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되새김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봅니까?

강가딘777 2019. 12. 30. 13:22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봅니까? (시147:1~12)

 

<오늘의 주제 구절>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시147:10-11)

 

그전에 다윗의 찬송시인 시편 145~150편을 묵상해보자. 하나님의 은혜에 더없이 감사하며,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과 사랑으로 행하신 일을 전심으로 찬양하는 내용이다. 그 중에서 그런 하나님께 드려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반응들이 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

(시145:18-20)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146:5)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도다 (시147:11)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시149:4)

 

정리를 해보면,

하나님께 진실하게 간구하는 자를 가까이 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고,

하나님께 부르짖음을 듣고 구원을 이루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보호하시고,

하나님을 도움으로 삼는 자는 복이 있고,

하나님께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기뻐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신다.

 

이것들은 모두 다 하나님 백성됨의 기본 품성들이다. 삶의 바른 기준을 제시하는 조건들이 아니라, 놀라우신 하나님의 존재와 그 성품에 반응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들을 말하고 있다.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외하는 자를 이처럼 사랑하신다.

 

주제 구절로 돌아가보면,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기뻐하신다고 하신다.

 

경외는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현대인의 성경),주를 두려워하는(쉬운 성경), fear(KJV,ASV)

 

인자하심은 한결같은 사랑(새번역,현대인의 성경), 변치 않는 사랑(쉬운 성경), 변함없는 사랑(우리말 성경), mercy(KJV), lovingkindness(ASV), unfailing love(NLT)

 

(성경을 읽을 때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성경의 익숙한 단어들을 - 사실은 그 본뜻과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데도 - 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항상 여러 성경역본을 대조하는 작업을 거친 후 가장 문맥에 어울리는 단어를 대입하여 읽는 습관을 가진다면, 본문에 대한 이해가 더욱 분명해진다.)

 

경외는 어려운 단어이다. 두려워 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말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무서운 하나님,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 맹렬한 심판의 하나님이시기에 나오는 게 아니다. 두려움은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존재의 크나큰 간극차이에서 나오며,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서 타락한 인간본성이 느끼는 자연스런 느낌이다.

 

경외는 크고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하기 시작할 때만 나오는 감정이다. 하나님을 내 삶을 지켜보는 분, 내 삶을 의지할 분으로 인정할 때 우리는 두려움보다는 사랑으로 그분을 대할 수 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말한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일4:18)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림으로 우리는 두려움과 무거움을 떨쳐내고 하나님을 기쁨으로 찬송할 수 있다.

 

경외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깊어져 어떤 사람은 "하나님, 까불면 죽어"라는 망언을 하기도 했다. 친밀감을 과하게 표현한 농담이겠지만, 이 사람은 하나님 경외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다.

 

경외는 하나님을 진정한 하나님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대하고 자기의 생각과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우리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맹목적으로 받아주시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경외함은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대하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깊이 인식하며, 어느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시고 의로우신 주권을 기대하며 바라보는 것이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다른 역본에서는 한결같은 사랑, 변치 않는 사랑, 변함없는 사랑, 자비하심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변치않는 은혜가 우리를 참 생명으로 살게 한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 우리를 그의 자녀되게 하신다.

 

그리고 그분은 그런 우리를 기뻐하신다. 말의 힘이 세다고,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고 기뻐하지 않으신다. 세상에서 환영하는 것과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신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으로 대하는 자를 기뻐하신다. 그리고 끝까지 사랑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대하는 자를 기뻐하신다.

 

 

설교되새김)

"삶의 바른 기준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을 경외함의 기본은 그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주어진 모든 삶의 결과와 상황들이 그분의 주권 아래 있고, 그 주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신겁니다, 하나님이 주신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고 다 알 수도 없다. 하지만 선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굴복해야 한다. 우리의 좁은 생각으로 하나님의 섭리가 다 이해되지 않는다.

 

창세기의 요셉을 보라. 형들이 그를 죽이려 웅덩이에 던졌고 노예로 팔렸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실 수 있는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기가 쉽지가 않다. 요셉은 그 고통스런 과정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다. 하나님이 허락하셨으면, 하나님이 선하시니까 인도하시겠지..하나님을 경와하면서 믿음의 삶을 이어갔다. 억울한 누명 쓰고 옥살이..이해할 수 없는 힘든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긍휼을 바라보았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과정에서는 이해가 안된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다 이해할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바라보는 것이다. 요셉처럼 인내로서 믿음의 길을 걷는 것이다. 우리가 선택한 의와 믿음이 때로는 더 심한 고난으로 이끌릴 때도 있다. 그런 때라도 하나님의 주권을 끝까지 인정하고 인내로서 믿음의 길, 의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해될 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쉽다. 하지만 진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해가 안되는 고통스런 상황속에서도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고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의의 길을 걷고 믿음의 삶을 꾸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올해도 변함없이 우리를 삶의 주인이시고 주권자이셨다. 독생하신 주님을 내어주신 긍휼의 주님이셨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주제 구절은 자비와 긍휼이 넘치시는 하나님께 바른 반응을 보이는 이들에게 주시는 은혜의 말씀이다. 어떤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창세기 37장~50장은 요셉의 긴 이야기다. 요셉을 '꿈꾸는 자'라고 부른 것은 그의 형들이었다. 미움과 시기를 다분히 담은 별명이었다. 늦은 나이에 낳은 요셉은 채색옷을 따로 입힐 정도로 야곱의 편애를 받았다.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다 고자질을 했고 형들은 요셉앞에서 말조심을 했다.

 

요셉은 두가지 꿈을 말했는데, 형들과 부모가 요셉에게 엎드려 절한다는 내용이었다. 야곱조차도 화를 낼 정도였다. 그런 일들이 형들의 미움과 시기를 더욱 크게 했고, 어느날 들판에서 요셉에 대한 살인모의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요셉은 미디안 상인에게 팔려 애굽으로 가고, 다시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 팔렸다.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구속사가 요셉에게 이어졌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요셉에게 임했다. 성경은 이를 아주 독특하고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로 전한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창39:2-5)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창39:21-23)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창39:9)

 

~보디발의 집 노예가 되었지만, 하나님은 요셉에 적극적으로 은혜를 베푸셨다. 요셉과 함께 계셨고,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으며, 주변에까지 복이 임하게 하셨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지만 요셉은 그 순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처음으로 고백하며 유혹을 뿌리친다. 만나는 사람들이 중요한 일까지도 맡길 정도로 깊은 신뢰를 받게 하셨다. 또한 꿈꾸는 자로서 애굽의 운명을 바꿀 꿈의 내용을 정확히 풀게 하셨고, 보디발의 가정총무일과 감옥에서 중요공직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큰 나라였던 애굽의 총리직을 충분히 감당하게 하셨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다른 이들과 달리 특별하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였고, 바로 왕조차도 요셉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으로 인정하였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에 인간적인 아픔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닥친 고난이 고난이 아닌 것처럼 느끼지도 않았다. (요셉은 하나님을 분명 인식하고 살아갔지만, 어떤 특정한 상황속에서 다윗과 같은 절절한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의 기록이 없다.

 

그에게 깊게 새겨진 마음의 상처는 아들들의 이름에서 드러난다. 장자 므낫세는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뜻이고, 차남 에브라임은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뜻이다.

 

또한 다시 만난 형들에게 자기를 팔아버린 기억을 떠올리도록 말한다. 요셉은 표면적으론 고난으로 이어진 인생사를 써나갔지만 하나님께서 은혜의 손으로 그를 꼭 붙잡고 계셨다. 그리고 그는 청소년시절의 꿈을 통해 어느 정도의 느낌을 받았겠지만, 자신의 이 가혹한 운명과 연속된 고난이 결코 개인적인 것이 아니며, 도도히 흐르는 하나님의 섭리의 강물에 자신이 떠내려 왔음을 형제들과의 재회를 통해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 요셉의 인생은 결코 개인적인 고난을 극복한 사람의 입지전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일반화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흐름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기 때문이다.)

 

 

요셉에 대한 설명을 장황하게 한 이유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바른 이해를 위해서다. 개인의 삶과 하나님의 주권 사이에는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성경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복을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지만, 더욱 많은 부분에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기 생각대로 살아간 많은 불순종의 아들들의 이야기로 점철되어 있다.

 

 

'각자에게 주어진 모든 결과와 상황들이 다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다'는 말은 더 친절한 설명이 필요하다. 이 말은 마치 숙명론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나아가 내가 당하고 있는 모든 현실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도 들린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시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다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다고 들린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의 현실적, 영적 상황은 모두 다르다는데 있다. 모든 존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살아감에도 사단과 죄의 유혹과 온갖 환경의 고난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그래서 모든 상황의 일반화는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위대한 성경 인물에 대한 그동안의 많은 설교에 일반화의 부적절한 적용이 언제나 빠지지 않았다. 요셉이야기는 거대한 구속사 속에 일어난 하나님께서 특별한 섭리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것을 일반화해서 볼 사건은 아닌 것이다.

 

성경은 창조와 재창조, 타락과 회복, 생명과 사망,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를 이야기한다.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모든 삶의 부분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믿는 자의 합당한 도리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주권과 사람의 자유의지가 서로 충돌되지 않고 자발적인 사랑의 순종을 원하신다.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이 세상을 보자. 사단이 땅의 주인행세를 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거듭난 신자들조차도 여전히 내주하는 죄의 유혹 속에 살고 있다. 그 안에서 수많은 고난과 억압과 폭력이 난무한다. 죄로 인한 악이 신자의 삶을 짓밟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환경의 고난속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세월호 아이들의 억울한 사고가 어찌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이 될 수 있을까? 히틀러의 유대인의 학살이 하나님의 계획속에서 나온 일인가? 북한 김씨체제의 폭정에 피눈물 흘리는 동포들의 현실은 하나님의 주권하에서 묵인되어 일어난 일이란 말인가? 그래서 모든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나오기에 무조건 복종하고 입을 닫고 그저 인내하며 사는 것이 맞다는 말인가?

 

원론적으론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일어나지 않는 일들이 결코 없겠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어긋나고 기뻐하시지 않는 일들이 성경에는 얼마나 많은가?

 

하나님은 인간의 감정을 담아 인간의 언어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후회하시고 한탄하시고 분노하시고 책망하시고 슬퍼하시고 민망히 여기신다. 이를 볼 때 하나님의 주권아래 일어난 일들이 모두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에 따르는 일들이 아님은 명백하다.

 

하나님의 주권이란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주인되심이며 그 통치를 말한다. 온 우주는 이 주권 아래 다스림을 받지만, 성경속 인간의 역사를 보면, 사단의 유혹으로 인한 죄가 인간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지 못하도록 방해해왔다는 것을 이미 일고 있다. 죄의 통치 아래 살아온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기를 결심하고, 하나님의 주권이 자신의 모든 삶속에서 나타나기를 기대하며 또한 인정하며 살아가는 중이다.

 

 

너무 단편적이고 원리적인 것만을 제시하는 설교는 든는 자들을 항상 극단적인 결론으로 이끈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주권안에 있음을 믿지만, 이 세상은 (성경에서 다루듯이) 하나님의 바른 통치가 미치지 않는 어둠과 죽음과 고통과 고난의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주고 있다. 그리스도라는 빛이 세상을 비추고 있지만 여전히 어둠이 활개치는 세상의 영향을 지금도 우리는 받고 살고 있는게 현실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위치한다.

 

의인이 고통받고 악인이 형통하는 세상이 하나님의 선하심의 통치안에 있는 것이 맞느냐고 묻는 것이 신정론이다. (그 주제로 쓰여진 성경을 살펴보라) 죄없는 아이들이 차가운 바닷물에서 목숨을 읽을 때,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고로 무고한 가족들을 잃을 때, 살아남은 자는 피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묻는다. 이것이 정녕 하나님의 뜻이냐고.

 

물론 하나님을 경외함의 기본은 그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모든 삶의 결과와 상황들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하나님이 하신 것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원리적인 설명이다. 하나님 주권에 대한 지극히 피상적인 이해이다!

 

물론 우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난을 다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고난들이 모두 하나님께서 하셨으며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한가지 더 생각할 게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린의 모든 것들을 가지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우리의 실패, 우리의 실수, 심지어 우리의 허물과 죄까지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고 의로우시며 인자하시며 자비하시며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속에서 함께 울어주시고 함께 가슴 아파하시는 분이시다. 세월호 아이들의 부모들과 함께 을 울고, 불의의 사고를 당해 상심한 사람들과 함께 가슴 아파하시며, 병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의 자리에서 위로하신다. 그런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하며, 그의 변함없는 사랑을 끝까지 바라보며 기대하는 삶을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