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하거나 무지하거나
"어느 시대든 짐승의 반역성과 포악성은 달라지지 읺는다" (묵상과 설교 2025년7,8)
내가 본 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한데, 그 발은 곰의 발과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과 같았습니다. 그 용이 자기 힘과 왕위와 큰 권세를 이 짐승에게 주었습니다.
그 짐승은 입을 열어서 하나님을 모독하였으니, 하나님의 이름과 거처와 하늘에 사는 이들을 모독하였습니다.
[계13:2,6, 새번역]
교회내 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는 다양하겠지만, 신앙이나 교회문제 등에 대한 현안에 대해서는 다수가 무덤덤하게 반응하는 것울 보게 됩니다. 즉 그 태도가 참으로 나이브하다는 생각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요즘 '나이브(navie)'라는 단어를 관용어처럼 많이 사용하는데, 이 말은 영단어로 '순진하다', '고지식하다', '세상물정 모른다', '단순하게 생각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나이브♧
(경험이 부족하여 현실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상태, 세상일이나 인간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낙관적이고 단순하게 받아들이는 경향, 복잡한 인간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이해, 사회 문제를 피상적으로만 바라보는 태도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비현실적인 시각)
이를 정리해보면, 나이브한 생각은 곧 현실 인식의 부족, 판단력의 결핍을 의미합니다.
내게 주어진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은 어느 시대나 참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분과 계급에 의해 규정되었던 세상이나 미친 전쟁의 광기에 휘말려 귀한 생명이 소모품같이 스러져간 세상에 비하면 지금은 사회문화적으로 기술적으로 대단히 발전되고 풍요로운 세상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한 올의 희망도 찾을 수 없는 유무형의 고통은, 비록 그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어느 시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인간 내재의 악 뿐만 아니라 세상의 구조적인 악도 언제나 존재해왔습니다. 그리고 악을 은밀하게 조장하는 영적세력이 있고, 그를 추종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오랬동안 악에 의한 고통을 이어받았던 사람들은 용기를 내고 마음을 모으고 작은 힘들을 합쳐 오랜 시간의 도전과 분투와 희생 끝에 마침내 승리를 얻고 변혁을 이루어냈습니다.
세상에 존재해왔고 지금도 다른 모습으로 분장해서 어느 곳에건 뿌리를 내리는 구조적이고 세습적인 악은 늘 악마적이었습니다. 그것은 항상 인간의 사악한 이기심과 악랄하고 냉혹한 자기중심성을 발현시킵니다. 인류역사에 반복되는 차별과 혐오, 폭력과 전쟁은 그것의 현상이며 결과들입니다.
선악과 나무 아래에서 마귀는 순진한 사람에게 속삭였습니다. 이 열매를 먹으면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고,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라고. (창3:4~5) 그들이 과실을 먹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신의 벗은 몸에 수치감을 느꼈고 하나님 앞에서 이를 두려워하였습니다.
이처럼 마귀는 오래전에 인간에게 슬쩍 주입해놓은 사악한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을 하나님께 대적하기 위해 필요할 때마다 끄집어 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게 하고 불신앙의 길을 가게 하는데 이보다 좋은 무기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의 출발은 하나님보다 너 자신을 바라보고, 네 필요를 먼저 챙기고, 네 생각을 먼저 앞장세워라는 말이었습니다. 어느.시대를 막론하고 그 파괴적인 악의 원인은 어김없이 그것이었습니다.
이런 자기 욕망으로부터 출발하는 관점과는 다르게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매우 결여된 반대쪽 상황에 처한 이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남을 해코지 하면서까지 오직 자신만의 만족을 위한 악마적인 삶에서 나오는 모든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문화에 노출된 이들입니다. 그 비정한 사회에 순응하고 버텨내는 것 외에는 아무런 방책이 없는 수많은 이들입니다.
요즘 세상의 판에 박힌 질서와 비가시적이지만 위협적이고 폭압적인 계급성(돈과 권력, 소유와 명예)에서 오는 경직성과 압박감에 시달려온 이 시람들은 요즘 아이돌의 노래가사에 나오는 스스로를 위하고 자신을 먼저 사링하라는 말에 마음을 뺏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이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자신에게서 크게 기대하거나 소중히 다룰 만한 내용이 좀처럼 없다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그러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질서와 체계속에 복속되기를 원하는 연약한 자아를 드러냅니다.
사실 이기심과 자기중심성은 인간이 본디 갖고있는 자연의 본능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없다면 이 세상에서 스스로의 생명을 오래 지켜내지 못할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남을 해하고 짓밟고 제끼고 없애면서까지 채우는 이기심과 남을 무시하고 증오하고 험담하고 거짓말하면서까지 세우는 자기중심성입니다.
이것은 남은 안중에 없는 나만의 세상입니다. 내가 왕 살아먹고 남은 종이 되어야 하는 세상입니다. 내 말이 법이 되어 남을 지배하는 세상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상대를 없애서라도 차지해야 하는 세상입니다. 내가 힘있는 짐승이 되기를 자처하는 것이고 남은 먹잇감에 불과한 세상입니다. 지극히 악마적이고 악마적입니다. 우리가 부르짖는 자유는 이런 일을 마음대로 하는 자유가 되어서는 절대 안됩니다.
역사적으로 세계의 모든 신분제가 이같은 태도를 가졌습니다. 종교적 계급주의도 자본주의도 신자유주의도, 또한 공산주의도 자국보호주의도 이런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들은 모두 '남을 죽여서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말거야' 라는 공통된 목적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정당화시킵니다.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해 돌직구를 던지십니다. "이방민족의 통치자들은 백성을 마구 내리누르고(임의로 주관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리지만,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오히려 스스로 종이 되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마20:25)
또한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줄기차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상대를 존중하고, 약자를 섬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은 바로 이것으로 나타납니다.
♡세상의 모든 생명과 자연을 맡은 청지기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해 자연을 보존하고 사람들끼리 서로 보호해야 하는 책임이 각자에게 주어졌습니다.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사회적 약자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에게 최선의 도움을 베풀고 더불어 살아가는 소망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근간이 됩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며, 공의와 정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래 참고, 친절하고,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고,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성을 내지 않고, 원한을 품지 않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또한,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을 해야 합니다.
악에 무관심한 사랑이 있습니까? 그것은 악을 방관하고 오히려 악을 조장하는 타락입니다. 악을 생략한 무조건적인 사랑은 없습니다. 죄악과 허물을 민감히 여기며 십자가의 보혈로만 덮어지는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대가없는 무조건적인 사링과 은혜와 긍휼도 그분의 선하심과 거룩함의 바탕위에서 흘러나옴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게 완성되어 가는 사랑안에서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1.사악하거나
악은 교묘하고 은밀히 행합니다. 사악함은 무지를 이용해 사람의 마음에 흘러들어와 자리잡고 기회를 엿봅니다. 마땅한 때가 때면 악은 슬그머니 머리를 들고 그 사람의 이기적인 욕망과 자기중심성을 최적의 수단으로 삼고서 하나님의 진리를 왜곡하고, 나이브한 생각을 넣어 무관심과 가짜 평화를 조장하고, 본질보다는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행태에 충성하도록 부추깁니다.
결론적으로는 악은 하나님의 진리에 무지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고 성령의 역사를 혼란시켜 스스로 믿음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조차도 부지중에 반진리를 지향하게 합니다.
그때에 여러분은 허물 및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로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엡2:2)
그랗게 성도들이 그리스도 아래 있지 않을 때에는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다고 말합니다. (엡2:3) 악은 다툼과 층돌과 분쟁의 상황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혼탁시켜 사악한 이기심과 악랄한 자기중심성을 발현시키도록 꼬십니다. 자신의 이익과 필요를 위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 사랑과 상대 존중, 약자섬김의 반대편에 서게 만듭니다.
2.무지하거나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17:3)
사악함은 언제나 무지와 교만을 업고 탐욕과 진리의 왜곡으로 나타납니다. 무지와 교만은 믿음의 겸손함과 순전함을 파괴하고 탐욕과 진리의 왜곡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새롭게 하심의 능력을 무력화 시킵니다.
세상풍조를 따르고 육신의 정욕과 인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진 성도들은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에 '관해' 듣고 기독교 '교리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을 바로 '알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자각하지 못하는 심각한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 그리스도의 마음, 성령의 임하심에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나와 내 가족과 내 교회의 안전과 확장과 풍요와 행복을 위해 분투하는 것이 고상한 신앙의 중요한 단계인줄 착각하고 오히려 자랑스러워 합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고 알게 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에 관심이 없으며, 왜 알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와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같이 말하고 행동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3.지혜롭고 순결하게
보아라, 내가 너희를 내보내는 것이,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과 같이 슬기롭고, 비둘기와 같이 순진해져라. [마10:16, 새번역]
우리가 사악함과 무지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자기인식인 메타인지와 현 상황을 똑바로 읽어내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문법적 역사적으로 바르게 읽어내는 통찰력과 함께 예언자적 상상력도 요구됩니다. 지금은 솔직함과 정직함이 모든 상황을 판단하는 깊은 성찰의 도구로 작용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악마에게 사로잡혀서 악마의 뜻을 좇았지만, 정신을 차려서 그 악마의 올무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딤후2:25-26, 새번역]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맞서 싸우십시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다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벧전5:8-9, 새번역]
우리 예수 믿는 이들은 반드시 공평과 정의, 인애와 사랑이 꽃피는 현재적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이 너무나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실 의와 거룩, 절제와 사랑으로 채색된 부활 이후의 새로운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럴때 우리는 악과 무지에 빠지지 않고 올곧게 하루를 뚜벅뚜벅 당차게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완전을 향한 삶이기도 합니다.
"세상이 쉽게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분투가 결국 세상을 바꾸어왔다"
<오랜 따돌림과 압박속에서도 꿋꿋히 버티어 새로운 변화를 맞이한 어떤 검사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