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익한 설교>
”인생의 중심은 예수님이다”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 (막12.1~12)
~ 마가복음 11장 후반부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거닐고 계실 때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이 와서 물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가?' 그들이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요? 거기에는 함정을 팔려고, 공격하기 위한 의도가 숨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도 하나 물어보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거냐? 사람으로부터 온거냐?' 라는 그들이 딜레마에 빠질 만한 질문을 역으로 던지셨습니다. 하늘로부터 왔다면 '왜 안 믿느냐'면 할말이 없습니다. 반면에 사람으로부터 왔다면 백성들이 세례요한을 참 선지자로 여기기에 백성들이 두려워서 대답을 못합니다. 그래서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도 말하지 않겠다' 하시며 넘어가십니다. 그러면서 12장에 넘어와서 보여주신 비유가 예수님의 악한 포도원 농부 비유입니다.
주인이 세주고 타국에 갔는데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종을 때려서 보내고 더러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마지막에 보낸 상속자인 아들도 죽이고 그 유산을 자기들의 소유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심판이야기입니다. 이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지칭합니다.(이사야 5장의 포도원의 노래) 주인은 하나님이고, 악한 농부는 종교지도자들(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입니다. 상속자 아들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 죽인 자들은 심판으로 끝난다, 여기서 끝나는 것입니까?
'말 안 들으면 죽는다', 이것이 메시지가 될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의 본질, 예수님 말씀의 본질은 복음입니다. Good News, 그 안에 소망이 있어야 하고 살 길을 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율법주의적 설교는 '죄 지으면 죽는다'는 메시지로 끝입니다. '너희들 그러면 망한다. 심판이 임할 것이다. 끝났다' 그리고 마지막에 갖다 붙이는 것이 '회개하라' 이것이 메시지입니까?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 죄인이고 끝이 사망이고 소망이 하나도 없는 자들인데,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에게 살길을 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너무 늦은 건가요?' - '늦긴 뭘 늦어' 이것이 복음입니다. '너무 멀리 왔나요?' -'뭘 멀리 와. 아직 멀지 않았어.' 그게 복음입니다. '저는 끝장났나요?' - '아니에요. 끝장나지 않았어요.' 이렇듯 언제나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 달리셨을 때 옆에 있는 강도조차도 소망이 있었습니다. 언제나 기독교의 메시지는 소망으로 끝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순종 했더니 다 진멸하고 죽었다, 여기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동문서답 같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막12:10~11)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시118:22~23)
이것은 엉뚱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악한 농부 이야기를 하면서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악한 농부가 아들을 왜 죽였습니까? '이 아들을 죽이면 그 모든 재산이 우리것이 된다' 이것이 악한 농부들이 아들을 죽인 이유입니다. '포도원을 차지하고 싶어서', 이 말의 의미는 나는 더 이상 종으로 청지기로 살지 아니하고 주인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죄에 대한 정의가 나옵니다. 죄는 윤리적으로 잘못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죄라는 것은 ‘내가 주인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마음’이 죄입니다. ‘내 자아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겠다’ 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죄의 회개라는 것은 자아가 깨지는 것입니다. 죄의 회개라는 것은 내가 주인의 자리에서 섬기는 하나님의 종의 자리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주인의식 가지고 뛰는 것을 개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죄입니다. 자기 멋대로 '저는 고집이 조금 있는데요, 의지가 강합니다'하는데 다 죄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하는 것, 그 자체가 죄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최초의 죄가 무엇입니까? 선악과를 왜 먹었습니까? 보암직도하고 먹음직도하고 배고파서 먹었습니까? 맛있게 보여서 먹었나요? 핵심적인 이야기는, 마귀가 이렇게 속였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3:5) 그래서 먹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은, 내가 내 삶의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것,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라.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의 핵심을 알아야 합니다. '말 안들었더니 심판을 당했다'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이 지은 죄의 본질은 종으로써 사는 것을 포기해 버리고 내가 주인이 되겠다는 그 발버둥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것은 하나님이 계시는가 안계시는가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약2:19) 진정한 믿음이란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구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내 인생의 주인은 예수님입니다'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신앙생활 하면서 교회 다니면서도 이 믿음 없는 사람이 되게 많습니다. 심지어 목회를 하면서도 찬양인도를 하면서도 심지어 교회에서 중요한 봉사를 하면서도 그 사람이 믿음 없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여전히 내 인생의 주인이 나인 사람입니다. 자기가 모든 것을 다 결정합니다. 기도도 없이 결정하고 자기 고집대로 자기 멋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 말씀과 자기 자신의 의지가 있을 때 언제나 말씀이 집니다. 자기의 의지가 승리합니다. 고민을 하는체하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하나님의 뜻을 다 밟아 뭉개버리고 자기 뜻이 꼿꼿하게 섭니다. 그게 바로 죄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마지막에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 오셔도 때려 죽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오더라도 밟아 뭉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죄고 악한 농부라는 것입니다.
여기 있는 제사장과 장로와 서기관들에게만 주시는 말씀이라면 성경이 뭐하러 기록되어 있습니까? 모든 성경 말씀은 나를 위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악한 농부의 이야기가 일차적으로는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악한 농부가 나 일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살펴볼 때, 내가 인생의 주인이 되려고 하는 의도나 내 고집대로 내 뜻을 세우려는 의도가 있다면, 그러면 그 사람이 악한 농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예수님을 버린 돌이 아니라 모통이의 머릿돌로 삼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머릿돌부터 시작하여 기둥을 세워 나가고 머릿돌로부터 출발하여 건물을 세워나갑니다.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기초가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는 인생, 그게 악한 농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받는 출발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교회 다니고 괜히 성경책 끼고 다니면서 신앙인인척 하고 교양기르고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내 삶의 주인이 내 자신에서 예수님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죽여야 합니다. 죽는 것입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엡2:20~21)
우리의 모든 교회의 기초가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통잇돌 머릿돌이 되시고 그것을 기초로 옆으로 건물이 지어져갑니다. 교회의 중심이 예수님이 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신앙인의 중심이 예수님이 아니면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벧전2:6~7)
모통잇돌인 예수님을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거듭남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개선이 아니라 거듭남입니다. 내 옛 자아가 다 죽어야 됩니다. 내 자아가 ‘개선이 되어 좋아진다’가 아니라 죽는 것입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죽이는 싸움입니다. '뭘 개선해서 뭘 하겠다'가 아닙니다. 다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 하는 얘기를 죽기 이전에 하니까 자꾸만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을 강조하기 이전에 자꾸만 자기 발전이나 자기 계발을 이야기하고, '꿈이 있습니까? 희망이 있습니까? 장점을 개발해야 한다' 이러니까 문제입니다. 그런 얘기의 전제는 죽고 다시 살아난 다음의 이야기입니다. 거듭남이 있기 이전에 자기 계발이나 자기 발전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백날 해보십시오. 마인드 컨트롤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세상의 교양강좌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기독교의 근본의 핵심은 죽는 것입니다. 죽기 이전에는 무슨 메시지든 의미가 없습니다. 죽고 난 다음에 다시 사는 것입니다.
한 주간 동안에 여러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죽는 싸움을 벌여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 바랍니다. 그래서 내가 주인 되었던 부분들, 내가 주인삼은 모든 것들이 다 깨져야 합니다. 다 내려놓고 삶에서 뭔가 예수님이 주인되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그 부분에 예수님을 주인삼는 작업, 그것이 회개고 거듭남입니다. 거기서부터 인생은 출발된다는 것입니다. 건물을 다 짓고 난 다음에 마지막에도 모통잇돌로 끝납니다. 우리 인생의 결론도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모통잇돌은 시작과 끝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나는 처음과 나중이니' 예수님이 모든 것의 시작과 마지막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열심히 살아보십시오. 자기 성취하겠다고 자기 영광위해 살아보겠다고 뛰어보면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허무한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사40:8) 꽃은 저녁만 되도 냄새나고 시듭니다. 영원히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십니다. 말씀은 영원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내 안에는 영광이 없습니다. 인생에는 영광이 없습니다. 요즘 모든 사람들이 열광적으로 자기 몸가꾸기를 합니다. 몸짱이 되기 위해 아무리 가꿔봤자 나이 들면 늙음입니다. 서글픔입니다. 육십대에 아무리 잘 가꾼 사람이나 덜 가꾼 사람이나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에는 영광이 없습니다. 해봐야 아무것도 없습니다. 돈 - 돈 많이 가지면 뭐할 것입니까? 숫자에 불과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명예 - 타이거 우즈를 보십시오. 돈도 많고 명예도 다 있는데도 무너지는데 한 달도 안 걸립니다. 인생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가지고 추구하는 것들은 다 무너지게 되어있습니다. 인생이 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가꾸고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영광가운데 나아가게 하려는 시도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 마지막 숨질 때 가장 영광스러운 인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 위해 살았던 인생입니다. 예수 위해서 헌신했던 것들, 그것만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의원’은 이십 년 넘게 무료진료를 했습니다. 예수님 위해 많은 사람들을 섬기고 도왔던 인생입니다. 진정한 존경은 어디서 옵니까? 진정한 영광은 어디서 나옵니까? 예수님 붙들고 예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인생, 거기에 영광이 있습니다. 죽어서도 말하는 인생, 아직도 여전히 메시지화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이 죽음과 동시에 끝나는 인생이 되려면 자기 영광 추구하면 됩니다. 무덤과 함께 다 끝나버립니다. 영광도 아닙니다. 나중에 침뱉고 가버립니다. 모든 가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삼는 믿음의 신실한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악한 농부의 비유는 사실 쉬운 비유는 아니나 핵심만 붙들면 됩니다. 악한 농부의 죄성의 핵심은 자기가 주인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상속자 되겠다 내가 주인이다' 그게 죄라는 것입니다. 그게 깨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아들이 주인입니다. 상속자가 주인입니다.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버렸다 할지라도 버린 돌이라 할지라도 그 예수님을 나의 인생의 모퉁잇돌로 삼고 살아가는 인생은 영광이 임하게 될 것이고, 멋진 건물이 세워지게 될 것이고, 그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나의 인생의 모퉁잇돌로 삼는 인생이 가장 복된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복을 누리는 믿음의 신실한 종들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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