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좋은책

성령을 믿습니다

강가딘777 2023. 10. 26. 22:11

<<성령을 믿습니다>> -일신은혜교회 주일청년부예배 2023.7.25 김근주

<사도신경>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1-4)

성령은 어떤 분이신지, 성령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의 의미가 무엇인지, 성령충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오늘 생각해볼려고 한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사도신경에 성령과 교회에 대한 언급이 나란히 배열된 이유는 오늘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이 배경에 있겠다싶다.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성령이 첫 믿음의 사람들에게 강림하셨고, 처음으로 믿는 자들이 함께 모여서 교회가 탄생하고 이루어져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이 성령을 믿사오며 다음에 곧바로 교회공동체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이어지는 이유였을 것이다. 그래서 성령과 교회는 떼어서 생각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사도행전 2장의 배경은 오순절 날이었다. 오순절은 구약성경에서는 맥추절, 칠칠(7×7)절, 초실절이라고도 불리운다. 유월절을 지키고 다음 안식일부터 50일째 되는 날이 맥추절이다. 그러다보니 맥추절은 유월절하고도 단단히 묶여있는 절기이다.

공교롭게도 예수님은 유월절에 제자들과 같이 모여 식사, 최후의 만찬을 하셨다. 이는 성찬식의 유례가 되었다. 다음날 새벽 로마군병에 잡혀 그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 다음날이 안식일이고, 그 안식일 다음날에 부활하셨다. 그리고 오순절에 성령강림이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유월절과 맥추절,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감림이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신약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사건들은 구약이 배경이 되어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사도행전 2장 1~4절의 성령강림사건에 일어났던 현상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일어났던 사건과 겹친다. 이를 우리네 교회 신앙의 선배들이 많이 발견하였다.

출애굽기 19장에 하나님이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바람이 불고 폭풍속에서 우뢰와 번개가 치고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불 가운데 등장하셨다는 내용이 있다. 사도행전 2장에도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고 바람이 있었고 불과 같은 현상이 보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16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
17 모세가 하나님을 맞으려고 백성을 거느리고 진에서 나오매 그들이 산 기슭에 서 있는데
18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19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출19:16-19)

출아굽기 19:8에 시내산에 이스라엘 온 백성이 모였더라. 행 2:1에도 오순절 날에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첫 그리스도인들이 다함께 이 자리에 모였다.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을 여호와께 전하매 (출19:8)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2:1)

사도행전 2:5부터 보면 유대인들의 아주 중요한 절기인 오순절에 당시 지중해 세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순례차 많이 찾아왔다. 출애굽기 19장 시내산에 하나님이 강림하실 때도 온 이스라엘이 한데 모였고, 사도행전 2장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에도 첫 그리스도인들이 전부 다 모였고 심지어는 흩어져 살아가던 유대인들도 모였다.

분명히 사도행전의 저자는 오순절 사건을 시내산 사건에 견주어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 사도행전의 저자는 오순절 사건을 시내산 사건과 비슷하게 표현할려고 하는걸까?

오늘 우리가 급하고 강한 바람과 불,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구약성경이 친숙하지 않다보니 시내산이 떠올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후 1세기 유대인들이었다면 이런 식의 표현들을 보면 바로 딱 하나님이 임하셨던 시내산을 떠올렸을 것이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명확이 이런식으로 글을 표현하면서 독자와 청중으로 하여금 이 사건을 시내산에 하나님이 강림하셨던 사건하고 연결시키게끔 말씀을 구성하고 있다.

그럼 왜 그렇게 하는 걸까? 시내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나님이 강림하셔서 모세에게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율법을 수여하셨다. 오순절 성령강림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그때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것처럼, 이제 하나님께서 그의 기뻐하시는 뜻을 부여하시고, 그의 말씀을 알리시는 것이다. 이것을 사도행전의 저자는 의도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을 율법을 부여하신 사건,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허락하신 사건이다. 그 옛날 시내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제 다시금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수여하시는 사건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다.

성령과 율법 말씀

성경에 하나님의 영,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율법 말씀이 부각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에스겔서이다. 에스겔은 남왕국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부터 멸망하고 이후까지 활동했던 선지자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온 이스라엘이 열방땅에 흩어지게 될텐데, 하나님이 장차 흩어졌던 백성들을 다시 모으셔서 돌아오게 하실거고 돌아온 이스라엘에게 새 영을 그들의 속에 부어주시고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지키게 하시겠다는 말씀이 에스겔서 11장과 36장에 있다.

(겔 11:19~20)
1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20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겔36:26~27)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사도행전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다함께 오순절을 지킬려고 예루살렘에 온 것은 에스겔서 말씀과 연결되는 것이 있다. 하나님의 영, 성령이 역사하실 때, 동시에 따라오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에스겔이 말하고 있다.

보통 성령충만을 영적인 현상들, 심리적인 특별한 상태가 되기도 하고 정신적으로 굉장히 충만한 상태가 되기도 하다고 연결된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니 성령강림 사건을 시내산 사건에 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내산에서 우뢰와 바람, 불같은 현상이 있었지만 결국 시내산 사건은 율법을 주신 사건이었다. 에스겔서에도 하나님의 새 영을 주실때 충만할 것과 더불어 율법과 규례를 지키게 된다는 말씀이 있다. 이는 성령에 대해서 우리가 통상 가지고 있는 생각하고는 다른 점이 있다.

성령과 말씀, 율법이 연관된 또 다른 예를 요한복음에서 볼 수가 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행전을 빼고 가장 강렬하고 뚜렷하게 언급하는 책이 요한복음이다. 요한복음 14, 15, 16장에 성령에 대한 언급이 집중적으로 나온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3년차 유월절에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나누고 그 다음날 새벽에 잡혀가시고 죽으심을 당하셨다. 그 유월절 저녁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일러주신 말씀이다. 예수님의 고별설교로 14장, 15장, 16장이 있고, 17장은 중보기도,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온 맘 다한 기도가 나오고, 18장에 잡혀가심이 나온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설교인 14장, 15장, 16장에 성령에 대한 말씀이 집중되어 있다. 결국 예수님의 고별설교의 주제는 '성령'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요14:16~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건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16: 7~15)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 의,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키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다. (그는 나를 영광되게 하실것이다/새번역)
무릇 아버지께 있는 것이 다 내것이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그가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하였노라.

보혜사 성령은 중재자, 도와주시는 이, 옹호하시는 이

이 본문들에서 성령을 보혜사로 부른다. 보혜사는 중재자를 말한다. 하나님과 사람사이에서 우리를 중재하시는 분이다. 보혜사의 다른 의미는 도와주시는 이다. 또 다른 의미로는 옹호하시는 이를 말한다. 쉽게 표현하면 변호사로 볼 수 있다.

성령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중재하시고 도와주시되, 우리 편에 서서 우리를 옹호하시면서 하나님과의 사이를 중재하시는 분이다. 이것이 성령을 보혜사라고 예수께서 알려주신 말씀의 의미다.

성령이 우리 곁에 서서 우리를 옹호하시고 중재하고 도와주시는 분이라는 의미는 우리가 얼마나 약하고 부족하고 헷갈리는 존재인지를 성령께서 아신다는 것이 전제가 된다. 어디가서든 내 말이 옳다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는 사람들에게 옹호해주는 이가 필요하다.

바울은 성령울 이렇게 표현한다. '이와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롬8:26-27)

이것이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소개하는 가장 좋은 표현이다. 우리 연약함을 아시며 무슨 말로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위해 대신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분이 보혜사 성령이시다.

성령은 진리의 영

위의 요한복음 본문에 성령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것은 진리의 영이라는 표현이다.

성령은 우리를 옹호하시고 도와주실 때 그저 제 식구 감싸기가 아닌, 우리를 감싸시고 옹호하시되 우리를 진리로 이끌어가시는 진리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일러주신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큰 도움은 '너 괜찮아'라고 말씀하시는데 그치지 않고, 무엇이 진리인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삶인건지를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모습인체로 내내 살아가게 하는 것이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진리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신다.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신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점점 진리를 따라 살아가도록 이끄신다. 진리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갈 때가 많고, 뭘 어떻게 해야할지 방황할 때가 많은 우리를 성령께서는 아시고, 도우시며 진리를 알리시고 가르치신다. 그래서 성령은 진리와 연결된다.

에스겔서에서 하나님이 새 영을 주셨더니 율법을 행하게 되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시내산 율법수여 사건과 결부시킨다.

사도행전 2:5부터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모여 왔다. 첫교회 사람들이 성령이 강림하자, 여러나라 언어로 이야기를 한다. 몰려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말한다.

행2:11에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성령충만한 첫 그리스도인들이 각 나라말로 하나님의 큰 일, 하나님이 이 땅에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 하나님의 행하심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야기했다.

보통 오순절 성령강림하면 하면 방언을 따올린다. 여러나라 말, 그 방언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나니님의 큰 일이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무얼 행하셨는지를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의 핵심은 방언을 말했다는 기적이 관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행하였는지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성령은 율법말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는 영이시다. 진리의 영이시기에 성령충만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일을 행하셨는지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을 받는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하고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부모님 세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교회나 기도원에서 기도하다가 성령충만이라는 영적체험을 경험하신 분이 적지 않다. 방언을 하게 되기도 하고 병이 낫게 되기도 하고 다가오는 앞일을 미리 말하기도 하고 특이하게 찬송을 부르기도 한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심리적, 정신적 상태에 들어가는 것, 고양된 영적 상태에 사로잡히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주의하고 살피고 분별하게 된다. 그것이 성령충만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도 사도행전의 저자는 성령충만을 어떤 심리적인 고양상태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저자는 시내산 사건에 견주어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나게 되는 것, 하나님의 큰 일이 드러나게 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에 보니 진리의 영으로서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밝히시고 알리시는 분이시더라는 것이다.

영적충만의 본질은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가 되었다가 아니라, 사람이 삶의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주의하게 되고, 조심하게 되고, 자세히 분별하고자 하며 그 뜻을 알고자 추구하게 되었다, 이런 상태가 되었을 때 성령충만하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대부분은 결정할 때 욕심때문에 할 때가 많다. 사람의 외모와 실력, 어떤 조건에 있는지에 좌우되기도하고 때로는 위협과 압력 때문에 결정할 때도 있다. 그렇지 않고 차분하고 잠잠하게 진리를 찾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고자 할 때, 성령충만하다 할 수 있다. 그때 심리적인 상태가 뭔가가 넘쳐날 것 같은 충만한 상태일 수도 있겠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성령충만하면 늘 기쁘고 감사한가? 그렇지 않다. 성령충만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살피며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결정했을 때 내 욕심하고 안맞고, 내 상태하고는 안맞다싶기 때문에 도리어 억울할 수도 있고 괴로울 수도 있고, 슬플 수도 있고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오히려 우리가 기쁨과 감사가 너무 가득할 때 문제가 될 수 있다. 기도했다가 기쁨과 감사를 잡고있다 보면 자기 신앙의 경험이 너무 또렷하다보니 다른 이야기들은 하나도 못듣게 되는 경우가 있다. 때로 어떤 종교적인 경험들은 우리의 자아를 강화시켜버린다. 우리를 정말 고집스럽게 만들어 버려서, 기도 많이 하는 형제 자매들은 이제는 대화가 잘 안통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자기 경험이 원체 또렷하다보니 다른 사람의 말이 잘 들리지 않게 되는 일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을 함부로 평가하거나 가벼이 여기거나 하지는 않는다.

성령 충만의 본질은, 심리적 상태이거나 정신적, 감정적 상태가 분질이지 않다. 본질은 차분하고 잠잠하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고 찾고 분별하며 결정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우리의 모든 분주함, 요란함,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성령을 구한다.

성령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기를, 우리를 하나님의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 줄이기를, 위태롭고 흔들거리는 우리를 도우시고 옹호하시되 마침내 우리를 진리로 이끄시기를, 오늘도 우리가 기도하게 된다. 이런 약한 우리를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큰 일,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증언하는 사람으로 이끄시기를 오늘도 우리가 기도한다.

본문은 질서의 영이신 성령의 또 다른 행하심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첫 번째가 성령은 진리의 영이었다면, 두 번째로 볼 수 있는 것이 4절에 성령께서 임하자 이 사람들이 다른 언어로 말하는데 그 다른 언어의 내용은 하나님의 큰일,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사람으로 이들이 세워졌다.

성령은 사람을 세우신다

두 번째, 성령은 사람을 세우신다. 사람을 세우시는 성령, 이것이 성령의 또 다른 행하심이다. 이렇게 성령이 임하면 사람이 세워지게 되는 것은 구약성경에서도 아주 빈번하게 볼 수 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인격적이지 않다. 인격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마치 사람처럼 판단하고 느끼고 행동하고 결정한다는 뜻이다. 가령 로마서 8장에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나니 우리를 위해 대신 기도하신다, 이런 표현들은 성령이 인격이시구나, 성령 스스로 판단하고 느끼고 행하신다고 바울은 성령을 인격적으로 표현한다.

구약성경의 하나님의 영이라는 표현이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거의 모든 곳에서 성령은 인격적이지 않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이 가지신 능력, 하나님이 사용하는 능력을 가리키는 말로, 비인격적이다는 느낌이 든다. 사실 사도행전 2장도 그 점에서는 구약과 비슷하다. 성령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어떤 능력이라는 인상을 준다.

구약과 신약성경은 성령의 인격적 특징이라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구약과 신약의 공통되는 것은 성령이 임하시면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는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구악성경에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세워진 사람들로, 모세를 돕던 70명의 장로들이 있다. 기드온, 삼손같은 사사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해 사사로 사역하게 되고, 사울이나 다윗 같은 임금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미가, 에스겔, 이사야 같은 예언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 되었다.

사도행전 2장에 첫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더니, 그들이 그 있는 곳에서 하나님의 큰 일을 증언하는 사람으로 세워졌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성령은 사람을 세우시는 영이시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시내산 사건과 오순절 성령 강림을 연결시킨다 했는데, 그 두 사건의 차이는 무엇일까?

모세와 같은 이의 존재 여부이다. 출19, 20, 21장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강림하시고, 모세에게 율법을 말씀하시고, 그 모세가 백성들에게 자기가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전하고,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백성사이의 모세에게 하나님이 강림하셔서 율법을 가르치시는 내용이 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하나님이 강림하시고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게 되는 것은 같은데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 특별한 존재가 없다.

사도행전 2:3을 보면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그러자 그들이 다 성도의 충만을 받고, 이 당시에 모였던 첫 그리스도인들 120명 가운데 사도 12명에게 성령이 임하자 그들이 말씀을 선포했다가 아니라, 어떤 리더들에게 성령이 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다 각 사람에 하나씩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그들 모두가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였다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모세로 대표되는 특별한 소수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그를 세운다면, 사도행전 2장에서는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더라, 그것이 시내산과 시도행전 2장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이 사건 다음에 베드로가 설교하는 내용이 사도행전 2:14 이후에 나온다. 그 설교 중에 구약의 요엘의 한 본문을 인용한다.

(행2: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너희의 젊은이들은 너희의 늙은이들은 그때에 18절..그때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21절..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성령은 모두에게 임하신다

요엘서가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 모든 육체, 너희의 자녀들은 젊은이들은 늙은이들은, 남종과 여종, 마침내는 누구든지 까지 간다.

요엘서 말씀이 오순절에서 성취되는 핵심은, 특정한 사람들이 아니라, 소수의 사람이 아니라, 모두에게 임하는 성령이다.

그렇다면 시내산, 구약성경에는 모세 같은 사람이 있는데, 신약에는 모든 그리스도인, 거꾸로 신약의 사건을 볼 때, 결국 모세가 의미하는 것은 특별한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사람을 상징하고 대표하는 것이 모세인 것이다.

옛날에 교회다닐때 이런 말들을 많이 들었다. 모세가 이집트 공주의 아들로 입양되어서 이집트 왕궁에서 자랐다. 당시 세계의 제일 잘나가던 나라인 이집트 왕실의 왕자로 자라면서 애굽의 모든 고차원적인 문물을 다 배워서 모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었다, 쓰임받는다는 말을 종종 들었다. 바울같은 경우도 정통 바리새인으로 자라나면서 가말리엘이이라는 당대 최고의 랍비에게서 교육을 받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이런 바울을 들어서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하셨다는 이야기도 비슷한 맥락이다.

이것은 틀린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굉장한 훈련을 받은 모세를 사용해서, 그런 바울을 사용해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시도행전을 보면, 굉장한 사람에게, 특별한 리더들에게 성령이 임하는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였다.

모세나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잘 훈련된 사람, 잘 예비된 사람을 쓰시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은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쓰시는구나, 그가 이제껏 어떤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지금 그가 어떤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도 상관없이 성령께서 임하시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되고, 하나님의 큰 일을 행하는 사람이 된다.

언제나 우리 교회의 자랑, 우리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자랑은 능력있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게 아니라, 재능과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다가 아니라, 쓸모없어 보였는데, 별것 아닌 것처럼 보였는데 지지리 궁상처럼 보였는데, 성령께서 임하시더니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증언하더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에 드러내더라, 이것이 언제나 교회의 자랑이고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다.

교회의 지랑은 그 누구라도,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령과 함께 하는 자는 하나님께 쓰임받는다, 이것이 핵심이다.

자신의 능력에 좌우되지 않는다. 내가 실력이 있든 없든 거기에 좌우되지 않는 것, 다른 사람의 능력에 좌우되지 않는 것,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않는 것, '나같은 사람은 쓸모없어'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과대평가하지 않는 것, 내가 마치 뭐라 되는 것처럼.

다만 언제나 성령을 구하고 성령께 순종하고 열려있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아주 대단한 다른 사람들을 보고 쉽게 마음 빼앗기지 말자, 다른 사람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보고 쉽게 평가하거나 가벼이 여기지 말자는 것, 이것이 성령의 이끄심을 따라 살아가는 삶이겠다 싶다.

성령은 세상에 만연한 능력주의를 넘어서게 한다

사도신경 말씀을 나누면서 제가 계속 발견하는 것이 능력주의를 넘어서는 길이 성령이라는 것이다. 능력이 모든 것을 결정하려는 세상 속에서 교회가 말하는 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까닭은 능력 때문이지 않다, 당신의 실력과 준비 여부 때문이 아니다.

누가 그러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가? 당신의 실력때문에, 당신 안에 있는 어떤 괜찮은 점 때문에 하나님이 쓰시는 게 아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자로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다. 하나님의 큰 일을 증언하는 사람이 된다.

성령이 임하면 누구라도 젊은이든 늙은이든 누구라도 하나님을 증언한다. 우리의 성공담이 아니라, 우리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사랑하시는지 어떻게 우리는 영원한 생명길로 초대하시는지를 증언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다 약하다. 다 부족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름에 적합하다. 우리가 너무 약하고 부족한 존재이다 보니 성령께서 임하실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약하고 부족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때려치우치 않고, 포기하지 않고 성령을 의지하며 또 한걸음 걸어갈 일이지 싶다

보통 방언이라고 하면, 교회에서 기도하다가 받는 은사 가운데 하나고,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했다. 그런 방언의 은사가 존재하지만, 사도행전 2장은 근본적으로는 그와는 다르다. 여기서의 방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이 아니라 외국어이다. 그때 함께 모였던 첫 그리스도인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자 그전에는 외국어를 전혀 못하던 사람들이 외국말로 당시 지중해 세계 곳곳 지역말들로 뭐라뭐라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다.

여러 외국어로 말한 내용이 뭐냐? 하나님의 큰 일이다.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방언의 핵심은 모든 나라말로 선포되는 하나님의 큰 일이다. 그래서 기적이 관건이지 않다.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더니 갑자기 영어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으나,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난다가 사도행전 2장의 핵심이 아니다. 이때 이 사람들이 성령충만해서 다른 나라 말을 공부하거나 훈련해서 하게 된 것이 아니라, 갑자기 외국어들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하게 되었고, 오순절이라서 지중해 세계 전역에서 모였던 사람들이 자기나라 말로 복음이 선포되니 누구나 듣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본문의 촛점은 기록이 아니다. 오늘 그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기도를 세게하고 성령의 역사가 있어도 갑자기 영어나 불어를 하게 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핵심은 모여왔던 사람들이 누구라도 하나님의 큰 일을 듣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인 사람들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사도행전 2:9~11에 길게 소개한다. 어떤 다양한 배경에 있던 사람들이라도 성령이 역사하실 때 하나님의 복음을 들을 수 있게 되더라는 것이다.

성령은 소통을 가져온다

사도행전 성령강림과 더불어 일어난 사건의 또 하나의 핵심은 소통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누구라도 듣고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가 정말 기도하고 애쓸 것은 '외국어를 유창하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성령이 강림하면 소통이 되는 것, 모여왔던 사람들을 향해 그들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말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가 선포하고 증거되고 드러나게 되더라는 것이다.

성령이 강림하면 나타나는 일은 소통이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 모든 처지, 모든 형편에 있는 사람의 말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언하게 되더라! 그것이 오순절에 있었던 방언사건의 핵심이다.

5절 이하에 모였던 사람들은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을 못보았다.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경험했지,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하늘로부터 오는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큰 소리도 5절 이하에 나온 사람은 못 보았다. 그들이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각 나라 말로 전해지는 하나님의 큰 일이었다.

그렇다면 성령과 함께 하기를, 성령의 충만을 구하는 교회는 어떤 곳인가?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증거하는 곳이 아니라, 그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세상과 소통하는 곳,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곳이 교회이다.

가끔 막막한 것이 우리는 너무 우리끼리 통하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끼리는 이해하고 납득이 되는데, 세상에 나가서는 아무 할 말도 없고 교회에서 하던 말을 세상에서 말하면 세상의 사람들은 이해하지도 납득할 수 없는, 교회를 오래 다니게 되면 세상 사람들하고는 잘 소통되지 않는채, 성경이 이렇게 말해요, 저렇게 말해요, 일방적으로 외마디로 부르짖기 말고는 소통되지 않는 말들이 통하고 있는 곳이 교회이겠구나 싶다.

지중해 세계 전역에서 모여왔던 사람들이 자기네 말로,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 행하심을 듣게 되는 것, 그것이 성령의 역사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교회는 세상과 이 시대와 소통이 되겠구나, 세상과 소통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세상이 납득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것, 이것이 성령을 구하는 우리의 기도의 또 다른 의미가 되겠다 싶다.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사도신경과 이천년 교회는 함께 고백해 왔다. ‘성령을 믿는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행하고 증언함께 있어서 우리의 능력과 실력이 관건이 아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성령을 믿는다는 것은 성령이 진리의 영임을 기억하고 고백하며 성령의 인도를 구하고 성령의 깨우쳐주심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 가진 것과는 무관하게 성령께서 우리를 세우시고 다른 사람들을 세우실 것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성령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의 의미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우리는 세상을 향해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끼리 통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말로 들리게 하나님의 행하심를 증언하고 나눌 수 있다. 그래서 성령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약하지만 성령께서 우리를 세우시고 능력을 주실 것을 믿는다. 성령의 행하심을 누구도 볼 수 없지만, 그렇게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우리 자신에게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우리 공동체에 성령께서 임하시기를.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신중히 모색하고 찾고 분간하게 해주시기를,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 하나님의 큰 일을 세상 사람들이 듣도록 선포하고 증언하는 사람으로 우리를 세워주시기를 기도하게 된다. 성령을 구하는 한 주간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