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예능프로인 1박2일에서 우스갯 소리로 자주 쓰이는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말이 있습니다.
팀전이는 개인전이든 게임을 통해 벌칙을 받게 되는데, 자신만 아니면 모든 것이 괜찮다는 의미이다. 웃음을 주기 위한 말이지만, 한편 인간이 가진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전투적 무신론 학자인 리처드 도킨스의 책 '이기적 유전자' 라는 책에서 '우리가 이타적이라고 생각하는 행동이 유전자의 관점에서는 지극히 이기적인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인간의 이타심은 자신의 안전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수단으로 작동되어 결론적으로 자신의 이기심을 만족시킨다는 말입니다.
<<부족한, 파편적인, 부분적인 설교>>
부족하고 파편적이고 부분적인 인식과 이해로 큰 담론을 설명하려는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것은 논리의 비약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펼치려는 논리에 큰 무리가 따릅니다. 어떤 주장이나 논리를 펼칠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논증을 꼬거나 비틀면 더 창의적이거나 신선한 통찰이 나온다는 착각에 빠지면 안되는 것입니다.
1. 시작부터 전제가 잘못되었다.
<이기심>
이기심은 중립적으로 모든 생물의 생존을 위한 본능적 요소입니다. 그래서 이기심이라는 단어는 거의 부정적 상황에서 사용됩니다. 모든 인간은 이기심이 없으면 제대로 된 삶을 꾸려 갈 수 없습니다. 이기심을 논할려면 이기심의 부정적 영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나'만'을 위한 이기심이 문제의 시작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하거나 도리어 그 고통을 유발하는 이기심에 대한 설명을 생략해서는 안됩니다.
이 나쁜 이기심은 사적 욕망과 연결되어 남을 짓밟고서라도 불의한 자산을 얻으려는 악한 탐욕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불신앙의 문제이지만, 사단이 이담과 하와를 유혹하는 말의 내용을 보면 인간의 악한 이기심을 교묘하게 부추긴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않고,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다"
사악하고 교활하고 간교한 이기심이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남을 죽이면서까지 높이 세우려는 자기중심성이 무섭게 발현됩니다. 세상의 중심이 오직 나여야만 하는 극단적인 자기애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와 질서 아래의 순복은 저 멀리 던져버리게 되었습니다. 이 불순종은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불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합니다. 성경과 세상사의 모든 비극적인 사건들의 이면에 숨어있는 원인은 결국 이것들입니다.
<이타심>
이타심은 남을 위하는 마음입니다. 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하는 것입니다. 이티심의 시작은 공감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남의 입장과 처지에 서보고 남의 상황과 상태, 마음과 생각을 살펴보고 공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감에는 상대적인 한계가 있고 적절한 선이란게 있습니다.
(*상대적인 한계는 남이 생각하고 느끼는 바를 100% 내가 알수 없는 것이고, 적절한 선관 남이 처한 모든 것을 응원하고 편들고 위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런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사람에 대한 연민을 가질 수는 있어도, 그가 행한 행동에 대한 어떤 공감이 필요할까? 이 적절한 선은 인간상식에 준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 근거한 기준이 더해진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격언처럼, 죄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되 그 사람을 무조건 편들고 응원할 수 없다. 인간 본연의 존재가치에 대한 존중을 지킬 따름이다.
그러므로 공감은 무조건적으로 상대를 불쌍히 여기고 같은 편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처지와 입장에 서 보려고 노력하지만, 모든것을 수용해 줄 수는 없다.)
2. 성경해석은 비약도, 궤변도 되어서는 안된다
질문1) 이타심이 율법이 되어 남을 정죄할수 있는가?
질문2) 남의 형편이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저 근본적으로 사람이 이기적인 존재임을 인정하고 받어들일 수 밖에 없다는 말은 결국 이타심의 기초인 공감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가?
질문3) 예수님 희생의 사랑을 받아 하나님 형상의 존엄함으로 살도록 자기를 세우는 이기심과 다른 사람도 동일한 이기심으로 살도록 존중하는 것이 이타심이라는 말은 너무 비약이 아닌가? 이렇게 철저하고 제대로 이기적이어야 이타적일 수 있다는 말은 유효한가?
3. 이기심과 이타심은 구분할수 있지만 분리되지 않는다
이기심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만을 위한 이기심은 언제나 사고를 만듭니다. 나를 위하는 것이 이기심이지만, 남을 살피지 않고 오직 자신만을 위한 이기심은 늘 불협화음을 불러오고 다툼과 미움,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이기심의 깊은 어두움은 남을 해하고 죽이면서까지 자신만을 위하는 자기 중심, 자기애에서 나옵니다 이 근본 문제를 놔두고 다른 것을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① 이타심이 도덕과 율법으로 변질될 수 있는가? 그래서 남을 정죄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는가? 구체적인 섬김과 나눔의 일을 하면서 상대를 비난하고 정리할 수 있는가?
앞서 말했듯, 이런 생각이 가능한 건 기본 전제가 잘못되었이 때문입니다. 이타심은 기본적으로 남을 이롭게 하는 마음입니다. 이 말의 숨은 뜻은 남을 인식하는 절대적 기준이 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남의 상황과 마음의 상태, 말과 행동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주된 기준이 내 자신이 된다면, 그것은 나쁘게 말하면 꼰대짓과 같습니다.
공감이 빠진 이타심은 없습니다. 공감이 빠진 이타심으로 행하는 모든 것은 진정한 이타심이 아닙니다. 공감은 내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하지 않고, 먼저 순수하게 상대의 입장과 처지에 서서 그 사람의 상황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래서 공감은 깊은 관계와 진솔한 교제와 열린 대화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서로를 알아가는 최소한의 과정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만약 섣부른 생각으로 상대를 피상적으로 알거나, 또는 남을 쉽게 알 수 없다는 이유로 공감하기를 포기한 채, 판단의 기준이 내가 되어 선악을 판별하고, 도덕과 율법적으로 남을 정죄한다면 그것은 남을 위하는 이타심이 아닙니다. 이타심의 기본은 남의 시선과 마음과 생각으로 처한 상황을 느껴보고 알아보려는 노력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상대를 완전하게 읽어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포기해 버리는 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공감의 능력을 져버리는 것입니다.
이타심은 상대를 먼저 배려하는 것이기에, 내가 그럴만한 준비가 되어있을 때 가능합니다. 그것은 나를 먼저 위하는 이기심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의 공감하려는 끈기있는 노력을 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처럼 이타심은 순수하게 남은 먼저 위하는 마음이기에 내가 가진 어떤 도덕적 잣대나 율법적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려는 생각이 들어설 공간이 없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면서 자신이 세운 기준 안에서의 행동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② 남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인간은 근본 이기적 존재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이티성이 시작된다는 말은 합당한가?
남을 향한 무조건이고 완벽한 공감이 가능할까요?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의 곤란함을 우리는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범죄에 연루되거나 명백히 악한 행동을 한 사람과는 어떤 공감을 할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인 우리는 악한 본성이 여전히 남아있는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당신이 한 행동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면죄부와 같은 말로 그를 위로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의 은혜안에 있지만, 옛 본성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존재이면서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을 가진 우리는 현실의 고비마다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다. "내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롬7:24)"
우리가 한 하나님, 한 주님, 한 성령을 모시고 한 마음을 품고 한 뜻으로 살아간다는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밝히 알고 성령으로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나누고 공감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기질과 성향과 사고체계가 다름으로 인해 상대를 이해하기 쉽지 않고 완전한 공감이 힘들때에도 상대 알기를 포기하지 않고 ,성령에 의지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연합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인간이 본디 이기적 존재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타성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서로 사랑이라는 큰 목적지는 분명하게 그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된 주님인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를 공감함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를 나눌 때 새 계명인 서로 사랑을 완성할 수 있게 됩니다.
③ 예수님 희생의 사랑을 받아 하나님 형상의 존엄함으로 살도록 자기의 삶을 세우는 이기심과 다른 사람도 그와 같은 동일한 이기심으로 살도록 존중하는 것이 곧 이타심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비약이 아닌가? 철저한 제대로 된 이기심이 그 자체로 이타심이라는 주장은 유효한가?
하나님 사랑의 은혜안에서 자기를 세우는 이기심으로 살고 다른 사람도 동일한 이기심으로 살도록 존중하는 것이 이타심이라는 말은 너무 흐릿한 표현입니다. 결국 '남 일에 쓸데없이 신경쓰지 말고 너나 잘해'라는 또 다른 표현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그렇게 철저하고 제대로 이기적이어야 이타적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악을 조장하는 이기심의 어두운 부분과 이타심의 본연의 뜻을 모두 생략해 버린 논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타심적인 사람이 남을 자신의 불법적 기준에 의해 판단하고 정죄한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공감은 남의 처지와 입장을 먼저 고려하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만약 자신이 갖고 있는 기준을 남에게 먼저 적용한다면 이것은 이타심이 아니라 지신의 굳은 생각을 앞세우는 포장된 이기심일 뿐입니다.
내 생각, 내 사고, 내 경험에 따라 모든 것이 맞춰져야 한다는 꼰대의 습성이고, 자기중심성이 발현되는 것이고 편협한 자기애에 의한 교묘한 이기심일 뿐입니다.
한편, 상대를 알기 어렵다는 이유로 공감을 포기하고 이기심 가득한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면서 하는 행동으로써 결국 남 신경쓰지 말고 내가 가진 은혜에 충실하고 그것을 내적으로 강화시키는 것이라는 말은 몹시도 피상적이며 공동체성에 대한 망각을 불러옵니다.
그렇게 함으로 남에게 강요하거나 간섭하지 않고도 이티성을 발휘할수 있다는 말은 절반의 진리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통한 죄 용서의 은혜가 있는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무엇을 바라실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하심은 하나님 나라의 공의의 정의, 거룩을 회복하기 위한 사랑의 결단입니다.
우리가 예수믿고 죄용서 받아 구원을 얻고 내세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사는 것이 미치 복음의 전부인 것처럼 이해하고 통용되고 있습니다. 이는 복음을 하나님의 나라 차원에서 보지 않는 몹시도 비좁은 신학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믿음의 시작점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회복이 우리에게 임했으며 주어졌고 맡겨졌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의 영역에서 우리의 큰 노력은 필요없지만,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피로물로서 합당한 존재로 변화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의 완전함은 어려울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려 노력한다면, 이 땅과 인간을 여전히 긍정과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그분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따라가야 옳습니다. 우리는 그 영광의 경계선에서 여전히 씨름하고 축구하고 분투하고 애쓰고 누리는 사람과 공동체가 되어야합니다.
4. 역사성과 초월성 사이에서
역사성은 그 시대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어떤 말씀과 어떤 일을 행하셨는가를 살펴보는 것이고, 초월성은 하나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하여 무엇을 하시고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역사성을 먼저 탐구하고 초월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바른 순서가 될 것 입니다. 똑같은 원리로, 이 역사성과 초월성은 구분할 수 있지만 분리되지는 않습니다. 분리되어 이해되고 적용될때 신앙의 편협과 왜곡이 발생합니다.
이타심은 나를 제외하고 남을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단하게 나를 만들면서 함께 남도 돌아보는 작업입니다. 이타심은 거룩하지 않는 죄인인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에서 큰 동력을 얻습니다.
전적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이타심은 십자가에서 드러납니다. 아들이신 예수님을 죽음에 내놓으시면서까지 하나님은 무엇을 만족시키려 하셨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정의를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공의와 정의의 삶이 생략되지 않습니다. 십자기를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느껴야 하지만 더불어 하나님의 공의의 정의와 거룩함에 대한 가치를 뼈저리게 인식해야 합니다.
인간은 여전히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연약한 존재이므로 죄와 허물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은혜만이 절실히 필요하고 오로지 예수님만 바라볼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 역시 절반의 진리입니다. 그런 우리이기에 예수님께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세상의 창조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으로 이루어졌지만, 세상의 회복은 하나님 말씀 한마디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위에 세우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하나님 자신부터 지키기 위해 십자가를 택하셨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감당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은 바로 이타심의 강력한 증거입니다.
지금의 세상은 물질주의와 돈의 노예가 되었다고 해도 무리라 없습니다. 모든 고상한 가치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황금만능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지독히도 이기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이 이기심의 어두운 부분에 대한 깊은 성찰과 이타심에 대한 바른 이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The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