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인가?
창세기 1장 26-27절 여섯째 날의 인간 창조
여섯째 날의 마지막 창조물은 인간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고 말씀하신 의미는 난제다. 먼저 복수 '우리'에 대한 의미를 둘러싼 많은 논쟁이 있었다. 일찍이 유대 해석가들의 견해를 따라 하나님과 천상존재들의 하늘의 어전(御前) 회의(heavenly court, 소르 아도나이) 장면에 대한 묘사라는 해석이 인기를 얻어왔다(참조, 창 11:7; 사 6:8; 렘23:18,22)
반면에 초대교회 시대부터 여러 기독교 해석가들은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암시한다는 해석을 시도해왔다. 그러나 아직 삼위일체 개념이 드러나지 않은 창세기 본문에 조직신학적 개념을 과도하게 주입한 해석으로 보인다. 따라서 다른 기독교 해석가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내는 존엄 복수 호칭으로 여겼다. 그러나 주옹(Jouön)은 엘로힘과 같이 명사 자체가 존엄 복수형으로 사용될지언정 동사의 주격 복수 대명사인 '우리'가 존엄 복수로 사용된 사례는 전혀 없다고 지적한다. 대안적 견해로 이것을 혼잣말과 같은 '심사숙고의 복 수'(plural of self deliberation)나 '자기 독려의 복수'(plural of self-encouragement)로 보자는 해석이 있으나(예, '오늘은 우리가 교회 가는 날이지') 이것 역시 어색하며 근거를 찾아보기 어렵다.
가장 그럴듯한 해석은 '우리'라는 표현은 이것이 하늘의 어전 회의에서의 어법이긴 하되 천상존재들의 왕으로서 천사들과의 협의를 통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자기 결정권의 행사에 의한 일방적 선언으로 보는 것이다. 실제로 절대 주권을 가진 권력자는 '우리가 -하자'는 어법을 선언적으로 사용한다. 이것은 27절의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진술에도 정확히 부합한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은 별다른 의미론적 차이 없이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전치사의 차이, 말하자면 형상을 '따라'와 모양'대로'에서 두 단어의 개념적 차이를 찾아보려 한다. 그러나 창세기 5:3에서는 이 두 전치사가 '모양을 따라'와 '형상대로'로 뒤바뀌어 사용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교호적 사용은 두 전치사의 뜻에 별 다른 차이가 없음을 시사하며, 따라서 이것은 강조를 위한 중복으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27절에 비추어 보건대, 형상과 모양은 자주 '하나님의 형상'이란 표현으로 대표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은 창세기 9:6을 제외하고 창세기 1장에서만 나타난다. 이 표현은 명백히 인간이 다른 모든 짐승과 전혀 다른 특별한 존재임을 가리킨다. 27절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의 형상'은 곧 '하나님의 형상'이다. 아마도 천상의 인격적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성품,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을 것이다. 사탄은 자신이 공유한 하나님의 속성을 내던지고 반란을 저질렀으며, 결국 인간의 하나님 형상까지도 훼손해 타락의 길로 이끌었다.
최근의 매우 좋은 해석은 이어지는 26절 마지막 '다스리게 하자'는 표현과 28절에 비추어 하나님의 형상을 통치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고대 근동의 제국들은 왕을 신의 형상을 지닌 대리 통치자로 간주했다. 이러한 개념과 유사하게 하나님이 천상의 왕이신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의 속성을 부여받은 지상의 왕이다. 그러나 제국의 왕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서 왕으로 임명되었다는 점에서 창세기의 인간론은 고대 근동의 사상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모든 인간은 왕처럼 존엄하다. 지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적 왕으로 임명된 인간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다스리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왕국의 인구가 늘고 영토가 확장되면서 왕의 통치권이 온 사방에 미치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왕의 역할을 해야 한다(참조. 시 8편).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지 다른 생물들처럼 '종류별로' 창조하지 않으셨다(Hamilton; 11절을 보라). 인종적 다양성은 분명히 단일한 한 종 내에서의 아종들인 상이한 종족들일 뿐이다. 성경은 결코 인간이 '인류 과'나 '인류 속'의 원숭이 부류의 한 종류로 창조되지 않았음을 선언한다. 인간은 오직 한 종류로만 창조되었기 때문에, 지구상의 숱한 인종들은 모두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동등한 존재이며, 인간의 기질적, 신체적 차이는 있을지언정 지적 능력과 감정, 도덕관념에 있어서는 인종 간의 우열과 격차란 존재할 수 없다.
28절은 기독교 조직신학과 생태신학에서 '문화 명령'이라 일컫는 인간의 사명에 대한 진술이다. 인간이 마지막에 창조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구절은 기독교가 생태계의 파괴를 부른 지나친 자연의 착취와 무분별한 개발, 그로 인한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비난 받는 근거이기도 하다. 특히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이 인간의 무한한 자연의 정복과 개발을 정당화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 님의 창조 세계에 대한 관리의 책임을 포함하는 명령이지 무분별한 착취와 파괴를 의미하지 않는다.
29-31절 인간과 짐승을 위한 식물
하나님께서는 인간 이전에 창조된 모든 것을 인간에게 선물로 부여하신다. 인간은 그것들을 다스리고 관리하며 마음껏 누릴 권리가 있다. 인간에게는 모든 식물류가 먹거리로 주어진다. 또한 자연계의 모든 동물들에게도 채식이 허용된다.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우주가 인간을 위해 창조되었으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길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서 태초에는 인간과 동물에게 모두 채식만 허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생물학적 상식으로는 먹이사슬이 존재하지 않는 생태계란 유지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 창조된 세상은 먹이사슬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짐승이 초식을 하면서 약육강식의 먹이 경쟁이 없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공생했다고 선언한다. 이것이 이사야가 바라본 미래의 새로운 종말론적 세상의 모습이기도 하다(사 11:6-7; 65:25). 육식은 3장에서 최초의 죄와 더불어 시작되었을 수 있다. 인간의 타락과 더불어 죄가 세상에 들어옴으로써 모든 것이 뒤틀어졌다. 이러한 뒤틀어진 창조 세계의 변화와 더불어 동물들도 생태적 특징이 변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때 동물의 육식과 더불어 약육강식의 생태계가 시작되었을 수 있다. 창세기 4장에서 아벨이 목축을 했다는 것은 인간 역시 고기를 섭취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로 보인다. 노아 홍수 이야기에서 홍수 이후에야 비로소 인간에게 육식이 허용되고 짐승의 육식도 시작되었음이 암시되어 있는 것을 볼 때(창 9:3-5), 처음 세상은 약육강식의 생태계가 아니었고 타락 이후에도 육식이 허용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인간과 상위 포식자의 육식이 이미 홍수 이전에 시작 되었지만, 단지 홍수 이후에 '피 금지'의 계명과 더불어 육식이 재해석되면서 공식화되었을 것이다. 무지개가 홍수 이전부터 있었음에도 노아 홍수 기사에서 무지개가 처음 뜬 것처럼 묘사되면서 무지개가 재해석된 것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2:1-3 창조의 완료와 안식
마지막으로 인간의 창조와 더불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완료되었다. 하늘과 땅(천지)을, 그리고 하늘과 땅의 다양한 구성물들(만물)의 창조를 완성하셨다. 하나님은 일곱째 날에 일을 멈추고 안식하신다. 하나님께는 자신이 안식하신 그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한 날로 구별하셨다.
<묵상 Point>
• 인간, 특별한 존재
하나님의 인간 창조는 특별했다. '-이 있으라' 했던 다른 창조와는 달리 인간 창조는 손수하셨고('우리가...만들자), 그 종류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고 하나님처럼 신성하다. 사람에 대한 공격은 하나님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되어 형벌을 받았다. 만약 우리가 외모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한다면 창조질서를 거스르는 것이며,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그분의 뜻과 성품대로 다스리게 하신 책임을 외면하는 태도가 된다.
* 인간, 하나님의 형상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합하여 존재하시는 방식대로 남녀가 조화와 연합을 통해 온전한 존재다움을 누리도록 의도하셨다. 또한 복을 주셔서 번성의 축복과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릴 책임을 주신다. 자애로운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자연과 다른 생명들을 동반자로 여기며 관리하고 보살필 때 자신도 온전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제사장처럼 이웃과 생명을 품고, 왕처럼 다스리고 보살피는 것, 그것이 왕 같은 제사장(벧후2:9)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잘 구현하는 모습이다.
* 안식, 창조의 절정
창조가 마칠 때에 혼돈 세상(1:2)은 군대처럼 질서정연 해지고(2:1), 일곱째 날 '쉼'을 통해 전(全) 창조가 완성된다. 이날은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날이며, 하나님의 백성들과 피조물에게 창조의 본래 의도와 목적을 누릴 수 있도록 '복' 주시는 날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막 2:27)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 안식을 누릴 때 창조의 온전한 목적이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이 안식의 나라로의 초대이며, 안식의 존재로의 새창조다. 오늘날 교회는 바로 이 안식(쉼)의 공동 체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성경적 고찰
1. 복수형으로 존재하며, 관계 안에 존재 (우리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의논)
2. 이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증거하고, 동시에 그 통치의 대행자로서 이 땅에 존재
3.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 스스로 책임있는 선택을 하는 존재
*다스림의 구현: '경작하고 지키게' 노동을 통해서 다스림이 구현된다. 노동을 통해 현실이 되고 , 일상이 되고, 구체화된다.
*이웃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 홀로 실아간다면 아무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창세기 2:4~25)
<묵상 Point>
* 인간의 존엄과 한계
인간은 흙으로 지음 받았다. 인간은 흙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흙이다. 동시에 인간만이 하나님의 숨을 받은 '생명체'로 창조되었다.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고 그분의 역할을 위임 받았다. 인간 창조는 인간의 존귀함과 한계를 동시에 잘 보여준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흙에 불과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숨을 받은 인간은 다른 어떤 물질적인 것으로도 채워지거나 온전해질 수 없는 고귀한 존재다.
* 인간의 책임과 한계
하나님은 인간에게 기쁨의 동산 에덴을 다스리고 경작하게 하셨다. 처음부터 인간에게 노동은 공동 운명체인 자연을 가꾸고 관리하기 위해 주신 신성한 책임이 었다. 죄로 인해 그 노동 본연의 가치와 노동에서 오는 기쁨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땀 흘리는 노동은 인간의 본질이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과정이다. 그리스도인은 성실하게 일하고 정직한 땀의 대가를 양식으로 취하며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가는 존재다.
* 인간의 자유와 한계
인간은 영생하는 생명나무를 비롯한 '모든' 열매를 먹을 수 있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을 수 없게 하셨다. 생명을 생명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나님과 견줄 수 없는 존재지만 자유를 갖고 책임 있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인격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다. 사람에게 이 금지명령은 '올무'나 '함정'이 아니라, 자유의 한계를 정하여 참 생명을 누리도록 돕는 이정표다.
* 인간의 가치와 한계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나뉘면서 그들은 혼자서는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남녀는 동등한 가치를 갖지만 동시에 상호보완적이고 의존적인 관계로만 존재한다. 결혼이든 무엇이든 타인을 인정할 때 온전한 '사람'으 로 존재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 매일설교 가이드>
창세기 1:26-2:3
제목 : 인간 창조와 안식의 의미
주제 : 하나님이 인간 창조의 뜻과 역사의 목표를 분명히 보이셨으니 그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자.
핵심 질문 :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안식하신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아웃라인
1. 도입
하나님은 땅 위의 생물과 더불어 인간을 지으시므로 창조사역을 완결하신다. 특히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사명과 더불어 생육을 명하시며, 풍성한 먹을거리를 주신다. 그 후 안식하시고 그 날을 복되게 하신다. 하나님의 인간 창조와 안식에는 어떤 뜻과 목표가 있는가?
2. 본문
신의 뜻을 수행하는 대리자_ 근동에서는 왕에게만 '신의 형상'이라는 칭호를 주었는데, 왕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분의 형상이며 대리자로서 뜻을 수행하는 거룩한 존재다. 예수님은 하나님 형상으로서 완전한 본을 보여주셨다. 아들 안에서 새롭게 지어진 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자로 살아가자.
순종으로 사명을 이룰 책임_ 인간은 왕적 권한을 이행하는 존재다. 권한을 선히 사용하여 지혜와 성실함으로 다스리면 기뻐하실 것이나, 남용하여 함부로 짓밟고 탈취한다면 탄식을 낳게 될 것이다. 지나친 착취와 전횡으로 인간과 자연을 위험에 빠트리지는 않는가? 대리통치자로서 겸손과자애를 갖자.
주신 복을 누리고 기뻐할 특권_ 하나님은 사람과 동물에 게 먹을거리를 주신다. 원초적인 즐거움이자 충만한 생을 위한 축복이다. 탐욕으로 취한다면, 복은 저주로 바뀌고, 질서는 깨지고, 생태계의 균형은 무너지게 된 다. 하나님의 공급을 믿고 서로 나누며 평화롭게 살아가는가? 욕심을 버리고 제 몫에 감사하자
3. 결론
안식은 창조의 목적이자 향유의 축제다. 하나님을 기뻐하며 평온과 휴식을 경험하는 영광스럽고 축복된 시간이다. 사람이 안식을 회복할 때, 생존을 위한 싸움을 그치고 평화를 이룰 수 있다. 창조의 주기를 따라 살 때 진창 같은 삶에서 해방되어 영원을 맛볼 수 있다.
창세기 2:4-25
제목 | 인간의 존재와 사명
주제 | 인간은 특권과 한계 속에서 사명을 다하는 존재 로 부름을 받았으니 순종으로 동행하자.
핵심 질문 | 인간의 존재와 사명은 무엇인가?
아웃라인
1. 도입
사람을 중심으로 족보 형식을 빌려 첫 창조를 정리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특권과 흙으로 지어진 존재라는 한계를 동시에 갖는다. 창조질서를 유지할 책임과 더불어 다스릴 권한도 부여받는다. 특권과 한계, 권한과 책임 사이에 선 인간은 무엇인가?
2. 본문
인간의 존재_ 흙으로 지어진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고 그분을 통해서만 존귀케 될 수 있다. 떠나면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가 된다. 하나님 형상이라는 특권과 흙이라는 한계 사이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을 때 존엄을 유지할 수 있다. 주님의 숨결따라 살 때, 영원의 땅에 이르게 된다.
인간의 사명_ 에덴은 경작하고 가꾸어야 할 세계다. 인간의 노동은 잠재된 가능성과 감춰진 영광을 개발하여 드러내도록 의도되었다. 범죄로 인해 가혹한 것이 되 었으나 노동자체는 신성한 것이다. 노동이 세상을 충만케 하는 축복이 되기 위해 변화시켜야 할 사회적 과제는 무엇인가?
인간의 책임 금령은 경계를 설정하는 것이자 말씀을 들어야 할 존재임을 가르친다. 아담은 악을 알기 전에 순종을 배우며 성숙해가야 한다. 경계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며, 금령은 자유와 안정을 주시려는 사랑이다. 허락하지 않으신 것을 취하려는 욕심을 버리고 이미 주신 것에 감사하자.
3. 결론
여자를 만들어 상호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과업을 수행하도록 하신다. 남녀는 존중과 이해, 대화와 타협으로 서로 돕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상대를 통해 사랑을 배우며 폭넓은 인간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 남녀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보여야 할 모범은 무엇인가?
(인용) 묵상과 설교 (2020년 1,2월) 창세기 1-36장 중에서 발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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