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종교개혁

두번째종교개혁_ 프롤로그_2.한국교회는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강가딘777 2026. 10. 6. 22:23

[프롤로그]

  <2. 한국교회는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1) 양적 성장의 신화와 텅 빈 예배당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사에 유례없는 한강의 기적을 써 내려갔습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출발했지만, 불과 몇 십 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서울에 들어섰고, 밤하늘을 붉게 수놓은 붉은 십자가는 이 땅의 번영과 영적 부흥을 상징하는 듯했습니다. "모이자, 기도하자, 집짓자"라는 구호 아래 성도들은 밤낮으로 헌신했고, 세계 각지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신앙의 강국으로 도약했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했던 성장의 계절이 지나간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성적표는 지극히 초라합니다. 교회의 규모는 커졌지만, 그 안을 채우던 젊은이들의 발걸음은 뚝 끊겼습니다. 신뢰도는 바닥을 치고 있으며, 사회적 참사와 국가적 위기 앞에서는 공공성과 윤리마저 상실한 채 세상의 걱정거리로 전락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왜 이토록 빠르게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일까요?

 

단순히 인구가 줄어들고 세속화의 물결이 거세졌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동안 우리가 '성공'이라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파먹는 독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양적 성장의 신화에 도취하여 정작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값으로 사신 교회의 가장 소중한 원형들을 하나씩 잃어버렸습니다.

 

시대의 풍랑 속에서 교회가 바닥을 드러내고 민낯을 노출한 까닭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부흥'이라 부르며 지켜온 것들의 정체가, 사실은 껍데기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아무런 대답도 주지 못하는 무기력한 종교 집단이 되어버린 지금, 우리는 비통한 심정으로 물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화려한 성전을 쌓아 올리면서, 정작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2)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2018년 개봉한 미국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라는 영화의 내용 중에 주인공 닉의 어머니인 엘리너가 친구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대하고 화려한 저택의 야외공간에 놓인 커다란 식탁에 앉아 멋지게 차려입은 지인들 앞에서 그녀는 골로새서 3장 2절 말씀을 읽으며 세상의 것들이 아닌 하늘의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대화는 자연스럽게 사소한 가십과 재산, 그 가족의 사회적 지위 등 지극히 세상적인 것들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물론 어떤 교회의 모임이든 여러 주제의 이야기를 나누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이 하고 있는 성경공부에서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현실의 삶과는 괴리된 관념적이고 형식적인 담론에 불과했다는 것이 영화감독이 이 장면을 끼워놓은 이유일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교회 내 소모임 활동을 하면서 사실상 똑같이 느끼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신앙이라는 형식을 갖고 살아간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움켜잡을 수 없는 물처럼 신앙의 본질은 이미 우리의 손바닥 위에서 사라지고 있음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는 것 입니다. 마치 항아리에 들어있는 개구리가 물이 서서히 데워지고 있음을 모르듯 말입니다.

 

한국교회가 이 거대한 파산을 딛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는, 과거의 화려했던 성공의 그늘 아래 우리가 잃어버린 세 가지 핵심적 원형을 냉정하게 직시해야 합니다.

 

① 삶이 사라진 ‘진정성 있는 공동체’

 

과거 초창기 한국교회는 마을의 중심이었고, 슬픔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하지만 대형화와 효율성을 추구하면서 교회는 어느새 '신앙 상품을 소비하는 대형 쇼핑몰'처럼 변해버렸습니다. 성도들은 주일에 매끄럽게 잘 짜여진 1시간짜리 예배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옆자리에 앉은 교인의 이름조차 모른 채 황급히 주차장을 빠져나갑니다. 자신의 아픔과 고통, 죄와 실수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기도를 부탁할 수 있는 '깊은 영적 친밀함의 장(Community)'은 사라졌습니다. 겉으로는 은혜로운 인사를 건네지만, 속으로는 고독과 외로움에 신음하는 현대인들에게 오늘날의 교회는 그저 차가운 정형화된 종교적 공간에 불과합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구역모임과 목장모임 등 소그룹 모임을 활발하게 진행하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 소모임이 우리의 신앙 성숙에 아주 중요한 기회를 부여한다고 이해했기에 여러 해 동안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그 모임 속에서 힘을 얻지 못하고 점점 더 지치게 되고, 습관적이고 기계적으로 치르는 교회 행사의 하나로 여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한 때의 구역모임에서 자정이 지나도 지치지 않고 성경을 펴놓고 서로의 신앙에 대해 대화하고 서로에게 영적 자극을 주었던 시절은 점점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행하신 일에 대해 마음을 하나로 모았던 그 작은 공동체에 분명한 하나님 은혜와 성령의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모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지 못하고 단지 자신의 삶 나누기에 더 열심입니다. 그 선택이 치명적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각자의 모든 삶을 비추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내밀한 삶이 감춰짐으로 진정성이 사라진 허울만 남은 공동체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② 모든 신자의 ‘능동적인 사역’

 

우리가 잃어버린 또 다른 핵심은 '모든 신자의 제사장화'에 담긴 신자들의 신앙의 능동성입니다. 한국교회는 지극히 목회자 중심적이고 담임목사 의존적인 구조로 고착화되었습니다. 목회자는 교회의 모든 사역과 영적 책임을 홀로 짊어지다 지쳐서 번아웃(Burnout)에 빠지고, 성도들은 스스로를 목회자의 사역을 보조하거나 재정으로 후원하는 '수혜자'이자 '관객'으로 규정해 버렸습니다.

 

"사역은 목사님이 하는 것이고, 우리는 은혜만 받으면 된다"는 잘못된 관성이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성도에게 부어주신 고유한 영적 은사와 열정은 건물 안에 갇혀 매장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교회의 가장 강력한 자원이어야 할 성도들의 손발이 묶인 채 교회가 관료화된 것입니다.

 

어떤 이는 교회에서 아무 기능도 하지 못하는 신자들을 향해 ‘평신도는 병신도“라는 독설을 날렸습니다.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구분은 개혁주의 교회에서는 결코 사용해서는 안될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쓸데없는 표면적 구분을 통해 사역의 질적 분리를 만든 장본인들은 바로 교회의 지도자 그룹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표면적인 신자를 만들었고, 그 신자들은 전횡하는 목회자를 만들었습니다. 목사들을 ‘주의 종’으로 신격화하며 무비판적인 일반 성도의 무지성적인 아멘 문화는 교회를 병들게 하였습니다.

 

③ 월요일의 하나님 나라, ‘일터와 삶의 현장’

 

가장 결정적인 손실은 '삶의 현장 속 하나님 나라'를 상실한 것입니다. '일상의 거룩함'을 상실한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주일과 평일, 성전과 세상, 교회의 봉사와 세상의 직업을 단절시키는 영적 이분법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주일날 성전 안에서 드리는 통성기도와 찬양에는 열렬하지만, 월요일 아침 직장과 사업장, 가정으로 돌아가면 세상과 아무런 차이점도 보여주지 못하는 무기력한 신앙인들을 양산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열심"이 곧 "좋은 신앙"으로 동의어처럼 여겨지면서, 정작 예수님이 가라 명령하신 '삶의 현장(일터, 가정, 문화)'이라는 거대한 사역지는 방치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신앙은 삶과 완전히 분리된 '종교적 취미 생활'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사회적 참사나 정치적 혼란, 공공의 위기 앞에서 교회가 보여준 몰상식함은 바로 이 '일상의 신학'이 부재했기 때문입니다. 성전 안에서의 열심이 곧 좋은 신앙이라는 착각 속에서, 정작 예수님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며 가라 명령하셨던 일터와 가정, 문화와 사회라는 거대한 삶의 사역지는 방치되고 말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교회에 이와 정반대의 흐름도 나타났습니다. 이 이분법적인 신앙을 극복하기 위해 삶의 자리에서의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고지론(高地論)"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의 정상에 오르는 것을 신앙의 목표처럼 말하는 흐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정치, 경제, 문화의 고지에 올라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스포츠 경기에서 정상에 오른 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든지, 큰 규모의 기도회에 강사로 초빙된 이들이 모든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렇게 성공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는 동일한 형식으로 말한다는 것이 그 예 중의 하나입니다.

 

고지론이 좋은 신앙의 모델이라고 말하는 것은 세상에서의 성공이 곧 하나님의 복을 얻는 것과 동일하다고 교회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현실에서 얻는 부와 명예와 성취와 형통이 곧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의 표이며 기도의 응답이며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라는 증거라고 자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교회가 이제 영적 구원의 소망은 내세에서,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복은 현세에서 받아야 만족하는 단계에 진입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전에 성령부흥 집회나 기도회에 가보면 자주 통용되던 영권, 물권, 인권 등의 참으로 비성경적인 말이 바로 이제 현실의 욕망이 씨앗이 되어 왜곡된 신앙이라는 이름의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고지론이 보여주는 세상의 성공이 곧 좋은 신앙이라는 원리를 이용하는 교회는, 신자들에게 신앙생활의 목적이 세상에서 힘의 법칙으로 만들어내는 부귀영화, 만사형통, 소원성취, 문제 해결을 당연한 신앙생활의 극복할 과제로 여기게 만듭니다. 어떤 고상한 이유를 말하더라도 이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세상을 따르지 않는 삶이 결코 되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영광을 거부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사단의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님은 고지를 점령하지 않으시고,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감은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힘의 방식이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섬기며 희생하고 피 흘리는 십자가의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3) 본질로의 회귀, 다시 시작하는 첫걸음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단순한 교인 수나 재정의 규모가 아닙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교회의 '생명력'이며, 세상의 아픔을 짊어지고 거룩한 충격을 주었던 예수 제자들의 '영적 능동성'입니다. 건물을 더 크고 화려하게 보수한다고, 예배당의 조명과 음향을 첨단화한다고 해서 잃어버린 생명이 다시 살아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며 눈물짓고 그리워하는 감성적 회개가 아닙니다. 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묻고, 잃어버린 초대교회의 유기체적 공동체성과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역적 권리를 되찾아오는 근본적인 구조 개혁입니다.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선명하게 깨닫는 바로 그 순간이, 위대한 개혁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제 우리는 수동적인 관객의 자리에서 일어나, 잃어버린 삶의 현장과 사역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담대히 발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4) 한국교회는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 3무(三無)의 교회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전 어느 시대보다 규모가 커졌고, 건물은 화려해졌으며, 프로그램은 다양해졌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는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성경을 깊이 읽는 힘,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능력,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입니다. 교회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① 성경 내용에 관심이 없는 교회

 

"성경을 읽지만 성경을 모른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성경을 소유하고 있지만, 성경의 큰 흐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이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하나의 큰 이야기임을 주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는 구속사의 흐름, 하나님 나라라는 성경의 중심 주제,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본질보다, 특정 구절, 축복을 약속하는 말씀, 개인의 문제 해결에 더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설교 역시 성경을 해설하기보다 성공, 행복, 위로, 자기계발의 메시지로 흐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 결과 성도들은 성경을 많이 들어도 성경적 세계관은 형성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성경보다 목사의 해석을 의존하고, 성경보다 유튜브 설교를 더 신뢰하고, 성경보다 교단의 전통을 우선합니다. 지금의 신자들 대부분 성경을 부분적으로만 이해합니다. 성경을 잃으면 교회는 방향을 잃게 됩니다.

 

② 기도의 능력에 관심이 없는 교회

 

"기도를 말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기도의 교회라고 불려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도는 하나님 뜻을 구하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기도의 내용도 건강이나 사업, 시험과 취업, 물질에 집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뜻, 회개, 공동체, 하나님 나라, 정의와 사랑을 위한 기도는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있습니다. 또한 새벽기도와 철야기도의 전통이 약화되고, 교회의 각종 프로그램과 행사에 비해 기도 모임은 점점 축소되는 현실도 나타납니다. 그 결과 사람의 능력을 더 의지하게 되고, 전략과 프로그램은 많지만 영적 능력은 약해집니다. 문제 앞에서 하나님보다 세상의 방법을 먼저 찾습니다. 기도를 잃으면 교회는 능력을 잃습니다.

 

③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없는 교회

 

"교회는 커졌지만 하나님 나라는 작아졌다." 예수께서 공생애 동안 가장 많이 선포하신 주제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죽어서 가는 다른 공간의 차원인 천국으로 인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인식 속에서 미래의 하나님 나라보다 현실의 교회 성장과 교단의 확장, 건축이나 헌금, 교회 운영 등이 더 큰 관심사가 됩니다. 개인의 신앙 역시 죽어서 천국에 가는 개인의 구원에 머무는 경우가 많고, 하나님 나라가 오늘 우리의 삶과 사회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은 상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 결과 성도들은 교회 안에서는 열심이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정의, 사랑을 실천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교회 중심 신앙이 하나님 나라 중심 신앙을 대체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기보다 교회 안에 머무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복음이 개인의 구원에만 머물고 사회적 책임으로 확장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잃으면 교회는 존재 이유를 잃습니다.

 

맺음말

 

성경은 교회의 기초이고, 기도는 교회의 호흡이며, 하나님 나라는 교회의 목적입니다. 이 세 가지가 약해질수록 교회는 외형적으로는 성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적으로는 점점 본질을 잃어갑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단순히 교인 수의 감소나 사회적 신뢰의 하락이 아닙니다. 성경을 바로 읽는 힘을 잃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도의 능력을 잃으며, 예수께서 가장 먼저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중심에 두지 못한 데 있습니다.

 

이러한 '3무의 교회'를 회복하는 길은 새로운 프로그램이나 조직 개편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고, 기도로 돌아가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다시 중심에 세우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