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없는 부정적 혹은 중립적인 기준 9가지>
이것은 당시 부흥반대주의자들이 부흥을 반대하는 근거로 사용한 중요한 기준들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부흥반대주의자들이 부흥을 반대하는 데 사용한 이러한 기준들은 성령의 역사를 분별하는 바른 기준점들이 될 수 없음을 밝힌다. 오히려 이러한 기준들은 중립적이다. 성령의 역사일 수도 있고, 성령의 역사가 아닐 수도 있다. 즉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도 이러한 일들은 일어날 수 있고,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도 이러한 일들은 일어날 수 있다.
첫째, 아주 비범하고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둘째, 몸에 특별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즉 눈물을 펑펑쏟고, 큰 소리를 지르며, 실신하는 것 등이다.
셋째, 기독교에 대한 이슈가 사회에 공론화되는 것이다.
넷째, 상상력에 큰 영향을 받는 것이다. 즉 환상을 보거나 하는 것이다.
다섯째, 모범을 보고 따라 하는 것이다.
여섯째, 때로 지혜롭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일곱째, 사람들이 많은 실수를 범하는 것이 분별기준이 될 수는 없다. 한 사람의 심령 속에 은혜와 죄가 공존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여덟째, 이단에 빠지는 사람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닌가? 아니다.
아홉째, 많은 목회자들이 율법설교, 지옥설교를 하고 있다는 자체가 잘못된 것 아닌가?
에드워즈가 말하는 이러한 부정적 혹은 중립적인 증거 9가지는 사람들에 의해서 두 가지 잘못된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증거들이 나타날 때 너무나 쉽게 이런 증거를 기준 삼아서 이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단정지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지성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만 가지고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현상들은 성령의 역사가 없어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성령의 역사에도 이러한 현상들이 동반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나면 무조건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잘못된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사람들은 대부분 열광주의자들이다. 이러한 것만 가지고 성령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현상들은 꼭 성령의 역사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드워즈가 제시한 이러한 9가지 기준은 성령의 참된 역사를 분별하는 기준으로서는 ‘부정적인 기준’들이며, 또한 성령의 역사일 수도 있고, 성령의 역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점에서 ‘중립적인 기준’들이다.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는 긍정적인 증거들 혹은 5가지 바른 분별기준>
그렇다면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는 바른 기준은 무엇인가?
먼저 성경이 제시하는 기준이어야 한다. 에드워즈는 요한일서 4장에서 발견한 성령을 분별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 5가지를 제시한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에 반드시 동반되는 일이다.
사탄은 부정적인 혹은 중립적인 9가지 증거들은 일으킬 수 있지만, 긍정적인 5가지 증거들은 만들어 낼 수 없다.
이러한 5가지 긍정적인 증거들은 오직 성령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어떤 현상이나 어떤 체험 혹은 어떤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입증할 수 있는 5가지 분별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령은 무엇보다 예수님을 높인다.
성령은 예수님을 알려주러 오신 분이시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고백하고 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께 순종하게 만들어준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곧 예수님 충만이다. 예수님 충만하지 않은 성령 충만은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어떤 성령운동이 일어날 때, 어떤 외적인 현상이나 체험에만 몰두하고 예수님의 성품과 예수님의 사역이 강조되지 않을 때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열매를 맺기 마련이다.
둘째, 성령은 성경을 높여준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사랑하게 해 준다.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게 만든다.
만일 성경을 무시하고, 성경을 부인하는 영이 있다면 그는 분명 성령과는 다른 영이다. 성경이외의 다른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려고 만드는 각종 운동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신비주의가 바로 이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성령 충만은 반드시 성경 충만임을 명심하자. 성령과 성경은 언제나 함께 간다.
셋째,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 즉 교리와 신학에 관심을 가지게 만든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다. 성령은 성경 속에 나오는 진리를 통하여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간다.
만일 어떠한 운동이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무시하게 만든다면, 또한 기본적으로 교리와 신학에 대한 거부감을 조장시킨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로 보기 힘들다.
교회사에서 성령의 역사가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던 종교개혁시기와 부흥시기에는 성경의 주요 진리, 기독교의 중요 진리에 대한 강렬한 관심과 신앙고백도 함께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따라서 성령 충만은 곧 진리 충만이요, 교리 충만이요, 신학 충만이라 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넷째,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로 이끈다. 그리고 거룩을 추구하도록 한다.
성령은 우리가 깨달은 진리, 성경, 예수님을 통하여 결국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도록 한다. 하나님을 닮도록 한다.
성령은 성결의 영이기도 하다. 만일 어떤 운동이나 현상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를 불러일으키고, 더욱 성결하도록 한다면 그것은 분명 성령의 역사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 충만은 곧 회개충만, 거룩 충만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이웃을 사랑하게 만든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되어있다. 성경의 핵심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기 때문이다.
진리에 대한 깊은 이해는 사랑의 열매로 나타나야한다. 거룩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따라서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사랑의 역사로 이어진다. 성령 충만은 곧 사랑 충만이다.
참된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이러한 요소들이 모두 함께 결합되어 있다.
만일 이러한 것들 가운데 특정한 어떤 것만을 주장하고 다른 요소들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다.
예를 들어 성령의 역사인 사랑 충만만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모두를 가지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만 사랑한다고 하고, 인간에 대한 사랑은 관심 없는 종교중독자는 잘못된 것이다.
또한 인간만 사랑한다고 하고, 하나님 사랑 없는 인본주의도 성령의 역사는 아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있어야 할 필수요소만이 아니라 필수요소들이 모두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신다.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기본적으로 예수님 충만, 성경 충만, 진리 충만, 거룩 충만, 사랑 충만하도록 만들어주는 어떤 운동이나 현상도 우리는 그것이 성령의 역사라고 분별할 수 있다.
부흥이 성령의 역사라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에드워즈는 지금까지 말한 진리를 당시 부흥과 관련해서 다양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한다.
첫째,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적용한다.
성경의 분별기준으로 볼 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부흥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분명하다.
분명 요한일서 4장에서 사도요한이 말하는 성령의 분별 기준으로 볼 때, 현재의 부흥은 분명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 역사가 틀림없다.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반대사유는 부흥시 사람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특이한 행동을 한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이에 대해 죄에 대한 엄청난 깨달음을 가지거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엄청난 깨달음을 가졌을 때, 이런 외적인 현상이 나타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또한 부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현재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 속에 드러나는 실수를 문제 삼기도 한다.
에드워즈는 현재의 부흥에 이러한 사소한 실수들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실수만을 가지고 부흥 전체를 반대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점을 주지시킨다.
창조사역과 이스라엘 백성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보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모든 것을 완전하게 만드시지 만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때로는 부흥 때에 젊은이들이 많은 영향을 받는데, 젊은이들의 특징 중의 하나가 혈기 많고 실수를 잘하는 때라는 점이다.
때로는 목회자들이 바른 지도를 해 주지 않아서 그런 점도 있다. 그러나 부흥시 일어나는 이러한 사소한 문제들은 시간과 경험이 많이 해결해 준다. 요컨대 부흥시 발생하는 사소한 문제들로 인해서 부흥전체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목욕물을 버리려고 하다가 아이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둘째로 에드워즈는 현재의 부흥에 대한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고 있는 중립파에 대해서 찬성과 반대의 태도를 분명히 해야함을 경고한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역사를 거부해온 역사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예수님의 초림 때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부했다.
또한 오순절 성령강림 때도 유대인들이 거부했다. 따라서 현재의 부흥에 대해서도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 침묵하고 있는 것은 곧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신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걸림돌만 볼 것이다. 사실은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이 것에 대해 부지런히 조사하지는 않고 있다. 이것은 중립을 표방한 사실상의 거부나 마찬가지다.
셋째로 에드워즈는 부흥이 하나님의 역사라고 찬성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현재의 부흥의 불길이 꺼지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적용한다. 부흥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일반적으로 교만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특별히 3가지를 조심해야한다.
첫번째 조심해야 할 점은 내적 충동이나 직통계시나 예언에 집착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은혜와 은사를 구분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은혜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은사는 불신자에게도 주어질 수 있다. 말하자면 은사를 받고도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가게 하는 것은 바로 은혜다. 은사는 은혜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의도된 것이다. 성령의 은혜의 역사를 이루지 못한다면 은사는 무익하다.
두 번째 조심해야 할 점은 공부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목사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만 받으면 되었지, 공부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아이들에게 공부시킬 필요가 어디 있는가?’ 라는 주장과 같다. 교회사의 영적 거장들은 거의 모두가 바로 독서와 공부의 대가들이었음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따라서 성령 충만하기만 하면 되지, 공부는 왜 필요하냐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비신앙적인 행동이다. 기도만 하면 되었지 설교준비는 왜 하느냐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생각이다.
세 번째 조심해야 할 점은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점이다.
상대방이 구원을 받은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지를 내가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만이 하시는 권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이러한 일들이 우리의 영혼 속에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 이러한 요소들이 우리 안에 더욱 풍성해지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에 의한 부흥이란 한 개인의 성도 안에, 그리고 집단적인 교회 내에서 이러한 요소들이 평상시보다 더욱 크게 비범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과 사랑, 성경의 권위에 대한 존중과 성경탐구의 열심, 진리와 교리와 신학공부에 대한 관심, 죄에 대한 회개와 거룩과 성결한 삶의 추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등이야 말로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서 언제나 성도들과 교회가 힘써 추구해야 할 성령의 역사다.
(백금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