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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과 교회3

강가딘777 2009. 6. 18. 21:56

  

(참고자료입니다.

아래에 있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명은 꼭 읽으셨으면 합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만들어 낸 교리들

(로만 카톨릭의 기발한 발명품)

 

 

1. 300년 죽은 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과 십자가를 그리는 것을 발명하였다.
2. 375년 천사들과 죽은 성도들에 대한 숭배가 시작되었다.
3. 378년 로마 교회 감독이 이교도 승원장(법황;法皇)을 겸한다고 발표하였다.
4. 394년 매일 거행하는 미사가 채용되었다.
5.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마리아에 대한 예배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교리를 제정하였다.
6. 528년 수도원 제도 이태리 몬테 카지노에 있는 최초의 수도원을 세운 카지노의 베네딕트에 의하여

            서방에 시작되었다.(마10:5-9, 28:9-10, 막16:15-20)
7. 590년 그레고리 1세가 교회 황제로 취임하였다.
8. 593년 연옥 교리는 그레고리 1세가 발명하였다.
9. 600년 교황 그레고리 1세는 기도와 예배에 라틴어만 사용하도록 규정하였다.(고전14:9)
10. 709년 교황의 발에 키스하는 이교도들의 행사가 시작되었다.(행10:25-26, 계19:10, 22:9)
11. 750년 교황의 세속적인 권력을 주장하게 되었다.(마4:8-9, 마9:20-25, 요18:38)
12. 788년 십자가와 초상과 유골 숭배가 시작되었다.
13. 800년에 마리아와 죽은 성도에게 기도하게 가르치게 되었다.(마11:28, 눅1:46, 행10:25-26, 14:14-18)
14. 850년 소금물을 뿌리는 성수 의식이 발명되었다.
15. 850년부터 교황 레오 4세가 산타 스칼라의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는 사람들의 죄를 사하는 의식이 시작되었다.
               이는 종교 개혁시까지 계속되었으며 지금도 계속되어 있다. 
16. 890년 성 요셉에 대한 숭배가 시작되었다.
17. 965년 교회에 종을 울리는 것은 요한 14세에 의하여 라테란 회의에서 제정되었다.
18. 995년 성도들의 서품(敍品)은 교황 요한 15세에의하여 시작되었다.
19. 998년 금요일과 사순절 금식이 시작되었다.
20. 1079년 교황 그레고리 7세가 성직자의 독신을 규정하였다.(딤전 3:2-5, 마8:14절-15)
21. 1090년 은둔자 베드로가 시작하였고 카톨릭이 이를 따르고 있다.
               기도를 세는 것은 이교도들이 하는 것이요 악한 것이다.(마6:5-13) 브라만교와 불교와 이슬람에서 하고 있는 행위이다.
22. 1184년 그 악명 높은 종교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는 그 후 1223년 그레고리 9세에 위하여 정식으로 시행되기 시작했다.
23. 1215년에 화체설이 교황 인노센트 3세에 의하여 제정되었다.
24. 1215년에 고해성사가 교황 인노센트 3세에 의하여 제정되었다.
25. 1220년 떡을 숭배하는 의식이 교황  호노리우스에 의하여 발명되었다.
26. 1229년 톨로사 회의에서 성경과 여러 책들을 구독하지 못하게 하는 금령이 선포되었다.(요5:39,딤전3:15-17)
27. 1287년 교황의나  주교들이 입는 법복이 영국출신의 수도승 시몬 스톡에 의히여 발명되었다.
28. 1414년에 콘스탄틴회의에서 성도들에게는 성례식에서 떡만 주고 포도주를 금하게 하였다.(마26:7, 고전11:26-29)
29. 1439년 피렌체에서 연옥에 대한 교리가 선포되었다.
30. 1439년 일곱가지 성례가 피렌체 회의에서 비준되었다.(마28:19-20, 20-28)
31. 1196년 마리아 송의 전반이  파리의 감독 오토가 완성하였고 후반부는 1568년 교황 피우스 5세가 완성하였다.
32. 1445년 트렌트 회의에서 유전이 성경과 같은 권위가 있다고 선언하였다.(막7:7-13, 골2:8, 계22:18)
33. 1546년 트렌트 회의에서 외경을 성경에 포함시기는 오류를 범하였다.
34.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가 마리아 무원죄 잉태설을 발명하였다.(롬 3:29, 시51:5, 눅1:30,46-47)
35. 1870년 교황 피우스 9세는 교황 무오설을 주장하였다.
36. 1907년 교황 피우스 10세는 현대 과학이 발표한 모든 것을 다 이단적인 학설로 정죄하였다. 
               최근에 요한 바오로 2세는 피우스 10세가 정죄한 것은 카톨릭의 실수였다고 시인하였다.
37. 1917년 마리아가 은총의 중재자라고 확정 발표하였다.
38. 1930년 교황 피우스 11세는 모든 공립학교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발표하였다.
39. 1931년 교황 피우스 11세는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교리를 재확인하였다.
               이것은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제정했던 것을 다시 1500년만에 재확인한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 안에 존재한 인성의 어머니이지 신성의 어머니라는 말은 큰 착각이라 할 수 있다.
40. 1950년 피우스 12세는 마리아가 부활 승천하였다고 선포하였다.
41. 1962년 교황 요한 23세는 마리아가 종신처녀로 지냈다고 선포하였다.
42. 1996년 요한 바오로 2세는 진화론이 과학적 사실이라고 선포하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그 동안 마리아에 관한 교리만 9가지나 발명하였습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한 여인으로서  참으로 복된 여인이었고 믿음이 아름다운 분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상도 아니고 이하도 아닌 한 여인에 불과합니다.(노우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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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카톨릭의 정체는 무엇인가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ioyd Jones)

 

 

(우리는 왜 로마 카톨릭을 말해야 합니까? 그것은 성경이 그녀에 대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칫 종교적 편견이나 개신교의 시기심에서 나온 비평으로 오해받기 쉽지만, 그렇다고 침묵을 지키는 것은 경고의 나팔을 불지 않는 파수꾼과도 같이 무책임하고도 비겁한 행위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카톨릭 체제와 사상을 반대하지만, 카톨릭 교도들, 즉 천주교인들을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기에,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고자 하며, 진리의 말씀의 은혜와 약속에 함께 참여하기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권면하고 호소하며 경고해 주고자 할 따름입니다.


이 일을 위해 마틴 로이드 존스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사료되는데, 그는 일반 크리스천들 사이에 매우 객관적이고도 신중한 지식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에 대한 그의 접근은 언제나 신중했고, 소극적 비판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태도로 일관해 왔습니다.

본문 중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로마 카톨릭과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기독교의 진리와 위대한 개혁 교리를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외에 이 문제를 능히 다룰 수 있는 것은 전무후무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있어 소극적 프로테스탄트는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나아가 로이드 존스는 로마 카톨릭주의의 확산이 자기의 믿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무지와 무기력함에 전적으로 기인한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이같은 태도는 그의 설교 중에서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로마 카톨릭주의에 대해 다뤄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서도 역력히 드러납니다. 본고는 바로 그 단 한 번의 예외에 해당됩니다. 그것도 '마귀의 속임수'를 다루는 성경본문 말씀으로 인해 부득불 다루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그의 해명(?)입니다. 이렇듯 본문이 다루는 로마 카톨릭 사상 평가는 로이드 존스가 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그리고 최소한의 비평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격해 보인다면, 그것은 로이드 존스의 접근이 과격해서가 아니라, 로마 카톨릭의 가려진 실체와 실상이 그만큼 치명적이라는 반증일 것입니다.


비록 작은 분량이긴 하지만, 모든 개신교도들뿐 아니라 카톨릭 교도들이 꼭 한 번은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인이 객관적으로 제시한 로마 카톨릭 사상평가, 그것은 종교적 편견과 비평을 뛰어넘어서 누구나 한 번쯤 집고 넘어가야 할 바로 우리 모두의 당면과제이며, 이 시대의 영적 분별을 위한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I. 로마 카톨릭

 

너희가 마귀의 속임수를 능히 대항하여 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에베소서 6장 11절)
작금에 일어나고 있는 모종의 사건들은 모든 크리스천 지성인들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로마 카톨릭주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않으면 안되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 사이에 화해를 도모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서 여러 운동들이 일어나고, 숱한 회의들이 개최되는가 하면, 이 같은 일을 환영하는 자들은 우리(로마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상호존중 하에 협력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자체가 놀라운 일이 아니며, 크리스천 정신의 경이로운 구현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바로 이 같은 일련의 움직임 때문에, 현 국면을 바르게 파악해야 할 당위성이 있는 것이며, 앞날을 내다볼 때 사태의 긴박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반드시 직면하게 될 모종의 개연성 때문인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볼 때 현재의 상황이 지속될 경우, 머지않아 카톨릭의 비중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될 국가들은 전세계적으로 상당수에 달할 것이며; 그럴 경우, 로마 카톨릭은 '다수결 원칙'을 따르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 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유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로 인해 야기될 모종의 개연성을 예상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 나라(영국)라고 해서 수년 내에 그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현실을 감안해 볼 때, 우리가 이 같은 입장을 점검해 보고, 우리가 직면하게 될 엄청난 사실을 예의 주시하는 것은 필요불가결한 것입니다.

 

이 일은 싫고 좋고를 떠나서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본인은 개인적으로 전에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러한 성격의 어떤 '프로테스탄트 단체'에 소속된 적도 없고, 그같은 주제로 강단에서 설교해 본 적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로마 카톨릭주의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기독교의 진리와 위대한 개혁 교리를 적극적으로 선포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 외에 이 문제를 능히 다룰 수 있는 것은 전무후무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있어, 소극적인 프로테스탄트는 별 의미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지금까지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여러 해 동안 꾸준히 성장세를 유지해 온 것도 사실이지만, 최근 들어 로마 카톨릭 교세가 각 나라에서 실질적인 증가추세를 보이는 반면, 소극적인 프로테스트의 온갖 노력들은 무기력해 보입니다.

 

본인은 로마 카톨릭주의의 이러한 확산이 자기의 믿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무지함과 무기력함에 전적으로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본인이 시간을 투자해서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으로 인해 부득불 본인은 이 문제-곧 주권과 권능,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 및 높은 곳들에 있는 영적사악함의 활동들인, '마귀의 속임수'에 대해 다루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쨋든 좋습니다, 우리는 무엇부터 시작하기로 할까요? 여기에서 본인은 개개인에 관해서는 고려치 않음을 분명히 해 두고자 합니다. 물론, 카톨릭 신자이면서 동시에 크리스천인 개개인들도 존재합니다. 즉 여러분이 카톨릭 교인이면서도 크리스천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본인의 전반적인 의도는, 카톨릭 내에서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은, 그들이 속해 있는 체제(體制) 때문이 아니라 그 체제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함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해야 할 점은 로마 카톨릭 교회 내에서도 개인이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개인에 대해서는 고려치 않을 것이며, 또한 정치적 관점에서도 이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 측면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본인은 지금껏 그것이 엄청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를 제시해 왔습니다. 우리는 카톨릭 체제에 대한 역사기록을 알고 있고, 정치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카톨릭의 주장들이 정치적인 힘으로 발전된다는 사실도 알며, 따라서 이러한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정치적 측면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부분에 대해 고려하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그것이 기독교 평신도들과 기독교 정치인들의 소관으로 보입니다. 본인으로서는 오히려 영적인 측면에 관심이 있는데,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우리 앞에 제시하고자 하는 관건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II. 로마 카톨릭 체제


 자,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까요? 우선 '하나의 체제'란 관점에서 살펴볼 때, 본인으로서는 로마 카톨릭주의로 알려진 이 체제야말로, '마귀의 가장 위대한 걸작품'이라고 단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 체제는 크리스천의 믿음과 성경의 가르침에서 심하게 이탈된 종교단체이므로, 본인은 주저없이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과 더불어, 이 체제를 '배교집단'이라 단언하는 바입니다.

이제 이 점에 대해 분명히 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배교를 기독교의 진리로부터 전적으로 이탈한 기독교라고 정의합니다.

혹자는, "글쎄요, 당신은 직접적으로 로마 카톨릭을 지칭하는 겁니까?" 라고 반문하겠지만, 여기에 대해선 무척 신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에 카톨릭을 배교집단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진실 그 자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 경우엔 진리에 대한 '부인'의 문제라기 보다는, 차라리 진리에 대한 '첨가'로 말미암아, 마침내 진리로부터 이탈하게 된 경우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설명하자면 --- 이것(진리에 대한 첨가)이야말로 온갖 교활함이 들어오는 곳이요, 마귀의 속임수가 들어오는 곳이란 말입니다. 어떤 면에서, 무심코 바라보게 되면, 세상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만큼 정통인 교회가 없다는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같은 교리적 측면을 고려해 볼 때는, 로마 카톨릭의 정통성에 문제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나사렛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드님이시라고 믿으며; 예수님의 처녀탄생을 믿으며; 예수님의 성육신을 믿으며;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믿으며;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대속 사역과 그분의 육체적 부활을 믿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셔서 하늘나라에 앉으신 사실도 믿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인격적 측면에 대해 로마 카톨릭은 절대적으로 정통이며 --- 애석하게도, 로마 카톨릭이 종종, 대부분의 개신교보다 훨씬 더 정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니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 카톨릭의 입장을 그토록 소름끼치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의 사역에 대한 측면을 가지고 카톨릭을 보더라도, 카톨릭의 정통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같은 방식으로 '은혜의 원리'에 대해 고려해 보면, 그것이 그들의 중심 교리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의 영감과 권위에 대해서도 그들은 같은 입장을 고수하며,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개신교보다 더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카톨릭을 단지 일반적인 접근방식으로 바라본다면, 카톨릭은 세계에서 가장 정통적 교회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점에서 교활함이 들어오고 어려운 문제들이 야기됩니다.

 

카톨릭은 이 모든 것에다 '저주받을 더하기'로써, 전적으로 비(非)성경적인 것들과, 사실상 성경을 부정하는 결과가 되는 것들을, '첨가'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카톨릭이 가르치는 바를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결국에 가서는 우리가 거짓말을 믿는 위치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카톨릭의 교리는 일종의 모조품이며, 성경에 명시된 대로, 카톨릭은 다름 아닌 '매춘부'(賣春婦, 음녀) 그 자체입니다.

과연 이 문제가 지극히 교활한 것이지만, 다행히도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도 '교활함', 즉, 마귀의 속임수에 대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교활함이 어떤 것인지 진정으로 알고 싶다면, 반드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문서를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모든 사람에게 어떠한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카톨릭 체제는 무척 방대하고, 그녀의 교활함은 실로 커서 거의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습니다. 무작위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틀림없이 여러분이 여러 번 접한 경우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들어온 바에 의하면,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혼을 용납하지 않으며, 카톨릭교인 중 누가 이혼했을 경우, 그는 교회로부터 제명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신문지상에서 돌연 일부 독실한 카톨릭 신도들의 이혼 소식을 접하고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지?" 라고 반문하게 됩니다. 글쎄요,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결코 진실 된 결혼이 아니었다"고! ... 그들은 어떤 것이든지 해명해낼 수 있고, 어려울게 하나 없습니다.

그들의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체계가 그러하며, 고도의 논법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의 대응이 가능한 것처럼 보입니다. 혹은 달리 얘기해서, 로마 카톨릭이 실상으로 얼마나 많은 얼굴들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이 나라(영국) 안의 카톨릭을 살펴보십시오. 또 아일랜드와 남아일랜드의 로마 카톨릭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이 미합중국에서의 카톨릭을 살펴 본 다음, 남아메리카에 있는 몇몇 라틴 국가들의 카톨릭을 살펴보게 되면, 그들이 동일한 체제라고 믿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 및 기타 유사한 국가들의 카톨릭 교회를 살펴보고, 독일이나 그 주변 국가들의 카톨릭 교회와 대조해 보면,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같은 카톨릭 체제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도, 사실은 같은 카톨릭 체제입니다.

 

카톨릭은 얼마든지 그 색깔과 모습, 형태를 바꿀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어디서든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카톨릭입니다, 흡사 카멜레온과 같이 ......여러분은 마귀가 자신을 광명(光明)의 천사로 변모(變貌)시킬 수 있는 것이 마귀의 특징 중의 하나라고 우리에게 알려 준,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카톨릭 교회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카톨릭의 '위장술'에는 끝도 없고, 한계도 없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카톨릭이 고도의 지성적인 형태로 나타나서, 카톨릭 교도들에게 성경을 읽도록 권장합니다만,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을 금하며, 비(非)지성적일 뿐만 아니라, 고의적으로 미신(迷信)을 조장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 나라에서는 관용적이고, 기꺼이 들어주며, 토론도 하고 양보도 하며, 매우 친근한 모습을 취합니다만, 그러나 다른 후진 국가에서는 아주 완고하며, 이교에 대해 사악하고도 비열한 방법으로 핍박을 가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동일한 로마 카톨릭 교회요, 동일한 카톨릭 체제이며, 동일한 카톨릭 교도들로서 존재합니다. 나는 이러한 증거들을 통해 카톨릭 교회가 마귀의 걸작품(傑作品)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한 거대한 조직과 체제가 있어, 수십 세기 동안 간간이 --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바로 이 일을 행하고 있으니 -- 곧 온갖 교활함과 속임수 가운데서, 성경의 표현대로 "온갖 불의의 속임수로써", 마귀의 속임수를 그대로 드러내 왔습니다. 이 모두가 성경에 분명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두 번째 장에서 이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이 내용이 이 예언에 대한 유일한 설명구절은 아니지만; 그 중의 하나라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여러분은 이 체제가 '발흥한', 말하자면, 권력을 장악하게 된 사실을 확인하게 되겠지만, 그것은 이미 이 조직이 활동해 오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그것이 계시록 13장의 두 번째 짐승으로 묘사되어 있고; 계시록 17장의 일곱 언덕 위에 앉아 있는 '거대한 음녀(淫女)'의 그림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듯이, 바로 로마 카톨릭이 그러하며 언제나 그같이 행해 왔습니다. 이 모든 사실은 역사 속에서 그대로 재현되어 왔으니, 이런 식으로 이렇게 성취되어 왔습니다. 여기 은밀히 유입되어 들어와 한 때 기독교 전체를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어떤 체제가 있습니다. 바로 로마 카톨릭이 천천히, 교활하게 스며들어와, 자신의 방식으로 변질시켰고, 그 결과 카톨릭의 영향력은 거의 보편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III. 로마 카톨릭의 중대한 오류들


 로마 카톨릭이 행한 일은 어떤 것입니까? 여기에 대해 적절히 다루자면 여러 달이 걸릴 것입니다.

이 한 설교에서 필자가 규명하고자 하는 관심사의 전부는 본인의 주장이 진실임을 보이기 위한 몇몇 머리글들을 제시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필자는 본 내용을 세 가지 주요 표제글로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는 로마 카톨릭이 어떻게 우상숭배와 미신행위를 도입하는 죄를 범해 왔는지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우상숭배만큼 신랄하게 정죄받는 행위도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조각한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로마 카톨릭은 형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카톨릭은 신도들에게 형상들을 숭배하도록 가르치고 있으며; 그들은 동상들과 조형물들과 초상화들을 숭배합니다. 여러분이 거대한 천주교 성당에 가보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에 가보십시오. 거기에 사도 베드로를 기념하는 동상이 있는데, 그 동상의 발가락 부분을 보면, 그 부분이 많이 닳아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구요? 로마 카톨릭의 그릇된 가르침에 희생된 수많은 가련한 희생자들이 그 발가락에 입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절하면서, 형상들과, 동상들과 유물들을 숭배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성인의 유물들과, 뼈 조각들과, 사용했던 물건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것을 어떤 특별한 장소에 안치하여, 그것을 숭배하며 앞에 절을 합니다. 이 정도는 그들이 행하는 우상숭배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두 번째 커다란 오류는 카톨릭의 전 체제와 가르침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를 차단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수많은 오류들 중 가장 끔찍한 오류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 카톨릭 교회 자체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끼어 들어오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카톨릭 교회 자체가 구원을 얻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주장합니다.

교회 밖에서는 --- "extra ecclesiam", 결코 구원이 있을 수 없다. --- "nulla salus". 즉 카톨릭 교회가 절대적인 필수요건이란 말입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혼 사이에 카톨릭 교회를 끼워 넣고 있습니다. 카톨릭은 그녀 자신이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됨을 사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약 성경의 어디에서도 그같은 근거를 찾아볼 수 없으되, 단지 로마 카톨릭주의 안에서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녀 자신만이 진리가 무엇인지 안다고 주장합니다. 그녀가 진리를 묘사하고, 그녀만이 진리에 대해 정의를 내리며 진리를 해석할 수 있다고 합니다. 프로테스탄티즘에서는 당연히 그와 정 반대로, '전 신자의 보편적 성직자 체제'를 가르치며, 각 사람마다 스스로 성경을 읽을 권리가 있고, 성령님의 조명 하에서 그것을 해석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 사실을 절대적으로 철저히 부정합니다. 로마 카톨릭, 오직 로마 카톨릭만이,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으며, 무엇을 믿어야 할지를 우리에게 말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가 스스로 '지속적인 계시'를 받아왔노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카톨릭은, 참 프로테스탄트 크리스천들이 믿는 바와는 달리, 계시가 신약성경과 함께 끝났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녀는 아직도 계시가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진리에다 첨가해야 옳다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물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반면, 카톨릭이 덧붙인 카톨릭의 전통(전승, 傳承)도 성경과 동일하게 권위가 있고, 구속력을 지닌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으로부터 이탈하게 만드는 카톨릭적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고, 성경에서 이탈하게 만드는 것을 카톨릭의 전통(전승)에다 첨가시킨 다음, 거기에 근거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활함이 기어들어오는 곳이 이 부분입니다.

마침내 종착역에 도달하게 되면 카톨릭은 우리에게 전체주의적(全體主義的) 충성을 강요합니다. 그녀는 우리가 믿는 것, 행하는 것까지 지배하려 듭니다. 그녀는 스스로 우리의 영혼과 구원(救援)을 책임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일러준 대로, 가르쳐 준 대로 절대적으로 철저히 굴복(屈伏)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로마 카톨릭은 전체주의적 체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공산주의가 인권을 유린하는 것이나, 히틀러가 그의 잔혹한 체제 안에서 했던 행위만큼이나, 카톨릭이 신도들의 혼을 절대적으로 얽어매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이 전체주의적 체제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절대권위를 행사하며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버티고 서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드러난 <두 번째 증거>로서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지만, 로마 교황과 교황에 대한 온갖 가르침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대리자(代理者)'로 일컬어집니다. 그는 사도 베드로의 영적인 직계 후손으로서, 사도적 계승을 통해 사도 베드로의 모든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말합니다. 나 자신 베드로 수위권(首位權)에 의문을 제기함으로 곁길로 빠지고 싶진 않지만, 그것이 그들의 주장 그대로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로마 교황을 '거룩한 아버지'(성부, 聖父), 곧 그리스도의 대리자라고 부릅니다. 비록 성경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땅 위의 어떤 사람도 '아버지'(Father)라 부르지 마라.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아버님뿐이다."고 말씀하는데도 말입니다. 그들은 추기경 회의에서 '권좌로부터' 선언한다고 하면서 교황이 "절대무오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1870년에 교황의 절대무오성 교리를 규정했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그것을 믿어 왔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렇게 규정됨으로써, 그가 선언하는 것들은 절대무오하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으니, 곧 하나님의 말씀처럼 절대무오하고, 그리스도 자신처럼 절대무오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즉 여러분이 알다시피, 교회의 권력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처럼" 말하는 이 한 사람의 권위 아래로 모아지게 됩니다. 그는 사람들의 숭배를 받고 있고; 그들은 그 앞에서 절하며,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주어질 수 없는 경의를 그에게 표시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드러난 증거>사제직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사제들은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신자들의 보편적 성직체계를 믿지 않습니다. 성직자(사제)가 될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카톨릭 교회에서 훈련받고, 교회의 성직수임(聖職受任)을 받아, '사도적 계승'에서 나오는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전서 2장 9절 말씀은 우리 모두가 성직자들이라고 알려 줍니다: "여러분은 선택받은 세대요, 왕가의 성직자 체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직자들의 왕국'이란 말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전혀 "아니올시다"입니다. "당신들은 단지 평신도일 뿐, 결코 성직자가 아니며, 오직 카톨릭에서 수임을 받은 사람만이 성직자(사제)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제들에게 기적을 행하는 것과 같은 독특한 권능을 부여해 줍니다. 바로 여기에서 심각하고 중차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들은 사제가 하나님의 은혜가 물에 임하도록 세례에서 사용되는 물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그들은 주님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와 연관된 기적을 행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들의 그같은 능력을 '화체'(化體)라고 부릅니다. 빵은 더 이상 그냥 빵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고 그들이 말하는데; 겉모습과 색깔은 잔상으로 남지만, 내용물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화체된다고 하며, 이러한 기적)은 그러한 기적을 일으킬 권능을 소유한 사제에 의해서라야 수행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같은 주장은 당연히 성례전(聖禮典, 성사)에 관한 교리 전체로 이어집니다. 카톨릭엔 일곱 성사(성례전)가 있지만, 본인은 이 중 특히 세례성사(洗禮聖事)와 성체성사(聖體聖事) 대해 관심이 있으며, 그들은 이 두 성사에 기적이 역사한다고 서슴없이 가르칩니다. 그들의 이론은 이러하니, 즉 사제의 역할에 의하여 물과, 빵, 포도주에서 기적이 역사하게 되며, 그 결과 이것들에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부여되는데, 그같은 기적적인 역사는 거의 자동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현상을 그들은 "ex opere operato"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더 이상 그냥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부여된 물이므로, 그 물을 어린아이 위에 부으면, 어린아이 안에서 기적이 역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혹은 성찬식에서 여러분이 빵을 취하게 되면 --- 거기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포도주는 마시지 못하게 하지만 --- 여러분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것은 마귀의 교활한 속임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첨가'된 것으로서, 거기에 대해 신약 성경에 단 한 단어의 언급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사제에 대한 언급을 마치기 전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니, 곧 로마 카톨릭의 사제는 우리가 그 앞에 나아가 우리 죄들을 고백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카톨릭에서 사제는 면죄를 선언하고, 우리에게 죄사함을 베풀 수 있는 권세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특별한 능력을 할당받은 사제직에 속한 사람들 외에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도록 교육을 받습니다. 성경에는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단 한 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의 죄(허물)를 하나님께 고백해야 하고, 거듭난 크리스천들의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 고백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사제들'에게 고백하라는 말씀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또 하나의 드러난 증거가 있습니다. 본인은 카톨릭 체제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교묘히 끼어 들어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죄를 고백하기 위해 주님께 나아가지만, 카톨릭 교도들은 사제들에게 갑니다.

 

<네 번째의 증거>로 들어가겠습니다. 이 부분은 우리를 가장 경악스럽게 하는 터무니없는 궤변 중의 하나입니다. 로마 카톨릭주의의 마리아 숭배가 놀라울 정도로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에서 마리아는 '하늘의 여왕'으로 일컬어지며, 그녀는 우리가 일차적으로 찾아가야 할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많은 성당들 가운데서 성모 마리아 상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마리아에 의해 가려져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여기에 대해 그들은 이렇게 답변합니다.

"인간적인 모습을 지닌 성모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훨씬 사랑스럽고 부드럽게 다가오며,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하고 강력하며 권위 있으신 반면, 너무 엄격하십니다" --- 이것이 그들의 가르침이며, 마리아 숭배에 대한 설명의 전부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너무도 엄격하기에 우리는 그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성모 마리아가 거기에 함께 계시는데 그녀는 사랑이 넘치시며, 더욱이 그녀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시기 때문에 예수님께 영향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대신해서 중보해 주시도록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바로 우리 영혼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아드님과 우리 사이에 위치하고 계십니다.

 

로마 카톨릭은 점증적으로 마리아의 권능에 뭔가를 '첨가'해 왔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1854년에 마리아의 '무염시태설'(無染始胎說)을 교리로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의 무염시태설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없이 태어나셨듯이, 성모 마리아도 또한 그렇게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마리아의 몽소승천'(蒙召昇天)의 교리를 발표했는데, 그 의미는 마리아가 여타의 일반인들과는 달리 결코 죽지 않았고 묻히지도 않았으며, 그녀의 아드님처럼 문자 그대로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가르침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세워주며, 그녀를 두드러지게 부각시킴으로 그리스도 자신은 아예 시야에서 가려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리아 숭배에 뒤이어 '성인'들 숭배가 추가됩니다. 로마 카톨릭 교도들은 성인들에게 기도하도록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어떻게 나오게 되었습니까? 자, 그들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현세에서도 완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믿으며, 일부의 성인들이 현세에서 그렇게 완전한 삶을 살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산 결과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의 '공덕'을 획득하고 쌓아올리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공덕을 과다히 보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여러분과 내가, 공덕이 아무리 턱없이 모자라고 부족하다 할지라도, 성인들에게 가서 기도하여 간청하면 그들의 과다량의 상당부분이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것을 '적공'(積功, 공을 쌓는 일)이라 칭하는데, 곧 성인들이 우리를 위해 중보할 수 있고, 우리가 부족하거나 결핍되어 있음이 발견되면 그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공덕의 잉여분을 우리에게 전가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여러분은 성인들을 숭배하고, 성인들에게 기도하며, 그들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덕만으로는 충분치가 않고, 여분으로 상당량의 공덕이 추가로 보충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상으로 카톨릭의 전반적 체계 및 제도가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와 믿는 자 사이에 교묘히 끼어 들어오는지에 대해 간단히 다섯 가지 요점만 정리해 보았습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완전한 신성을 부여하고 성육신, 동정녀 탄생 및 정통교리들에 대해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같은 일들이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귀의 온갖 속임수가 들어오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한편으로는로마 카톨릭이 뭐든지 옳은 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문제는 그 다음에 '첨가'(添加)시키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그릇된 나머지, 도대체 옳은 것 중에서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아하게 만들 정도입니다는 로마 카톨릭이 뭐든지 옳은 것만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문제는 그 다음에 '첨가'(添加)시키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그릇된 나머지, 도대체 옳은 것 중에서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의아하게 만들 정도입니다.
 

계속해서 세 번째 오류는, 로마 카톨릭이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심을 강탈할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에게 베푸시고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구원의 영광과 완전성(完全性)과 충분성(充分性)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칭의 --- 곧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문제와 관련된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 첫 번째 예를 들어봅시다.

루터가 말했듯이 이것은, "교회가 일어설 것인지 넘어질 것인지의 테스트"요 --- 프로테스탄티즘을 존재하게 만든 동인으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영광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 의롭다함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우리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요? 나는 이따금씩 우리 곧 프로테스탄트들이 과연 우리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의아해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의롭다함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할 때, 로마 카톨릭주의가 성장해 간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이 못됩니다.

프로테스탄트들이 단지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동안에 카톨릭주의는 성공을 보장받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주의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는 사실이 그래서 놀랄만한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
로마교의 가르침은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는 데 있어 스스로 기여할 부분이 있으므로, 죄투성이인 인간이라도 선행이나 공적을 쌓는 행위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믿고 있고 또 그렇게 가르칩니다. 우리 프로테스탄트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누더기와 같으며", 혹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 기록하였듯이, "배설물"(똥)과 같아서 거부해야 할 것이요, 무가치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것을 극구 부인하며, 사람의 의는 가치가 있고 중요하며 유익을 끼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카톨릭이 궁극적으로는 세례를 통해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입니다.

세례는 다른 모든 교리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는 여러분의 죄를 사해줄 뿐 아니라, 여러분 안에 의를 주입시켜주므로, 여러분이 세례에 의해 의롭게 된다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비록 의식이 없는 영아라 할지라도 전혀 문제되지 않으며, 그들도 세례로 의롭게 되고, 그들의 원죄가 세례로 말살되며, 그들에게 이같은 적극적인 의가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의가 아니며, 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례받은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의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로 옷입지 않고서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단지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프로테스탄트의 가르침을 위험한 이단교리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살펴보셨듯이 카톨릭의 가르침은 모든 것을 교회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안되게끔 만들어 버립니다.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가서 그분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에, 오직 사제가 베푸는 세례를 통해서만이 구원의 역사가 가능합니다. 따라서 모든 것에서 교회와 사제의 권위가 절대적이며 필수적이 됩니다. 그들 없이는 여러분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으며, 여러분의 운명은 오직 그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없으며, 반드시 이들 중보자들을 통해서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오직 한 분의 중보자가 있을 뿐이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로마 카톨릭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리아, 교황, 사제들 및 모든 고위 성직자와 하위 성직자들, 이들 모두가 필요하다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그리하여 이토록 중차대한 칭의(稱義, 의롭다함)의 교리에 있어서 그들은 거짓말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 생활의 문제는 어떻습니까? 여기에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있으니; 곧 경건한 삶보다는 의식(儀式)과 의례(儀禮)의 준수에 더 역점을 두는 것입니다.

 카톨릭은 거룩을 추구하고 성화에 대한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려 애쓰는 것보다는, 미사에 참석하고 사제들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야 할 책임과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착념하여 그대로 실행하도록 권면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가르침은 교회의 규율에 전폭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각종 의식을 지켜야 하고, 그들이 하라고 일러준 대로 행해야 합니다. 특정한 절기에는 금식해야 하고,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하며, 사제 앞에 나아가서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일단 미사에 참석한 다음에는 여러분이 하고 싶은 대로 행해도 됩니다. 여러분의 죄는 덮어졌고, 다시 올바르게 교정되었으니 계속 여러분의 길을 가십시오.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거룩한 삶의 간단 명료함 대신에, 여러분에게는 의식들과 의례들과 절기들이 있습니다.

 

또 다른 심각한 오류는 카톨릭이 '구원의 확신'(구원의 보장성)의 교리를 전적으로 부정(否定)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確信)의 교리만큼 영광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서도 중요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친히 우리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증거하십니다." 그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이 없는데도; 로마 카톨릭은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에는 확실성과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무슨 구원의 확신(보장성)이란 말입니까? 이것이 그들의 반박이며, 이는 매우 논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로마 카톨릭 체제가 마귀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부분이 바로 여기이며, 적어도 이 같은 비범한 천재성으로 이 모든 일을 성사시킬만한 존재는 마귀 외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런 식으로 적용됩니다.

여러분이 세례를 받을 때 여러분의 원죄가 말소되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됩니다. 아 좋습니다, 그렇다면 세례 후 죄 문제, 즉 세례 받은 이후에 범한 죄들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여러분이 받은 세례는 세례 후에 지은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거기에 대해 어떡하시겠습니까? 바로 그것이 문젭니다.


프로테스탄트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여전히 우리를 모든 죄와 불의에서 깨끗케 하시며,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은 나의 과거의 죄들, 현재의 죄들, 미래의 죄들을 덮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단 한 번의 행동으로 충분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로마교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만으론 충분치 않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의 세례 후 죄 문제는 전혀 다른 성격의 문제입니다. 거기에 대해 내가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사제에게 가서 죄를 고백해야만 하며, 오직 그만이 이 문제를 다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제라고해서 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도달하게 되면, 이들 세례 이후의 죄 문제와 함께 지옥과 처벌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 때 난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아무 문제없습니다.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여기에 고해성사가 있습니다. 사제 혼자서 여러분을 위해 그것을 베풀 수 있으며, 그는 능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고해성사를 받게 되고, 사제에게 특별 고백을 하게 되며 여러분은 면죄를 받게 됩니다.

그것으로 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만으로도 안됩니다! 거진 다 왔지만, 여전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남아있게 됩니다. 그것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 다행스럽게도, '연옥'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습니다, 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래서 용서받지 못한 세례 후의 죄가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 죄를 씻기 위해 그곳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는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자, 여전히 남아있는 나의 친척들이 나를 위해 기도를 하며 그렇게 하면서 돈을 지불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에게는 온갖 '면죄부'들과 온갖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들'과 온갖 촛불들과 지불한 돈이 있게 됩니다. 돈을 더 많이 낼수록 이러한 죄들이 연옥에서 더 빨리 처리되며 이 사람은 연옥에서 더 빨리 나갈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같은 주장을 성경에서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물론 전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카톨릭이 지금까지 주장해 온 추가계시의 일부분이며, 이것이야말로 첨가 그 자체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충분치가 못하고, 이 모든 방식들에 의해 보충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즉 내가 이같은 로마 카톨릭을 배교집단이라고 말한다 해서 지나쳤단 말입니까?

 


 결․론

 

 이 모든 것들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카톨릭 교도들은 무지 속에 감금되어 있으며 미신행위에 빠져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결과 이 나라에서 이따금씩 칭하는 바 '대륙의 일요일' 중심의 생활방식에 점차 젖어들게 되는데, 그 의미는 여러분이 일요일 아침에 성당에 가서 미사만 드리면, 그 나머지 시간은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미사 시간만 끝나면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스포츠와 행락으로 그날을 즐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고, 또 그렇게 한다 해서 놀랄만한 일이 못되는 것은, 개인은 고려하지 않아도 되며 관심 밖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교회가 일러준 대로 순종하고, 그 자신을 내맡기기만 하면, 그가 해야 할 일을 다한 것이요, 나머지는 교회가 책임지고 그들의 영혼을 돌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마침내, 그들이 진리의 길을 걷는 자들에 대해 잔혹한 핍박을 가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역사를 통해 로마 카톨릭 체제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어 왔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를 뿌렸고, 여전히 도처에서 기회만 주어지면 그런 일들을 감행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며, 여러분에게 묻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금껏 시간낭비를 해왔을까요? 꼭 이 모든 것에 관심을 가져야 만 했을까요? 마땅히 로마 카톨릭주의에 대해 새로운 접근방식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프로테스탄트와 카톨릭) 모두가 크리스천으로서 함께 공산주의에 맞설 수 있다는 그 사실에 기뻐해서는 안된단 말인가요? 여러분이 직면해야만 하는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 자신은 여기에 대해 답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로마 카톨릭 체제가 전적으로 공산주의보다도 훨씬 위험한 체제인 것은, 그 체제가 기독교로 날조(捏造)된 체제이면서도, 모든 일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주빛 여자'이며, 가장 끔찍하고도, 더럽기 짝이 없는 속임수인 것은, 그녀가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또다른 얼굴은 공공연하고도 명명백백한 무신론적 불신앙입니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은 결코 고집스런 열심당원들이 아니었으며, 결코 바보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성령님께서 열어주신 두 눈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루터가 그러했고, 칼빈이 그러했으며, 낙스도 그러했고, 개혁자들 모두가 그러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눈이 열리면서, 보았습니다. 바로 성경에서 경고하면서 묘사하고 있는 이 끔찍한 괴물을 보았으며,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이 괴물에 맞서서 프로테스트했습니다.
 그들은 그 괴물이 진리가 아니라고 말했고, 그리하여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과, 성경이 절대적이고, 최종적이며, 정확한 권위임과, 모든 믿는 자들의 성직자 체계 등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그같은 진리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많은 자들이 그 진리를 위해 순교당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엄숙히 경고하는 바, 여러분이 만일 로마교를 인정하는 접근을 더 기뻐하신다면, 여러분은 순교자들의 흘린 피를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이 로마교의 가르침을 수용한다면 결코 스미스필드 근처에 가지 마십시오. 그곳 스미스필드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이 화형에 처해졌기 때문입니다. 존 브래드포드와 그 외의 많은 프로테스탄트들이 로마 카톨릭주의를 부인한 이유 때문에 화형을 당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을 부인하고 있고, 그들에 대해 등을 돌리면서, 그들이 잘못한 것이었어! 그들의 실수였어!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행하고 있는지를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이들의 허울좋은 논쟁에 말려들지 마십시오.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는 이유는 무선통신과 텔레비전 때문입니다. 매스 미디어에 비치는 이들의 모습은 무척이나 공손하고, 친절하며, 또한 훌륭한 인품을 자아내며, 무척 융통성 있어 보입니다. 그들의 모습은 종종 프로테스탄트보다 훨씬 멋있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저질적으로 비난하고,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하지만 말입니다! 여러분은 또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 그렇지만, 로마 카톨릭 교회가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당신은 단지 카톨릭의 과거만 들춰내려 하고, 마치 16세기에 살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지금 당신은 20세기에 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본인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로마 카톨릭의 거만한 허풍이 바로 이것이며, 로마 카톨릭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Semper eadem." 어떻게 로마 카톨릭이 달라질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녀가 달라진다면, 그녀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시인하는 셈이 되겠지만, 오히려 그녀는 여전히 말하기를,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절대무오하며 교황은 바로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결코 실수를 할 수 없으신 분이시다. 고 합니다. 만일에 로마 카톨릭이 추호라도 변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카톨릭의 핵심주장을 부인하는 셈이 됩니다! 그녀는 결코 변하고 있다고 말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혹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오히려 상태가 더 나빠진 것뿐입니다. 그녀는 16세기에 그녀가 가르쳤던 교리에서 교황의 절대 무오성과 같은 교리들을 오히려 추가시켰습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로마 카톨릭 교회는 결코 달라지지 않습니다. 만일 이 지구상에 하나의 거대한 세계교회가 존재해 왔다면, 그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나머지 모든 교회들을 흡수하고, 무지한 상태에 있는 그들을 집어 삼켜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어려울게 하나도 없으니, 로마 카톨릭 교회는 기독교 모조품이요, 가짜이며; 가장 사악한 매춘부요 가장 마귀적인 집단입니다. 실로 적 그리스도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마땅히 거절해야 하고, 고발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대적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녀를 대적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서두에서 말했듯이, 성경적인 교리 위에 서 있는 기독교입니다.

"그리스도께로 나오라" 혹은 "예수님께로 나오라" 라고만 설교하는 기독교의 모습으로는 잠시라도 로마 카톨릭 교회와 맞설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로마 카톨릭의 숫자만 불리워 주는 결과만을 초래할 것입니다. 복음전도자들이 전도집회를 할 때 "아, 당신은 로마 카톨릭 신자시군요, 당신의 교회로 돌아가십시오." 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신약성서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들에게 경고해 주어야만 합니다. 이 소름끼치는 모조품에 대항해서 맞설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르침과, 단 하나의 권능이 있으니; 성경의 오늘 본문말씀에서 칭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란 신약성경의 진리를 성경적이고 교리적이며 신학적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16 세기에도 동일하게 사용했던 무기입니다. 루터는 단지 피상적인 복음전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막강한 신학자였고; 또한 칼빈도 그러했으며; 그들 모두가 그러했습니다. 로마 카톨릭을 침식시키고 로마 교회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던 것이 바로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역사된 위대한 진리의 체계였던 것입니다. 현 상황에 대처하는 적절한 방법으로서 이것 이상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의 책임이 막중합니다. 여러분은 진리를 알아야만 하며, 진리를 이해해야만 하며, 거짓된 가르침을 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과 같은 거짓 기독교에 미혹되고 있는 순진한 사람들에 대해 바로 여러분이 책임이 있으니, 그들의 눈을 열어주며,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시오. 그뿐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위해 견고하게 설 때에야 비로소, 성령님의 복이 우리 위에 임하시도록 열정과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자격이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위에 굳게 서고, 성경의 진리 위에 굳게 설 때, 본인이 믿기로는,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우리 위에 강력한 부흥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그같은 강력한 부흥만큼 이 가증한 체제, 곧 스스로 로마 교회라 칭하는 저 큰 '매춘부'를 쓰러뜨릴만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에게 빛을 주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시대를 분별하게 하시며, 너무 늦기 전에 우리를 흔들어 깨워 주소서.

 


마틴 로이드 죤스는 누구인가


금세기 최고의 강해 설교자로 알려진 로이드 존스는 1899년 영국의 남 웨일즈 카티프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의학에 뜻을 두고 공부하여, 영국의 성 바돌로매 병원에서 수련기간을 거친 후, 23세의 약관의 나이에 국왕의 주치의였던 토마스 호더 경(Sir Thomas Horder)의 수석 조수가 되는 등, 훌륭한 내과의사로서 장래를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그러나 참된 삶을 희구하는 그의 열망은 그로 하여금 1927년 의학계를 떠나 남 웨일즈의 애버라본시의 웰쉬 장로교회의 목사가 되게 한다. 1933년도의 자료에 따르면 웨일즈 지역으로부터 수천 명의 사람들이 로이드 존스의 복음적인 설교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1938년에 그는 런던 버킹햄가에 있는 G. 켐벨 몰간 목사가 시무하던 웨스트민스터 교회에 부목으로 부임, 그와 함께 사역하였다. 그리고 켐벨 목사가 1943년에 은퇴하자, 1968년까지 그 교회에 재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동시에 그는 주간에는 일반적으로 복음 전도자로서 순회 설교 사역을 감당하면서 초청받은 여러교회들에서 설교하였고, 때로는 학생 신앙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영적 지도자들의 공적모임에서 영적인 각성을 촉구하는 수많은 강연과 세미나를 행하였다. 그는 탁월한 복음 전도자로서 설교와 책자를 통해 의사다운 예리한 통찰력으로 진리를 옹호하고, 오류를 드러내는 일에 앞장섰다. 동시에 그는 주님의 양들을 먹이고, 병들어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에 헌신하다가 1981년 3월 1일, 82세의 생을 마치고 그리스도의 품에 안겼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그의 주요 저서로는 「로마서 강해」- 전 8권 / CLC; 「에베소서 강해」- 전 8권 / CLC; 「복음의 핵심」양무리서원; 「산상수훈(上, 下)」/ 정경사; 「의학과 치유」/ 생명의 말씀사; 「마틴 로이드 존스의 십자가」/ 두란노; 「영적침체」/ 새순출판사; 「매일의 묵상」/ 엠마오; 「믿음의 시련(시73편)」/ 청교도신앙사, 「목사와 설교」/ 기독교문서선교회 ..... 등 다수가 있다.

Originally Printed in Great Britain at The Burlington Press, Foxton, Near Cambri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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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난 카톨릭 신부 밥 부시의 간증
 

 
                                                                                                                                              글. 밥 부시

저는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의 한 작은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아주 작은 마을이었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정도 신부님께서 시간이 나실 때,큰 강당에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저에게는 부모님, 형,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산타 클라라의 카톨릭 대학에서 교육받으셨기에 자식들이 카톨릭 기숙학교에 다니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를 4년간 다녔습니다. 학습하기에는 좋은 곳이었으나, 성경에 전혀 중점을 두지 않았고 그곳에서 오직 카톨릭 이론과 전통만을 습득하였습니다. 졸업 후, 어떻게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다가 예수회 신부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섬기며 인류를 돕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제가 아는 전부였습니다. 당시에, 심지어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도 저는 하나님을 만나기 원했으며, 그분을 알고자 하는 갈망과 갈급함을 마음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고등학교 2학년 때, 어느날 밤 운동장에 나가 어둠 속에서 팔을 하늘로 들고 무릎을 꿇고는 "하나님, 하나님, 어디계십니까? "하고 외쳤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정말로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1953년 저는 예수회에 들어갔습니다. 예수회에서 제가 처음 들은 말은 "모든 규칙과 규율을 지켜야만 하며 그것이 하나님을 만족케해드리고 또한 그것이 하나님께서 너에게 원하시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좌우명을 배웠습니다. "규칙을 지켜라 그러면 규칙이 너를 지킬 것이다." 우리는 많은 성자의 삶에 대해 읽었고 그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를 섬겨왔기에 성자가 된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처음부터 그들을 따라야 할 본보기로 삼도록 훈련받았습니다.

1966년 서품을 받을 때까지 13년 동안 카톨릭 신학 연구를 하였습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고 마침내 서품을 받았지만 여전히 제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갈급함과 허기가 있었습니다. 저는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했고 평화를 갖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때 저는 제 안에 있는 뭔지 모를 화와 날카로운 신경 때문에 흡연도 하였습니다.

저는 여전히 마음 속에 갈급함을 안은 채, 그래도 정상에 올라보자는 생각으로 로마에서 대학원 과정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아프리카로 선교사역을 떠날까도 생각했지만, 그 곳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제 자신조차도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카톨릭 교리와 카톨릭 교회가 제공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뿐, 그것으로는 그들 역시 만족시킬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던 중 로마에서 나온 제2바티칸 종교회의로 인해 모든 것이 바뀌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제자신을 진리로 돌아가게 하고 세상을 변화실 것으로 생각되게 했으며 제가 열심을 내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기에 저는 아프리카로 가는 대신 캘리포니아로 돌아갔습니다. 그 곳에서 저를 위한 하나님의 경이로움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미사를 인도하던 한 요양소의 성구 보관실에 있을 때, 어떤 이가 저에게 다가와 가정 기도모임을 인도할 수 있는 지를 물었습니다. 저는 한 번도 기도모임을 인도해보지 않았습니다. 기도모임을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으나 수많은 시간 동안 훈련을 받았으니 그것을 인도할 정도로 자격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기도모임은 매주 목요일 10시부터 정오까지 열렸고 우리는 오직 성경만 읽고 주님께 찬양드리고 서로 서로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 때까지 저는 담배를 피웠고 매주 목요일 아침마다 "도대체 왜 승낙을 했을까? "하고 자문하며 내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임이 끝나고 나면 떠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말씀의 힘이 제 영혼과 삶을 감동하시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느날 밤, 우리는 기도모임 사람들과 요양소에 갔습니다. 말씀을 읽은 후, 진행자가 "이제 하나님께 대해 갈급해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충만을 얻지 못해 진정으로 거듭나기를 소망하고 성령께서 삶을 인도하고 변화시키기를 소망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십시오. 우리가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그러자 한 부인이 다가와 "제 남편에게 앞으로 나가서 함께 기도하고 거듭남을 얻고 성령의 감동하심을 얻으라고 권고해 주시겠습니까?" 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저는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제가 제 자신에 대해서도 기도하지 못했기에 그렇게 하는 것만 정말이지 진실되지 못한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그분께 권고하겠습니까?"
저는 키가 크고 부인은 매우 작았지만 그녀가 제 얼굴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나를 어루만지며 "당신 자신을 위해 기도하세요"라고 말하던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녀는 제 안에 있는 그 커다란 허기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 오랜 학습에도 나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 어떻게 그가 주님과의 만남으로 성령 충만 되어 변화되었는지를 그 기도 모임에서 성경을 읽고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일생동안 그러한 힘과 생명을 제 안에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 삶을 변화시켜 주실 것을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섰고 사람들은 저를 위해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들이 행한 일이나 제가 행한 일 때문이 아니라 오직 제 마음 안으로 하나님께서 방문해 주신 순간 저는 거듭났습니다. 예수님이 실제가 되었고 성경이 실제가 되었으며 저는 하나님의 사랑에 뜨거워졌습니다. 그분은 제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제 삶을 변화시키셨습니다.

이 경이로운 일은 1970년에 일어났습니다. 저는 당시 막 출발하여 약간은 새로웠던 카리스마 운동에서 일하는 중이었습니다. 로마에서 파생된 교리와 선서들이 난무했지만, 거기에는 유일한 안내서 성경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기도 모임을 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진행하였습니다. 말씀을 읽고 찬양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형상이나 다른 것없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있었습니다. 그 때, 제 삶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계속해서 성경적인 진리 안에서 감동하시고 확신을 주셨고 저는 성경에서 깨달은 대로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나 성자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께 직접 기도들여야 한다고 설교하였습니다.
저와 같은 것을 가르치는 또 다른 신부들을 만났습니다. 그는 6개월은 인도에서 보내고 나머지는 미국에서 보냈습니다. 1986년 저는 그와 함께 인도에서 선교를 하고 예수님을 전하며 성경에 비추어 카톨릭 교리를 연구하였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기로 결심하였기에, 만일 카톨릭 교리가 그것에 반대된다면 거부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로 오라"고 말씀하셨으며 복음서에서는 성자나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스데반에게나 야고보에게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함께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한가운데 있느니라』(마18:20)
그 성자들은 예수님께 기도하였고 아버지께 기도하였고 그들은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았고 주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카톨릭 교리 문답이 성경의 10계명을 변경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로마 카톨릭의 제 2계명은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로 성경의 제 3계명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성경 본래의 제 2계명:"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 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 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 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4-5)를 빼버린 것입니다.

카톨릭의 교리 문답 9,10계명은 10계명을 둘로 나누어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소유를 타내지 말지니라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완벽한 왜곡입니다.


다음으로 무원죄 잉태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는 마리아가 죄없이 잉태하였고 수태된 처음부터 죄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註:마리아도 포함됨)이 범죄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는 말씀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매우 큰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그것은 미사의 희생과 관계된 것이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공식적으로 미사의 희생이 갈보리의 희생의 연장이라 합니다. 즉 미사는 십자가의 희생과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것들을 사면하신즉 다시는 죄로 인하여 헌물을 드릴 필요가 없느니라』(히10:18)
히브리서에서는 단번에(once for all), 죄를 위해 유일하게 드리심이 기록되 있을 뿐이었습니다.
미사에서 신부들은 "우리의 희생이 전능하신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도록 형제들이여 기도하라"고 말하고 사람들 역시 똑같이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갈보리 형틀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고 말씀하셨고 그분은 아버지께 받아들여지셨으며 사망에서 부활하셨고 이제 아버지의 오른 편에 계십니다. 우리가 전해야 할 복음은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일어나시고 그 분의 희생이 완전한 것이며, 그분은 모든 죄값을 치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위하여 다 이루어진 희생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모여서 예배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기념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모든 죄를 가져가시기에 충분하신 것이며 거기에 아무 것도 더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카톨릭의 미사가 지상에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죽은 사람들의 죄들까지도 가져갈 수 있는 화해의 희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미사가 연옥에서의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뒤에는 심판이 있느니라』(히9:27)
사람이 구원을 얻은 후에는 죽으면 바로 천국으로 가지만 구원받지 않고 죄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 지옥으로 갑니다. 지옥에서는 천국으로 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직 살아있을 때,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어 영생을 얻고 거듭나야 합니다.


카톨릭 교회가 어떻게 구원을 가르치는 지를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세례와 유아세례를 받음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교회 법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성화로 인도하는 문이며 구원에 필수적이며 실제로 혹은 적어도 의도적으로 세례받음으로 인해 남자들과 여자들이 죄로부터 자유로와 지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며 그리스도로 형성되어 간다...."
카톨릭은 계속해서 법규, 규칙, 규범을 따라야만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산아제한, 금식, 주일마다 미사 참석 등을 어기면 죄를 범한 것이며 만일 중한 죄를 범하면 고해성사를 해야만 죄가 용서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우리는 행위(註:고해성사를 포함한 어떤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지 우리가 한 일 때문에 구원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하여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이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엡2:8-9)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더 이상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은혜가 은혜가 아니니라』(롬11:6)
인도에서 나를 가장 근심케 했던 일 중에 하나는 임종 때 신부들이 죽어가는 사람이 구원을 받고 천국간다고 말하며 속죄 행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은 주님께서 주시는 심령의 변화입니다. 불행하게도 카톨릭은 그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변질 시켰습니다.

인도를 떠날 때, 저는 더이상 카톨릭 교회에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카리스마 운동에서 성경과 어긋나는 교리들을 바꿔보려고 노력하였지만 그것을 바꾸기에는 그 뿌리가 너무 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재의 카리스마 운동도 카톨릭의 근본적인 교리들과 원리들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운동은 카톨릭에 잠식당했고 더이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는 그런 새로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벗어난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저는 카톨릭 교도들에게 구원의 자유와 새생명과 성경을 좇음으로 말미암는 기쁨을 가르쳐주어 그들을 돕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교리와 원칙들이 그들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전통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범하느냐?』(마15:3)
 저는 전적으로 로마 카톨릭을 믿어왔고 그것에 봉사하여 왔기에 그 어마어마한 변화에 직면한 시간은 저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힘겹고 벅찬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떠나야만 함을 알았습니다.

그분의 진리가 저를 자유롭게 해주셨기에 진리 아닌 것으로부터 자유해야 했습니다. 더이상 저는 성경 안에서 외발로 걷지 않고 제 길을 비추는 그분의 말씀 안에서 두 발로 걷게 된 것입니다. 저는 밝혀진 진리에 대해 영적 권위의 증거로서 성경을 좇았습니다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큰 번민 중에 있던 당시 저희 부모님은 80을 넘기신 고령이었습니다.
어느 날 무척 심각한 대화가 있었습니다. 제가 할 일 들을 말씀드렸고 카톨릭을 떠나는 이유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카톨릭 교리에 관해 말씀드렸습니다. 두 분은 한참을 침묵하신 후, 말씀하셨습니다.
"밥, 네 엄마와 내가 너처럼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부모님은 다음 미사에서 돌아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당 앞에 제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니? 제단이 희생 장소라는 것을 알고 있니? 더 이상 희생이 없다는 것을 이제 나는 분명하게 알았다."

두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시작하셨습니다. 1989년 어머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평화와 영생을 얻었다는 확신을 가지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하는 곳으로 가셧습니다.


1987년 저는 사임의 편지를 상급 신부님들과 로마로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 따르기 원함을 그들에게 증거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교회법333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로마 교회의 결정과 선언에 반대하는 어떤 호소나 청구도 없다." 이는 교황의 절대 권력과 절대 권위를 법률로 정해놓은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교황 무오설을 알고 있을 겁니다.

불행하게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는 일들의 대표자인 것입니다.

저는 현재 1500명의 성경을 믿는 성령충만된 복음 설교자들과 교제하며 사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복음을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마음 속에 그 생명을 얻을 때, 우리는 영생을 가지며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아멘

                                  

 

          거듭난 밥부시로 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