: 맞는 말 같지만 역시나 좁은 이해이다. 이것은 내가 구원받은 사람이니 그저 감정을 잘 다스리는 것 외에는 다른게 필요없다는 말과 거의 동일하게 느껴진다.(성장과 성숙은 의무사항이 아니니까) 그러나 우리는 못해도 하나님의 성령은 하실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오히려 유익이라는 말씀은 거듭난 자에게는 성령의 내주하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전히 거듭난 자는 마지막까지 가증한 자신의 옛사람과 대면할 이유가 결코 없다.

 

칼빈의 전적타락의 교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지만, 우리가 거듭난 사람이 되었을때 나타나는 성령의 새롭게 하심과 사랑의 역사와 순종하는 믿음의 능동성까지 제한하지 않는다. 우리의 의는 없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과 사랑안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행하도록 이끄시는 이는 내주하신 성령이다.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옛사람이라 칭하는 죄의 지배하에서 죄의 종노릇하며 살았던 기억들과 영적경향상으로 존재하는 죄이다. 지금 우리는 내주하신 성령의 지배가운데 있지만, 죄는 여전히 우리안에 남아 있기에 사단은 틈을 엿보며 죄와 환경을 이용해 우리를 과거의 기억을 되플이하도록 우리를 유혹한다.(개혁주의)

 

칭의와 성화는 함께 가는 것이고 성화는 칭의를 완성하는 것이다. 하나만 이야기하면 뭔가 이상하지만 둘을 다 이야기하면 성경이해는 완전해진다.

 

-하나님 나라는 영원한 천국이다. 영생은 그 천국에 들어가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 더불어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삶에 대한 깊은 고찰은 왜 하지 않는가? 이것은 자연스럽게 신앙과 삶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속에서 현재적 하나님 나라의 은혜와 충만함보다는 내세를 목표로 하는 수동성으부터 오는 침울함과 메마름에 침잠하게 되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에게서 받는 삶의 역동성과 기쁨을 앗아간다.

 

결론 :

둘이 있지만 하나만 이야기한다. 성경을 설교하지만 성경의 통전적 이해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본문으로 출발하지만 어느 순간 본문이 배경이 되어버린다. 전체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케리그마)를 지향하지만 동어 반복상태에 늘 빠져버린다.

 

명제적 진리를 다루지만, 진리의 내용에 대한 진지한 묵상이 없다. 복음을 이야기 하지만 복음의 깊은 의미를 담아내지 못한다. 구원에 대한 전제를 말하지만 구원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피상적이다.

 

피상적 설교는 결코 사람의 마음에 울림을 주지도, 그 영혼의 근본적인 각성을 통한 삶의 변화를 주지도 못한다.

믿음에 대한 수동적인 태도가 모든 설교나 가르침에도영향을 주는 것일까? (기도, 성령님, 의의제기~)

 

다층적 복합적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절실히 필요하다. 지금 자신이 수용하는 교리(조직신학적 이해)를 중심으로 성경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주해를 기반으로 올바른 해석을 위한 다양하고 깊이있는 공부가 필요하다고 본다. 의도적인 균형잡기가 건강한 믿음의 새살을 돋게 할 것이다. 제발 그리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