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생각할 거리들(♤♤♤)
(1) 실아있는 말씀은 생명을 일으켜 세운다. 이 선포되는 말씀이 논지의 순서를 따라 균형있고 유기적으로 제시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예를 들어, 설교 내용중에 한 부분을 보면, ''보이게 사랑해야 합니다. 심하게 말하면, 보이게 나타나지 않는 사랑은 사랑 아닙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자꾸 마음의 사랑을 말합니다. 말이나 표정, 행동, 태도에는 독이 묻었는데, 마음에는 사랑이 있다고 주장하면 상대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보여진 대로 보고, 그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일반입니다. 밖으로 '나타난 것'이 마음이고, 표현된 만큼만 사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표정과 말, 행동과 태도에 '보여주고 들려주는 사랑'을 담아야 합니다."
보이게 나타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밖으로 나타난 것이 마음이고 표현된 만큼만 사랑이다, 표정과 말, 행동과 태도에 보여주고 들려주는 사랑을 담아야 한다고 했을 때, 수긍보다는 왠지 모를 거부감, 반발심이 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논거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표현되는 사랑만 중요하고 드러내는 사랑만이 진짜 사랑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런 의도가 아니라면 마음에서 시작되는 사랑의 중요함을 간과하거나 가볍게 다루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것이 마음, 영혼의 깊은 곳에서 시작됩니다. 원인없는 결과가 없듯, 사랑에도 순서가 있고 과정이 있고 단계가 있습니다.
물론 아무리 마음으로 사랑한다해도 표현되지 않는 사랑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진짜 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신실한 행동으로 보여지는 사랑입니다. 마음에서만 멈추는 사랑은 도대체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예외적으로 성격적으로 지극히 내성적이거나 사회성이 부족한 사람이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길 어려워 하거나 그 표현이 몹시도 서툴거나 할 때 뿐입니다. 그 외에는 아무 표현없는 마음의 사랑만 가진 사람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표현없는 사랑과 드러내는 사랑을 대조시켜 바른 사랑을 확인하는 논리는 좋게 말하면 대단히 비약이 심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잘못된 논증입니다.
자녀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요일3:18)
그런 논리를 따르자면 이 구절에 있는 말과 혀로 '표현된' 사랑은 괜찮은 시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사실은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이기 때문에 마음의 진실함과 몸의 행함이라는 두가지 요소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이나 현대인의 성경 버전에 살짝 다르게 표현된 '말로나 혀 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라는 말도 그 행동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진실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라는 말입니다.
마음과 분리된 진실한 행동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마음에 사랑이 없어도 주변사람들이 좋아할 만하게 표현하는 사랑을 얼마든지 꾸며낼 수 있습니다. 남의 인정과 칭찬을 얻으려고 또 자신의 이익에 부합된다면, 언제 어디서나 마음에 없는 선한 말과 부드러운 미소, 친절한 태도, 의식적인 도움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으로 하는 사랑을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말해선 안되고, 단지 행동으로 옮겨지기 전의 단계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사랑이 실제로 표현되기 까지의 과정 중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게으름과 소극적 성격과 환경적 한계를 극복하고 행동하는 용기를 내라고 권면해야 합니다.
이처럼 하나를 지나치게 강조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가볍게 취급하거나 무시할 때, 전체 논리의 균형이 서서히 무너지고 의미의 왜곡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 구분은 하지만 분리할 수는 없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는 중요한 규칙 중 하나는 '구분할 수 있지만 분리하지 않는다'입니다
이 원칙은 많은 것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개념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구분은 하지만, 그것을 억지로 분리시키는 순간 온전한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사람은 마음(영혼)과 육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는 영과 혼과 육으로 구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을 인간을 이해하는 구성요소로서 구분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마치 영과 육을 완전히 개별적인 것으로 분리시켜 이해할 때 사람과 세상과 신앙에 대한 이원론적 사고를 심어줌으로 심각한 오해와 왜곡을 가져오게 됩니다.
칭의와 성화도 마찬가지 입니다. 칭의만을 강조하면 값싼 은혜에 머물기 십상이고, 성화만을 강조하면 행위구원적인 믿음을 갖게 됩니다. 칭의는 당연히 성화를 요구하며 성화의 기초는 칭의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과 행함도 비슷합니다. 성경은 두 가지 요소를 다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기계적으로 학습된 교리적 사고의 틀을 통해 성경구절을 취사선택함으로, 두 가지를 자꾸 분리시켜 이해하려 합니다. 그 결과 믿음으로 행함을 적대시하게 되었고, 행함으로 믿음을 조롱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모든 이웃과의 관계는 저절로 좋아질 거라는 흔한 착각이 있습니다. 여기서도 우선순위를 따질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당연히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함으로 하나님 사랑이 증명되지만, 이웃사랑만으로 하나님 사랑을 전부 채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사람의 자유의지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따르면 사람의 자유의지가 설 자리는 없습니다. 반대로 사람의 자유의지에 대한 신봉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를 벗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결코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겠지만, 구분은 하나 분리할 수는 없다는 대원칙에 근거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받아들인다면 그 신비의 영역을 향한 작은 창을 낼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각각의 위격과 동일한 본질이라는 신비를 보여줍니다. 이 역시 구분은 하지만 분리되지 않는 원칙에 부합합니다.
마태복음 22장 23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아주 하잖고 작은 단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
십일조의 의미를 잊지 않으면서 실제적인 십일조를 행하라는 이 말씀 역시도 구분하지만 분리되지 않는 원칙을 따릅니다.
우리는 우선순위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선순위를 논하는 순간 분리라는 오류에 빠집니다. 분리하지 않고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분리되어 각각을 추구하는 순간 반쪽짜리 진리로 전락합니다.
나무의 껍질이 알맹이를 보호하듯 본질은 형식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본질을 잊은 형식은 율법주의가 되어 사람들을 옥죄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알맹이인 본질과 그 본질을 담는 그릇인 형식은 늘 함께 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일서의 '말과 혀로만 사랑'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입니다. 말과 혀로만이 아닌 진실된 마음으로 행하는 사랑이 완전한 사랑임을 말하고 있는데, 이 역시 따로 따로 분리되어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깊은 곳에서 진실한 사랑이 흘러나와 말을 통해 그 사랑이 표현되고 행동을 통해 그 사랑이 열매 맺습니다.
한가지 더,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하심입니다. 이 또한 분리되지 않고 함께 가야 우리의 믿음이 건강해집니다..대속의 능력과 부활의 능력은 우리에게 함께 주어집니다.
(2) 눈에 보여지는 모습, 결과에만 지나치게 관심을 갖고 집착하는 것은 또 다른 왜곡을 가져오지 않을까?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마26:41)
이 세상의 능력자라 불리는 이들은 몸을 실제로 움직여 일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성공의 자리에 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세상의 칭송을 받고 부러움의 대상이 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언제부터인지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의 가치보다는 성공지향적이고 물질적인 가치를 더 크게 대우하는 듯 보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이나 결과에 지나친 관심과 집착을 보이는 것은 이런 세상의 풍조에 동조하기 때문일까요?
♤ 눈에 보여지는 모습은 그 마음의 현상입니다.
행동은 마음의 결과물이지만 그 행동에 마음의 전부가 반영되지는 않습니다. 그 현상과 결과물을 통해 그 사람의 마음의 동인이나 생각과 의지를 읽을 수 있지만, 전부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먼저 우리는 언제나 그 속 깊은 것, 마음과 영혼의 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고정된 시선과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복음 진리로 우리 영혼과 삶을 비추면서 서로 기도하고, 대화하고, 마음과 생각 나눔의 교제를 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서로 공감의 깊이와 폭과 넓이와 높이를 확장시켜 가야 합니다.
그 지난하고 까다롭고 불편하기까지한 그 과정을 우리는 결코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생명은 그 마음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조변석개, 수없이 변하는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 대한 불신때문에 사람들의 확실하게 보여지고 드러내고 표현하는 모습만 중요하게 여긴다면, 인간의 위선과 거짓과 외식을 은연중 조장하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남에게 보이려고 행하는 위선에 대해 경고하셨음을 기억합니다.
- 남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행하지 않도록 (마6:1)
-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자선을 베풀지 않도록 (마6:2)
-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길 모퉁이에서 기도하지 않기를 (마6:5)
- 금식하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슬픈 기색을 띄고 얼굴을 흉하게 하지 않을 것(마6:16)을 경고하셨습니다.
(3) 성경 본문을 문맥에 따라 이해할려고 노력해야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지 않을까?
요한일서를 문맥에 따라 읽어보면 이런 요약이 가능합니다.
- 하나님의 빛과 사랑의 속성을 통해 현실의 어둠과 사랑없음을 여실히 드러내셨다.
- 하나님 사랑의 결과이자 완성인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의 영광을 통해 우리는 참다운 자유와 생명과 구원에 들어들 수 있다.
- 적그리스도에 대해 경고하셨다. 그들은 우리에게 속한 자가 아님(요일2:19),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대적자(요일2:22), 너희를 미혹하는 자들(요일2:16), 아무에게도 미혹을 당하지 말 것(요일3:7), 죄를 짓는 사람은 악마에게 속함(요일3:8),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악마의 일을 멸하시려는 것(요일3:8), 영들이 하나님에게 났는가를 시험(요일4:1), 거짓예언자가 세상에 많이 나타남(요일4:1),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시인하지 않는 영은 그리스도의 대적자(요일4:3),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알아봐야 합니다.(요일4:6)
-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서 이어지는 서로 사랑의 계명을 이루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자녀로서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신 것같이 살아가야 한다.
전체 문맥을 이해하면서 각각의 구절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것이 바른 성경읽기의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4) 숲도 나무도 볼 수 있도록 하면 좋지 않을까?
우리는 거의 슾보다는 나무를 보는데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각박한 현실은 늘 나무를 보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온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우리가 있는 전체 숲을 보게 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숲을 보기 시작하면 우리의 현재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숲을 보면서 그 안에 있는 나무들의 면면을 살피고 전체 숲의 의미를 다시 셍각해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성경을 대하는 중요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개별 사건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의 의미를 알아가지만, 성경이라는 전체 틀을 통해 하나님의 큰 계획과 약속을 바라봐야 합니다.
숲을 통해 나무는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고, 나무가 없으면 숲은 존재의 이유를 상실합니다.
이것 역시 구분은 하지만 분리해서는 안되는 원칙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숲을 보면서 나무를 보고, 나무를 보면서 숲을 봐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이 말하는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의 파노라마 속에서 영원한 약속을 따라 살아가면서 각자의 인생이라는 작은 방들을 채우며 살아갑니다.
성경 전체가 시공을 초월해 우리에게 주어진 계시의 말씀이면서, 특정한 시간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자기 소견대로 해석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하신 바의 원뜻에 대해 상고하는 것이 앞서야합니다. 그러면 숲은 나무가 되고 나무는 숲이 되어 다가올 것입니다.
(5) 성경의 말씀들로 설교를 구성하고 듣는 이들을 성경의 샘으로 데려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의 단어, 구절을 가지고 어떤 깨달음이나 인사이트를 전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런데 방법론적으로 그런 개인적인 성찰들을 위해 매번 성경본문이 뒷배경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성경의 구절들로 설명하면 좋겠습니다. 성경이 성경을 말하게 하고 우리가 함께 그것을 들으면 좋겠습니다. 예화나 간증이나 개인적 통찰도 그런 작업 이후에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성경 본문을 문맥에 따라 설교함으로 성경의 원뜻에 충실한 이해를 가져오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합니다. 나아가 성경을 통해 작은 조각 그림들이 하나의 큰 그림으로 조합될 수 있도록 신자들을 도와야 합니다.
모든 설교자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기 전에 성경의 한 단어, 한 구절을 더욱 확장시켜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을 온전히 알기를 원하는데까지 성도들을 데려가야 합니다. 성경이라는 그 무궁한 진리의 샘으로 가서 함께 그 생수를 마시고 서로 기뻐하면 좋겠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생생하게 말하고 그 계획하심과 약속과 마음과 뜻을 세상에 전하고 그 기뻐하시고 소원하시는 바를 자기 삶에 구현하기를 에쓰는 사람들이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