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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종교개혁_ 프롤로그_ 왜 지금, 두번째 종교개혁인가?

강가딘777 2026. 9. 18. 14:31

[프롤로그] <왜 지금, 두번째 종교개혁인가?>

 

 1. 흔들리는 세계, 그리고 무너진 교회

 

 1755111일 만성절 아침, 포르투갈 리스본에 세 차례의 지진파가 도시를 강타했습니다, 경건하게 미사를 드리던 대성당의 지붕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이어 밀어닥친 쓰나미와 대화재는 도시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참극은 단순히 한 도시의 파괴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럽인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신학적 세계관 전체를 뿌리째 흔들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열렬히 예배하던 거룩한 절기에, 어떻게 성전 안에서 미사를 드리던 성도들에게 이런 비극이 일어날 수 있는가?" 리스본의 대지진은 중세 교회가 구축해 놓은 단단한 신학적 권위에 가한 치명적인 균열이었으며, 사상사적으로는 신 중심의 중세가 종말을 고하고 인간의 이성을 묻는 계몽주의 시대의 문을 연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로부터 260여년이 지난 2014년 4월 16일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을 포함해 476명의 승객을 태우고 인천을 출발해 제주도로 향하던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앞바다에서 침몰, 304명이 유명을 달리하였습니다. 차디찬 바다 속으로 거대한 배가 기울어가는 동안, 선장과 선원들은 승객들에게 거듭 방송했습니다. "가만히 있으라. 움직이지 말고 현재 위치에서 대기하라." 그 말을 믿고 구명조끼를 입은 채 선실 안에서 순종하며 기다렸던 수백 명의 아이들과 승객들은 결국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TV에 생중계로 전달된 참사는 온 국민의 가슴속에 충격적으로 각인되었습니다. 무책임한 지도부, 시스템의 부재, 그리고 절박한 상황 속에서 검증되지 않은 권위에 순종하라고 강요했던 체제의 무능이 불러온 참혹한 비극이었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더 깊은 내적 충격을 준 것은 사건 자체보다 그 참사를 대하는 교회의 미심쩍은 태도와 냉담한 발언들이었습니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던 성경의 가르침은 온데간데없고, 비극을 당한 이웃을 향해 퍼부어지는 몰상식한 정죄와 책임 회피성 발언들은 내 안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던 기독교 신앙에 근본적인 의혹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내가 알던 하나님, 내가 믿어왔던 교회가 과연 이것인가’하는 작은 의심이 시작되었고 단단했던 신앙에 균열을 가져왔습니다.

 

2. 거듭된 균열과 파산 선언

 

1755년 리스본 대지진과 2014년 세월호 참사는 역사적으로 전혀 다른 사건이고, 재난의 물리적 원인(천재지변 vs 인재)도 확연히 다릅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과 세계관에 미친 충격이라는 관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리스본 대지진은 유럽 기독교 문명을 뒤흔든 사건이었고, 세월호 참사는 많은 한국인, 특히 기독교인들의 신앙과 하나님 이해를 흔든 사건이었습니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악과 고통 앞에서 기존의 신앙 체계가 충분한 답을 주지 못했다'는 데 있습니다. 또한 "견고하고 단단해 보이던 신앙관·세계관의 틀이 무너지며 신의 섭리와 사회적 정의에 대한 뿌리 깊은 회의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사상사적·신학적으로 대단히 깊은 유사성을 가집니다.

 

두 사건은 "선하고 전능하고 하나님이 왜 이 비극을 방관했는가?"라는 질문을 직면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기존 이해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사람들까지 죽게 하셨는가?"

"왜 하나님은 아무 죄 없는 학생들을 구하지 않으셨는가?“

 

따라서 두 사건은 단순한 비극을 넘어, 기존의 "완벽하고 흔들림 없는" 신앙 체계가 현실의 거대한 고통 앞에서 근본적인 질문을 받게 된 전환점이라는 점에서 깊은 유사성을 지닙니다. 기독교의 전통적인 신정론(神正論, God’s justice)은 "고난은 죄에 대한 신의 응징"이라는 틀로 재난을 설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두 사건 모두 이 설명 방식이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 앞에서, 전통적인 교회의 "신에게는 다 깊은 뜻이 있다"거나 "인간의 죄 때문"이라는 해명은 공허함을 넘어 폭력이 되었습니다. 교회가 전해주던 "신이 세상의 모든 일에 섭리하고 계신다"는 무결점의 도덕적 신념 체계는, 무고한 이들의 고통 앞에서 깊은 신앙적 회의와 '신의 부재'에 대한 아픔으로 바뀌었습니다.

 

리스본 대지진이 유럽 지성사에서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과 이성 중심의 세계관(계몽주의)"으로 이행하는 방아쇠가 되었다면,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와 종교계에 "모든 것을 신의 뜻으로 정당화하던 맹목적 · 교조적 신앙"을 깨뜨리고, 고통에 공감하며 현실의 정의를 바로잡는 인간의 책임을 일깨워 준 사건이라 볼 수 있습니다.

 

두 사건 모두 "기존 세계관이 전해주던 안이한 해답을 무너뜨리고, 인간으로 하여금 고통과 삶에 대해 더 깊고 정직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 참사"라는 점에서 유사한 사상적 궤적을 공유합니다. 이렇게 두 사건에 대한 신정론적 고민을 우리는 충분히 나눌 수 있습니다.

 

나아가 더 주목하는 것은, 세월호 사건을 통해 그동안 교회가 견지해왔던 신앙 체계에 대한 의혹이 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불행하고 참담한 사건을 대하는 교회의 태도에 있어서 뭔가 마음이 불편하고 석연치 않은 모습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가톨릭에서는 교구의 수도회를 중심으로 성명서를 발표했지만, 개신교회에서는 하나의 통일된 입장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세월호 사건이 그저 교통사고와 다를 바 없다’는 누군가의 말은 이 심각한 사고에 대한 책임을 희석시키기 위한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교회들은 희생자들의 죽음에 대해 깊이 애통해하지 못했습니다. 무능력한 정부와 국가권력과 돈에 눈먼 사회구조에 대해 의분을 품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같이 울어주어야 할 사람들은 바로 기독교인들이 아닌가? 교회가 왜 이럴까?’ 교회가 참사에 대해 침묵하고 방관하고 오히려 희생자들과 그 기족들을 모욕하기까지 하는 일부의 행태에 대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교회에 대해 의혹이 작은 구름처럼 떠올랐습니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신앙의 균열은 이후로 봉합되지 못했습니다. 이후 일련의 사건을 지나면서 의혹은 의심이 되고 불신이 되고 결국 확신이 되었습니다. 미세한 작은 균열이 결국 거대한 댐을 무너트립니다.

 

리스본 대지진은 당시 유럽인이 가진 견고했던 신앙관에 회의와 붕괴, 불신을 가져다 주었다면, 세월호 참사는 교회에 대한 의혹을 가져왔으며 신앙의 미세한 균열을 가져온 시작점이 되었고, 개인적으로 그동안의 신앙에 대해 뒤돌아보게 만들었습니다. 그 작은 균열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이후 연이어 터져 나온 시대적 사건들 속에서 한국교회가 보여준 모습은, 신앙 체계에 대한 의심을 불쾌한 확신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팬데믹 사태 속에서, 일부 교회들은 이웃의 안전과 공공의 안녕보다 집단의 이기주의를 우선시하며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뒤이어 벌어진 대통령의 계엄 선포와 탄핵이라는 국가적 대혼란의 국면에서도, 교회의 리더십은 역사적 의식이나 공의로운 분별력을 보여주기는커녕 거룩한 단상을 정치적 진영 논리의 도구로 전락시켰습니다. 더욱이 사회를 병들게 하는 사이비 종교집단이 맹위를 떨칠 때조차 교회가 보여준 안일하고 묵인하는 듯한 태도는, "지금의 기독교 체제는 심각하게 고장 났다"는 사실을 스스로 적나라하게 폭로했습니다.

 

리스본 대지진이 중세 가톨릭 신학의 무기력함을 깨뜨렸듯, 세월호 참사로부터 시작되어 팬데믹과 정치적 혼란, 이단 파동으로 이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드러난 교회의 모습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의지해 온 기존의 신앙 체계와 종교적 구조가 이미 붕괴되고 있음을 간담이 서늘하게 느끼게 만들었습니다. 리스본의 잿더미 위에서 새로운 시대가 열렸듯, 세월호의 아픔이 우리 사회의 안전과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듯, 지금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전례 없는 위기는 우리에게 판을 바꾸는 개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3. 벼랑 끝에 선 한국교회, 그리고 하나의 질문

 

이제 우리는 이 현실 앞에서 더 이상 눈을 감거나 모른 척할 수는 없습니다. "이토록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 신앙 체계 안에서 우리는 계속 안주할 것인가, 아니면 이 거대한 붕괴를 딛고 세상을 살릴 전혀 다른 생명의 원형을 찾아 나설 것인가?“

 

리스본의 잿더미 위에서 새로운 사상의 시대가 열렸듯, 그리고 우리 삶을 흔들어 놓았던 지난 비극들과 교회의 부끄러운 민낯이 우리에게 뼈아픈 질문을 던졌듯, 지금의 위기는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던지시는 강렬한 개혁의 부르심입니다. 단순히 교인의 수를 늘리거나 예배당의 음향을 바꾸는 수준의 리모델링으로는 이 난국을 돌파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기능하지 않는 '종교 체제'를 깨뜨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래 바라시는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를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경탄을 자아내는 웅장한 예배당, 첨단 음향 시스템, 세련된 찬양팀과 능숙한 설교. 과거 그 어느 시대보다 교회의 시스템은 화려해졌고, 신학적 지식과 콘텐츠는 인터넷을 통해 손쉽게 넘쳐납니다. 하지만 정작 그 거대한 성전 문을 열고 나서는 성도들의 표정은 어둡습니다. 겉은 깨끗하고 화려하지만 속은 음울한 회색빛을 내비칩니다.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어버린 현실, 청년들은 조용히 뒷문으로 빠져나가고, 세상은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을 던집니다. 여기서 한 가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건물은 화려해지고 신학적 지식은 넘쳐나는데, 왜 성도들의 삶과 세상은 변하지 않는가?"

 

단순히 성도들의 열심이 식었거나 기도 양이 부족해서일까요? 아닙니다. 문제의 본질은 훨씬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신앙의 집을 지어 올렸던 기반(System)과 패러다임 자체가 이미 수명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부러진 바퀴를 아무리 더 세게 굴리려 애써도 수레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봉책이 아닌, 틀을 바꾸는 개혁입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삶의 자리에서 제사장이 되고 진정한 복의 근원이 되어 세상의 아픔에 응답하는 것, 주일 예배라는 건물 안을 벗어나 모든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 내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입니다. 무너진 신앙 체계의 잿더미를 딛고 일어서는 '두 번째 종교개혁'의 거대한 여정은 바로 이 처절한 의심과 절박한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4. 16세기 개혁이 남긴 '미완의 과제’

 

500여 년 전, 마르틴 루터와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믿을 것인가"의 문제를 바로잡았습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이라는 위대한 기치 아래, 교황의 권위 아래 갇혀 있던 성경을 빼내어 모든 신자의 손에 쥐여주었습니다. 교리의 개혁을 이뤄낸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6세기의 개혁은 절반의 성공으로 멈추고 말았습니다.

 

교리는 바꼈지만, 교회의 '구조와 삶'은 중세 가톨릭의 틀을 완전히 벗어던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개혁자들은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다(만인사제설)"라고 장엄하게 선언했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성직자와 일반신도의 마지노선이 여전히 공고했습니다.

 

결국 신자들은 성경을 읽을 권리는 얻었으되, 여전히 사역의 현장에서는 주일마다 회중석에 앉아 목회자의 설교를 감상하고 평가하는 '수동적인 관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중심은 삶의 현장이 아닌 '성전 건물'에 갇혔고, 신앙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이 아닌 '주일 1시간의 종교 행위'로 축소되었습니다. 루터가 쥐여준 성경이 우리 손에 들려 있지만, 정작 그 성경을 펼쳐 들고 세상을 향해 걸어 나갈 '사역의 권리'는 봉인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AI와 첨단 기술이 통제하는 시대, 개인화와 단절이 심화되는 급변기 속에서 '건물에 안주하는 종교 시스템'은 빠르게 유효기간을 다해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매끄럽게 잘 짜여진 '종교적 쇼'에 감동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외로운 사람들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은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주고 진짜 삶을 나눌 수 있는 '진정성 있는 생명 공동체'입니다. 지금이 바로 골든타임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의 여러 종류의 위기들, 갈수록 지구촌 곳곳으로 번져가며 끝이 나지 않는 전쟁과 말세를 부르는 심각한 기후 위기와 시시로 거듭되는 팬데믹을 통해, 우리를 헛된 종교적 타성에서 깨우시고 다시 하나님 나라의 열망을 품은 제자들로 부르고 계십니다.

 

이 책은 단순히 기존 교회를 비판하기 위한 책이 아닙니다. 비판을 넘어, 벼랑 끝에 선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당신의 가슴속에 묻혀 있던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다시 피워 올리기 위한 실천적 지도(Map)입니다. 500년 전 루터가 당신의 손에 성경을 쥐여주었다면, 이제 이 책은 당신을 회중석의 관객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역의 현장으로 밀어 넣을 것입니다. 더 이상 구경꾼으로 남지 마십시오. 당신이 서 있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출발지이며, 당신이 바로 이 시대가 간절히 기다려온 제2의 개혁자입니다. 거대한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루터가 쥐여준 성경을 가슴에 품고, 이제 우리는 삶의 현장이라는 제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구경꾼의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당신을, '두 번째 종교개혁'의 여정으로 초대합니다.“

 

 

맺는 글. 왜 지금 두번째 종교개혁인가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은 단순히 교회의 부패를 비판하는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가리고 있던 인간의 권위와 제도, 왜곡된 신학을 성경의 빛 아래 다시 세우려는 운동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새로운 종교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교회가 본래의 복음으로 돌아가려는 회개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50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다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는 과연 종교개혁이 회복하고자 했던 복음 위에 서 있는가?

아니면 또 다른 전통과 이념, 교리와 권력이 복음을 덮어 버린 것은 아닌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위기는 단순히 교인 수 감소나 교회의 사회적 신뢰 하락에 있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인 위기는 복음의 중심이 흐려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보다 특정 교리 체계가 앞서고, 성경 전체의 이야기보다 일부 교리를 절대화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영혼 구원을 강조하면서도 사회적 정의와 자비, 생명의 가치를 충분히 증언하지 못했고, 때로는 특정 정치 이념과 결합하여 복음의 보편성을 스스로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이러한 의문을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제기한 사건이었습니다. 교회는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울기보다 정치적 대립 속에서 분열된 모습을 보였다는 비판을 받았고, 이후 코로나19 팬데믹과 정치적 갈등, 사회적 논란을 거치면서 일부 교회와 지도자들이 특정 정치 이념과 지나치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은 더욱 확산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을 그렇게 일반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이 사회 안에서 형성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한국교회가 깊이 성찰해야 할 과제입니다.

 

문제는 정치 참여 자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회 속에서 정의와 평화를 위해 책임 있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복음이 정치를 비추는 기준이 아니라, 정치가 성경을 해석하는 기준이 되는 역전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특정 정치 진영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고, 예언과 환상은 정치적 확신을 뒷받침하는 근거처럼 소비되었습니다. 그 결과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아니라 특정 진영의 언어처럼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성경을 읽는 방식입니다. 성경은 창조에서 새 창조에 이르는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오랫동안 '죄–구원–천국'이라는 축소된 틀 안에서 성경을 읽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 나라, 정의와 평화, 공동체의 회복, 창조세계의 보전, 교회의 공적 책임과 같은 성경의 중요한 주제들은 상대적으로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교단을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새로운 교리를 만드는 일도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성경을 다시 읽고,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중심에 두며,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교회와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일입니다.

 

두 번째 종교개혁은 사람을 향한 운동이 아니라 복음을 향한 회귀입니다. 그것은 누구를 정죄하기 위한 혁명이 아니라, 교회가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회개의 운동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다시 교회다워지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신앙을 해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이 인간의 전통과 정치적 이해관계, 이념적 편향에 가려지지 않도록 다시 세우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어느 시대에도 특정 국가나 특정 이념과 동일시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인간의 권력 위에 있으며, 모든 민족과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정치 세력의 대변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이 두 번째 종교개혁의 시대인 이유는 교회가 무너졌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의 중심으로 다시 돌아갈 기회가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교회가 끊임없이 자신을 말씀 앞에서 개혁해 가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슬로건이 아니라 새로운 회개이며, 새로운 조직이 아니라 새로운 성경 읽기이며, 새로운 권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교회의 중심에 모시는 일입니다.

 

두 번째 종교개혁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롬12:1~2,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