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되새김

선악과와 순종의 의미 (박영선.교회론중)

강가딘777 2011. 5. 12. 06:58

 

선악과와 순종의 의미      

박영선.교회론중

 

<로마서 5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아담과 비교합니다. 아담이 실패한 것이 무엇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인류, 새 나라를 세우는데 있어서 그 때의 실패를 예수님께서 어떻게 완성하시는가? 그때 아담이 실패한 것이 무엇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공하는 것이 무엇이냐를 날카롭게 비교하는데 있어서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순종'입니다.

 

(롬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아담의 범죄와 예수님의 의의 행실을 비교합니다.


(롬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이어서 19절에서는 무엇이 범죄였고 무엇이 의의 행동이 무엇이었냐, 그 내용의 본질을 설명합니다.

(롬5: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범죄가 무엇이었냐면 순종치 않는 것이라 하고, 의의 행동이 무엇이었냐면 순종한 것이라고 애기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담의 범죄에 대하여 하나의 통철력을 가지게 되는데, 아담의 범죄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이런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만드셨습니까?" 이 의문에 늘 봉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신 것은 그것으로 인간을 유혹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디. 그리고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가 사탄이 꼬여서 그것을 먹으면 선악을 알게 된다는 '마법'의 나무로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선악과를 만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드셔서 하나님 나라를 더 영광스럽고 풍성하게 만드는 일에 인간을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만드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빛이 있으라' 하실 수 잇고, 종류대로 나무를 내시며 종류대로 동물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그가 만드신 피조물인 우리를 그 일에 동참시켜서 인간에게 상당히 높은 지위와 많은 특권을 부여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인류에게 짐승의 이름을 붙이도록 하며, 그 나라를 다스리게 하시며, 그 모든 일에 하나님 나라의 모든 퐁성한 특권들을 누리게 하신 것과, 함께 동역하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하나 알아야 할 것은 그 사람이 최종결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그 사람은 청지기입니다. 주인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그가 최종결제자가 아니며, 권위아래 있는 청지기임을 우리에게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즉, 우리로 하여금 실패하지 않고 실수하지 않는 기준으로서의 선악과를 세워 놓으셨습니다. 

 

왜 그럴까요? 금령(禁令)을 줌으로써 "네가 이 모든 일에 궁극적인 권위자나 최종결제자가 아니다. 심을 품지마라. 교만한 자리에 가지 말고 네에게 준 모든 특권들을 순종함으로써 시행하고 그리하여 네 특권들을 놓치지 말라"는, 사실은 부모된 마음이 자식에게 금령을 준 것같이 '나 없을때 불장난하지 마라' 하는 식으로 갖다놓은 하나의 경계표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탄이 와서 이렇게 꼬였습니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으려고, 너희가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까봐 너희를 시기해서, 편협한 분이라서 너희로 좋은 것을 주지 않으려는 분이라서 금령을 내렸다'고 꼬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거기에 빠졌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선악과라는  나무가 가장 큰 문제가 아니라, 아담이 자기의 행동을 결정해버린 것이 그 범죄의 가장 큰 문제라고 애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종치 아니함이라고 애기합니다. 그것이 아담의 범죄가 가졌던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마 아담이 순종했다면 아담을 통해서 그의 나라를 가장 아름다운 경지까지 만드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일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이제 두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일을 이루십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이 통치권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 나라의 건설은 통치권이 시행되는 것으로 먼저 성립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나라를 건설하는 초석을 쌓는 것은 순종입니다. 그것 없이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이 누구에게 시행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늘 이런 말로 반복디는 것입니다. '기록되었으되'  늘 아버지의 말슴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내뜻대로 마옵시고', 이런 말이 늘 앞장서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번째 당하신 시험, 2-3번에 걸친 시험이 모두 무엇이었는가를 보십시오. 사탄의 시험이 몽땅 다 초점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네가 최종결제자가 되어 네 앞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라", 그것입니다. '이 돌로 떡을 만들어 봐라', 이것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해봐라'라는 어떤 능력에 관한 시험이 아닙니다. 하나님아래 있는 신하가 통치자에게 결제를 올리지 않고 스스로 알아서 문제를 해결하게 함으로써 받아들여야 할 명령권을 받들지 않는 자리로 그를 빼내게 할려는 시험인 것입니다. 첫번째 아담이 거기에 넘어갔던 것이고, 그것이 우리 인류를 타락케 한 그 시험의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무엇으로 받습니까? "기록되었으되" 두번째 시험은 무엇입니까? "뛰어내리라. 하나님이 너를 받을 것 아니냐?" "네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예수님은 답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나 안하나, 내 편을 드나 안드나 이렇게 시험하는 것은 그 통치권을 받는 방법이 아닙니다. 졸병이 윗 사람을 시험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이것은 권위질서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내게 절하면 이 세상을 다 주겠다." 예수님께서 경배할 이는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오직 그를 경배할 것이니라."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할 것이니라.' 이것이 예수님이 당하신 시험의 아주 중요한 핵심들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이겨내신 것이 갖는 의미가 큰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2:6~8)


십자가를 지신 문제에 있어서도,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지금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순종'이라는 개념에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불러냈을 때, 믿음의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순종'이라고 애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신뢰하는 것,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 내가 납득할 수 없는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내용이 언제나 믿음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된 신자의 믿음의 핵심은 순종이라는 개념으로 다루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롬1:5)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으로 목표되고 있는가 보십시오.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다르게 말하면, 오늘날 우리 신앙의 가장 큰 병이 바로 이것입니다. "믿어 뜻을 이루는 것으로" 이렇게 바꿔놓습니다. 내가 믿었으니까, 내가 기도하니까, 내가 울면서 기도했으니까, 이렇게 떼를 씁니다. 아주 버릇나쁘게 된 것입니다.


순종의 최고의 모습이 순교입니다. 그런데 순교가 무슨 장렬한 것이 아닙니다. 죽는다는 것이 멋있어 보인적이 있습니까? 한편으로 치사하고 실패한 모습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순종의 최고의 모습이기 때문에 순교가 강조되는 것입니다.


(롬16:19)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믿지 않는 자에 관한 대표적인 설명과 또한 불신자에 대한 설명을 이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엡2: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불순종을 불신앙의 가장 큰 내용으로 꼽고 있습니다. 신자를 권면하고 옛날 불신앙때와를 비교하는 것도 대표적으로 이렇게 묘사합니다.


(벧전1: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 사욕, 이것은 내 마음대로 내가 주인이 되어 하는 것을 말합니다.

(벧전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순종이라는 단어로 신자의 신앙의 내용을 대표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신자에 대한 정의입니다. 왜 순종이 강조되어야 하는가요?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권이 시행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부름을 받고, 거기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통치권에 관한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으니 이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이고 이 나라에 들어왔으면 우리는 마땅히 이제 그의 통치아래 들어와야 합니다. 그 명령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위치이며 책임인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다 쫓을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거듭나지 않은 자로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왜 실패했을까요?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대속사역없이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할까요? 그 나라의 통치아래 들어가지 못할까요?

 

그 통치아래 들어가지 못하는 대표적인 잘못이 무엇이냐면 바로 이것입니다. 순종치 않은 것. 이스라엘의 실패를 같은 성격의 맥락에서 지적합니다.


(롬9:30-32)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롬10: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이스라엘의 실패는 무엇이라고 하는가요? 의의 법을 좇아 갔는데 행위에 의지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32절)


(롬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았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는 것은 아주 재미있습니다. 자기가 판단과 옳음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옳음의 기준이 되어 그분의 명령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일을 하여 내가 옳은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 그들의 신앙의 핵심이었던 것입니다. "저 사람은 틀렸고 나는 옳았다."라는 것.


성경이 요구하는 것, 하나님 나라의 요구는 '하나님이 시킨 것을 충성되이 했느냐?' 라는 충성에 관한 문제요 복종에 돤한 문제지,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지켰느냐 안지켰느냐가 아니라,  내가 한 일이 옳았느냐 글렀느냐는 기준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누가 옳았느냐? 안식일을 누가 정당히 지켰느냐? 누가 율법대로 살았느냐? 이것을 내가 옳았느냐 저 사람이 옳았느냐를 비교하는데 동원했을 뿐이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이 하라는 것을 내 진심을 가지고 섬기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신앙이 옳고 그른 것을 시비걸고 가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때문일까요? 자기의를 세울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죄에 관한 지적이 그것으로 자기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쓰여진다면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각자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어떻게 순종하며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원수를 사랑하며 용서하며 인내하여 위하여 기도하며, 오른편 빰을 맞으면 왼편 뺨도 대야하는가 하는 쪽으로, 순종하는 자기 일을 하나님 앞에서 점검하지 않기 시작하면, 서로 경쟁하는 일 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는 참 치사해집니다.

 

'이런 말은 할 게 아니지만' 그러면 안해하죠. '내가 이 말은 안할려고 했는데' 그러면 안해야죠. '누구는 알고 보면' 나쁜 사람이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화목하게 하는 일밖에는 부탁한 적이 없습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일수록 기준이 높아져서 정죄하는 일이 많습니다. 기도 많이 하면 많이 하는 것 때문에 안하는 사람을 정죄하게 되고 헌금 많이 하면 그것때문에 또 정죄하게 되고 남을 구제하하거나 또 큰 일 하나하면 안한 모든 사람이 바보같아 보입니다. 그러면 실패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나라에 관한 요구,  교회가 가장 많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주인되심, 주되심입니다.

 

(엡4: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기도)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오늘도 우리를 주의 악속과 주의 말씀앞에 불러모으셨으니 우리로 듣는 마음을 주시고 깨닫는 마음을 주시어 주께서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놀라운 그 축복과 소망에 대하여 깨우치며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의 목표를 삼으며  자랑으로 삼으며 인내의 근거로 삼고 믿음의 길로 달려갈 수 있는 우리의 신앙의 내용으로 채우게 도와주시옵소서. 오늘도 우리를 주께서 부르셨으니 주께서 함께 하사 우리의 전하고 듣는 것을, 듣고 깨닫는 것을, 깨닫고 행하는 것을 주께서 또한 간섭하시고 지켜 주실 것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