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의와 손길을 좇은 더 온전한 용서의 방법
사람은 용서를 자기감정따라 한다. 요셉은 처음부터 용서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리고 요셉에게는 아버지와 형들을 찾아갈 권력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진정한 용서는 기다림
7년의 대풍년 이후 7년의 흉년이 시작되고 형들이 곡식을 구하러 올 때까지 기다렸다. 요셉은 형들 앞에서 자기의 정체, 자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들을 하나님 앞에 제대로 용서받을 사람들로 세워주기 위함이다. 이것이 내가 용서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형들이 시기, 미움에서 벗어났다고 확증할 때까지(베냐민 대신 종이 되기를 청하는 유다) 기다린다.
#기다림을 품을 줄 아는 용서가 능력
상대가 죄를 이기는 싸움을 하도록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이기기 위한 영의 싸움을 하는 과정을 버티고 견디도록 기다리는 것이다. 자기부인을 하고 죄가 꺽이도록 하는 과정이다. 하나님 앞에 세워져야 할 온전함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요셉은 자기감정대로 하지 않고 기다렸다.
하나님의 주권에 굴복해서 그 앞에 엎드리고 그분 손길을 바라보고 한걸음 한걸음 나가는 영혼이면 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고 십자가 사랑과 은혜에 의탁하면 우리 영혼에서 용서의 힘과 능력이 흘러나올 것이다.
#참된 용서와 용납은 하나님 몫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세워져야 할 온전함이 무엇인지를 향해야 한다. 그것을 향해 내 조급함, 감정을 절제하고 조절해야 한다. 참 용서와 용납의 주님이 십자가 사랑으로 우리 안에 이미 오셨다. 그분의 영이 부족한 우리를 온전한 길로 이끄시리라 믿는다. (끝)
♤♤설교는 나름 의미있고 은혜로운 결말을 맞았습니다. 요지는 요셉은 처음부터 용서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 힘은 하나님 주권을 인정하고 굴복하는 것, 하나님의 은혜를 앎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기다림을 통해 용서를 완성했습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몫입니다.
설교의 주된 목적은 요셉의 형들에 대한 감정을 하나님의 주권에 굴복하며 은혜에 의탁하여 기다림으로 해결해 가는 것처럼, 우리도 남에 대한 용서를 이와 같이 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의 기본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에 굴복하고 그 은혜에 인생을 맡기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며 오래 참음으로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엡4:2,32)
간간히 영화 밀양을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살해한 사람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아이 엄마 앞에서 평화롭게 미소짓던 영화속 장면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이미 용서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간으로서의 가진 근본적 죄성향에 대한 상징적 선포이지, 우리 삶에 나타나는 모든 것에 대해 단정적으로 획일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우리가 용서하겠으니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구약의 5대 제사중 속죄제, 속건제는 의무제사였습니다. 속건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재산상의 손실을 끼쳤다면 먼저 그 피해자에게 가서 120%를 보상한 후에 하나님게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제사드리러 가다가 원망드릴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제사드릴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가서 사과하고 나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속건제의 의미는 하나님께 기도는 알아서 하되 먼저 해야할 것은 당사자를 찾아가 사죄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풀릴 때까지 용서를 구하는 것이 먼저인데, 사람에게 가는 것을 생략해버리고 하나님께 가버릴 때, 구약이 말하고 기독교가 말하는 사죄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용서하는 자와 용서 받는자의 입장은 분명 다릅니다. 요셉은 용서하는 자이고 형들은 용서받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오늘 설교는 줄곧 요셉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고, 이는 용서에 대한 쌍방향적 관계를 포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처음부터 용서의 마음을 품게 되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용서받아야 할 형들은 요셉의 용서 이후에 마음의 평안을 얻었을까요? 죄에 대한 처절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 요셉으로부터 온전한 용서의 과정을 거쳐 정상적인 관계회복이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은거 같습니다.
놀랍게도 야곱이 죽자마자 형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요셉이 자기들이 요셉에게 행한 악으로 인하여 미워하여 되갚음 당하지 않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입니다.(창50장)
그래서 그들은 죽은 야곱의 유언을 전하게 해 요셉의 혹시 모를 보복을 방지하고자 했습니다. 형들은 아버지 야곱이 요셉에게 형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고 유언하였다고 하면서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의 죄를 이제 용서하라고 사람을 통해 전하였습니다. 또 직접 요셉을 대면할 때는 당신의 종들이라고 하며 요셉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에 요셉은 울면서 두려워하지 마시고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냐고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습니다. 내가 이제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창5:23) : 자기의 자식으로 길렀다)
여기서 눈에 띄는 부분들은,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이다
대기근의 2년쯤에 야곱 일행은 고센땅으로 이주하였고, 17년이 지난후 야곱은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런 짧지 않은 세월이 흐른 후에도 형들은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여전히 자신들이 행한 과거의 죄를 요셉이 용서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조차도 유언으로 '이제는 그만 용서해라'고 할 정도였고, 형들도 '이제는 오랜 시간 반성했으니 용서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요셉도 그렇습니다.
"아니, 형님들 지금까지도 그것을 마음에 품고 있었습니까? 저는 형님들 만나기 전부터 그 모든 일을 용서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굴복하고 그 은혜에 의탁해서 살다보니 형들을 용서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생겼고,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기다려 당신들을 행한 용서가 온전케 되었습니다. 용서는 하나님 몫입니다. 허허허"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그런 형들을 보고 울었습니다. 왜 울었을까요? 다음의 말 속에서 그 속내를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두려워마세요.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그들의 허물과 죄는 명백하고, 벌을 받아야 하지만, 내가 그것을 정죄하고 심판할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께서 할 일이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이 형들과의 대화속에는 느끼는 감정의 골은 17년전 아니 30여전이나 똑같다는 것입니다. 정녕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온 용서의 은혜가 야곱의 아들들에게 임한 것이 맞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이제 비로소 형들을 진심으로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그 증거로서 진정한 가족이 되겠노라 다짐합니다.
"당신들은 나에게 분명 해서는 안될 일을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조차도 선한 결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보는 것 같이 기근으로 죽어갈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보존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걱정마세요. 내가 당신들과 진정한 가족이 되어 당신들의 자녀를 내 자식처럼 키우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일어난 일들도 인간의 마음에 큰 상처를 남깁니다. 용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용서하고 용서받는 능력은 은혜로 주어지지만, 그 과정 속에서 용서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우리의 의지와 마음의 변화가 반드시 필요한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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