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가장 큰 폐단은 무엇일까요?
시간이 흐를수록 극단으로 향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아름답고 고귀한 것도 사람에게만 오랜시간 주어졌을 때 변질되고 부패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뭔가 귀중한 가치나 개념이 주어지거나 그것을 발견했을 때마다,
사람들은 그것을 양극화시키는 몹쓸 폐단이 역사적으로 반복되었습니다.
좋게 표현한다면 이것을 전문화하고 세분화한다 말할 수 있습니다.
정반합의 도식을 들고 나와 인류발전의 필요악이라고도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분쟁의 이유가 되어왔고 서로에 대한 실망과 미움, 반목과 증오로 인한 전쟁과 살육으로 이어지기도 했다면,
고질적인 병폐가 분명합니다.
이런 사람의 폐단을 고칠수는 없을까요?
세상의 모든 이론과 개념에는 많은 사람들의 오랜 연구와 상세한 내용이 있음을 봅니다. 그냥 허투로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볍게 들쳐보고 쉽게 판단하는 실수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그 모든 것에는 역사적인 진실성과 인생들의 땀과 노력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예전에는 어떤 학설이나 개념들을 우습게 여겼던 철없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광명한 빛 앞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의 옳고 그름이 분명히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기적이며 편협한 생각으로 그것들을 판단해서는 안되지만,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눈으로 선악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들의 동기나 본질을 꿰뚫어 보는 분별력을 구하는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살펴봐도 그 극단에는 율법주의와 신비주의가 놓여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온유하며 친절하신 예수님은 유독 강하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분노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613개로 세부화된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행하는 것이 왜 하나님을 거스리는 죄가 되는지 당시 바리새인들은 이해가 되었을까요?
구약예언서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지에 대한 선지자들의 처절한 자각과 외침과 전함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율법대로 살고 있다고 고개를 뻣뻣이 들고 떳떳해 했지만, 하나님의 결정적인 한마디는 그 당시의 경건치 못한 그들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6:6)
구약의 지루한(--;;;) 율법을 읽다가 그 율법의 이면에 절절히 배여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곤 큰 은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명하신 율법이라는 것이 우리를 억압하고 강제하시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연약한 인간의 죄악된 속성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서로 돕고 섬기고 화목하게 하는 법으로, 사회의 올바른 질서를 세우는 법으로,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기는 능력을 주시는 법으로, 결국 우리에게 올바른 믿음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법을 주신 것입니다.
모든 율법의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있습니다. 누가 구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였습니까?
예수님은 율법 뿐 아니라 모든 예언서의 핵심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확정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서로 사랑하는 자가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이웃을 진실되게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율법이라는 기계적인 틀 안에 스스로 갇혀 있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생명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예수님께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표현하신 외식에 빠지는 우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는 능력과 참 자유를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 기쁜 소식과 말씀도 그저 생명없는 글로 읽고 다루는데 머무른다면,
우리는 율법주의의 덫에 걸릴 위험에 처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흔한 예로, 교회에서 전 성도들에게 권하는 성경읽기가 있는데, 성경을 꾸준히 읽는 것은 말할 나위없는 중요한 것 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일주일동안 읽은 성경장수만 확인하는 데만 그친다면 성도들의 성경읽기를 통한 풍성한 유익을 얻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 기도하는 것, 말씀을 나누고 실천하는 것, 사랑을 전하며 섬기고 봉사하는 것,
이런 모든 믿음의 행위가 진정 하나님을 잘 알고 사랑함으로 이루어지는지,
아니면 주어진 말씀에 대한 습관적이며 기계적인 반응을 통해 행하는지 자문해 볼 일입니다.
하나님은 신비의 근본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비의 출발이십니다.
하나님의 신비를 그 누가 다 알까요?
그런데 그 아름다운 신비도 사람에게 오면 역시 부패하고 변질됩니다.
신비주의의 문제는 다 아시다시피, 신비적인 요소에만 머무르고 말씀을 등한시한다는데 있다는 것이겠지요.
또는 말씀을 그 신비적인 것을 강화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됩니다. 그리고 성실하고 진지하게 살아가는 많은 성도들의 삶을 무가치하게 여기며 자신의 삶의 모습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영적은사와 체험이 다른 모든 것의 판단기준이 된다면 결국 질서의 하나님을 부인하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이라는 말씀은 신비주의자들에게는 반대자들을 공격하는 좋은 재료일 것입니다.
"보라 너희 율법주의자들아. 너희는 회칠한 무덤처럼 외식에 빠져 불법을 일삼는구나. 경건의 능력이라는 말씀은 곧 신비주의를 나타내는 것임을 모르느냐? 영적인 은사와 능력이 먼저 있어야 한다. 너희의 외식하는 믿음의 모습은 그저 경건의 모양일 뿐이다."
그들이 공격하는 율법주의자가 이 시대에는 변질된 복음주의, 또는 변질된 자유주의, 근본주의, 수정주의, 진보주의, 개혁주의를 칭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양 극단에서는 스스로 옳게 여기며 서로를 판단하게 되고 공격하는 자세를 취합니다.
불확실한 우리의 판단에 의지말고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따라 분별하는 균형잡힌 믿음의 모습을 간구하는 저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참고로 역사적인 극단화 현상의 예를 들어보면,
말씀을 주니 율법주의 (유대교)
권한을 주니 교권주의 (천주교)
자유를 주니 자유주의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 기독교는 only way가 아니라 The best )
이성을 주니 종교다원주의 (목표는 하나이나 길은 많다. only way 가 아니라 one way)
합리성을 주니 뉴에이지사상 (식이요법, 요가, 적극적 사고방식, 심령과학, 공상과학 등)
재미있으면서도 마음이 썰렁해지죠?
한가지 더 해보면,
은사를 주니 신비주의
공의를 주니 공포정치
은혜를 주니 무법세상^^
이래서 부모가 아이들을 키울 때에도 온통 사랑으로 키우지만, 삶의 분명한 규칙을 지키게하는 훈련이 필요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사랑으로 모든 행위를 용납하는 극단은 신비주의로, 규칙준수에 대한 책임만을 따지는 극단은 율법주의로 설명한다면 조금 과한 비유일까요?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마음을 통해 공의로우시며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를 원합니다.
영원히 십자가의 공의로움과 사랑하심을 기억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찬양합니다.
이 사회의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고 균형잡힌 믿음의 용사들로 성장해가기를 바라며.....J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