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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과 비난을 구별하다

강가딘777 2024. 6. 12. 14:27

비판과 비난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굳이 구별해야 할까요? 같은 의미 같지만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비판에서 부정적인 느낌을 제거하고, 남이 아닌 자신의 내면을 향한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비판과 비난을 구별하다


마7:1) 너희가 심판(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심판(비판)하지 말아라
7:2) 너희가 남을 심판(비판)하는 그 심판(비판)으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비판)하실 것이요
7:3)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7:5) 위선자여(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 눈이 잘보여서, 남의 눈속에 있는 티를 빼줄 수 있을 것이다 (새번역)

개역개정 성경에 '비판하다'는 말이 마태7장, 누가6장, 로마서14장, 고린도전서9:3, 골로새서2:16에 나옵니다. 다른 번역본에는 대부분 '비판'이라는 단어 대신 '심판'을 사용합니다. 영어 번역은 거의  'Judge'를 사용합니다. 헬라어 원문으로는 '심판' '판결' '판단'의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교회바닥에서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됩니다. 결코 남을 판단하거나 잘잘못을 따져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순종과 화평이 신자들의 의무적인 태도이며, 불평과 불순종과 의심을 드러내는 그 어떤 비판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당연히 남의 약점, 결점, 단점, 실수나 잘못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거나, 그것을 빌미삼아 상대방의 인격을 침해하거나. 험담하고 비난하고 비방하고 임의의 정죄하는 것은 신앙을 떠나서 공공의 도덕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에서 말씀하신, 남을 심판(비판)하지 말라는 내용은 정말로 '비판'이 악한 행동이므로 절대 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일까요?

헬라어를 직역해보면,
마7:1) 판단(비판)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받지 않을 것이다.
7:2) 너희가 남을 심판할때도 너희도 심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어떠한 척도로 남을 재단하면 너희에게도 그러한 척도로 재단하심이 되리라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면, 똑같은 기준으로 자신도 판단받게 될 것입니다)
7:3) 네 형제 눈속의 티를 보면서 네 눈속의 들보를 어찌 알지 못하느냐?
(다른 사람의 결점을 지적하면서 자신의 큰 결점을 인지하지 못하는 무분별한 행동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남을 평가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돌아보고 반성해야 합니다)
7:5) 위선자여, 네 눈속의 들보를 먼저 빼라. 그런 그때에야 네 형제 눈속의 티를 보고 빼어낼 수 있으리라
(자신의 결점을 먼저 인식하고 반성해야 다른 사람을 비판할수 있습니다. 비판 받지 않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남을 비판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비판받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비판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먼저 자신의 눈속에 있는 들보를 빼기를 원하십니다. 우선 자신을 깊이 살피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지 자신의 삶을 점검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핵심이 되는 5절을 보면,
위선자야(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 눈이 잘 보여서(그후에야 밝히보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새번역)

여기서 외식하는 자, 위선자는 남을 비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의 큰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서  남의 작은 문제에 대해 지적하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자신의 문제를 깨닫고 스스로 깨끗이 해결하고(들보를 빼내고), 흠결이 없음을 인정받을 때(그래야 네 눈이 잘보여서), 남을 향해 겸손히 그리고 진실되게 권면할 수 있습니다.(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다)

사실 그 누가 상대를 비판(심판)할 수 있는 자격이 있겠습니까?

성령의 인치심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은혜를 받은 이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빛과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 아래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면서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죄성과 한계와 부족을 인정하면서 살아갑니다.

한편으로 믿는 자의 유일하며(지금의 저에겐 그렇게 느껴집니다) 최종적인 권위는 성경입니다 . 성도는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을 따라 영적 분별력이 포함된 신령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단지 자신을 위한 회개와 연단과 수양에 그치는 개인신앙이 아닙니다.

지극히 사사로운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고, 발견된 어떤 흠에 대해서 비난, 비방,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서로가 자신의 들보를 먼저 인식하고 그것을 빼내려 분투하는 가운데 바른 신앙의 삶에 대한 서로의 격려와 권면은 공동체에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의 요지는, 남에게서 비판할 거리가 보이거든, 먼저 자신도 더한 문제가 있는지 살피고, 그것을 삶에서 고치고 바르게 한 후에 남에 대해서 참견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이 '비판'이라는 단어는 다른 역본에서는 '심판, 판단, 판결'로 쓰이고 영어역본에는 거의 'Judge'로 쓰입니다. 사람의 유죄를 판단하고, 판결하고, 심판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의견이나 행위에 대해 의의를 제기하여 자기의 생각을 드러내 그 쟁점에 대해 논쟁하고 설득한다는 의미가 담긴 '비판하다' 하고는 다른 의미입니다.

그것은 현재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비판' 보다는 상대방의 잘못과 죄를 공개적으로 선포한다는 뜻으로 '심판, 판단, 판결'이 더 맞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만약 심판하는 사람이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남을 심판한다면, 그것은 모함이며, 거짓증거를 내세우는 것이고, 불의하게 참소하는 것이며, 터무니없는 악평과 비난과 정죄가 될 것입니다.

(눅6:36)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우신 사람이 되어라
6:37) 남을 심판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정죄하지 말아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정죄하지 않으실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6:38) 남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도 너희에게 주실 것이니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고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고, 남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줄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똑같이 대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 한 명의 신자로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인격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우리가 상대방을 함부로 판단해서 정죄하고 몹쓸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인간의 본성상 쉬운 일입니다. 내게 잘못한 사람을 꾸짖고 심판하고 정죄하고 용서하지 않는 것은 사실 우리가 항상 하고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령이 내주하는 사람으로서 이제 그것을 거슬러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심판받지 않고, 정죄받지 않고,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정체성과 가치관을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가야 합니다.

롬14:1) 여러분은 믿음이 약한 이를 받아들이고, 그의 생각을 시비거리로 삼지 마십시오.(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이 본문에 보면,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을 먹었다고 비난하고, 남의 종의 행동에 대해 비난하고, 절기를 지키지 않았다고 비난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이므로, 형제나 자매를 비난하거나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본문의 '비판'을 '시비거리' '비난'으로 대체하는 것이 바른 이해를 가져옵니다. 공개적으로 상대방의 잘못(자신이 생각하기에)을 드러내고, 상대를 배려, 존중하지 않은채 비난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롬14:13)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서로 남을 심판(비판)하지 마십시다. 형제자매 앞에 장애물이나 걸림들을 놓지 않겠다고 결심하십시오.

유대인은 할례법과 정결법, 음식법과 절기규정 등을 통해 자신들의 여호와 신앙을 고수하였습니다. 당시 초대교회에서도 이 유대교 전통을 그대로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류가 있었습니다.

이방신의 제사에 쓰이는 부정하다고 생각되는 음식을 먹거나, 레위기에서 금한 음식에 대해 구별하지 않고 먹는 형제들을 잘못된 신앙행위라 비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롬14장에서 바울은 음식과 절기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신 이들끼리 서로 비난하지 않도록 권면합니다. 옛 전통이 형제 자매에게 장애물이나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마음을 열라고 합니다. 음식문제로 형제 자매의 마음을 상하게 되면 그것은 이미 사랑을 따라 살지 않은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위해 죽으셨음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너희가 좋다고 여기는 일이 도리어 비방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며,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가쁨이라고 말합니다.

(골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일이나 명절이나 초승달 축제나 안식일 문제로, 아무도 여러분을 심판(비판)하지 못하게 하십시오.


비판의 사전적 의미는, 1.잘못된 점을 지적하여 부정적으로 말함 2.옳고 그름을 가려 평가하고 판정함 3.인간의 지식과 사상, 행위 따위에 대한 기원, 타당성, 한계 등을 명백히 하여 평가함 입니다.

비판은 두번째, 옳고 그름을 가려 평가하고 판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교회에서는 첫번째 정의인 잘못된 점을 지적하여 부정적으로 말함으로  받아들입니다. 여기서의 비판은 비난과 심판의 의미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모두가 타락한 불완전한 사람들이었다, 굳이 잘못된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는가, 은혜롭고 소망의  말을 하기도 부족한데 악하고 부정적인 것을 말할 필요가 있는가?

그래서 어떤 합당한 이견이나 꼭 필요한 건의도 비판이라는 굴레를 씌워집니다. 비판이 포함된 성경구절에 대한 그릇된 해석과 이해가 모든 부정적인 느낌의 그 무엇이든 교회내에서 제한할 수 있다는 잘못된 사고를 가져왔습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위의 권세에 굴복하라'는 구절과 함께 교회에서 너무 이상하고 권위적이고 경직된 신앙행태를 세워왔다고 봅니다. 이전에는 그것이 신앙의 마땅한 일이고, 거룩한 교회와 기름부음받은 구별된 목회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태도라고 배워왔습니다.

그 결과 세상에서 일어난 악한 일 뿐만이 아니라, 교회 내에서의 온갖 불의한 일에도 인내라는 이유로 침묵과 방관이 습관처럼 굳어졌습니다. 나쁘게 말하면 무조건적인 비판금지와 계급질서에 대한 맹종이 교회의 종특이 되다보니 이제 한국사회는 교회들을 더이상 신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정능력이 급격히 나락으로 떨어지고, 신앙의 본질에 대한 성찰을 전혀 하지 못하는 신자만을 양산하기 때문입니다.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에 개구리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모르듯, 교회가 여전히 자신의 상태를.모른다는 것이 큰 비극입니다.

참다 못한 사람들이 제대로 된 교회를 찾아 정든 공동체를 떠나고, 모든 희망을 잃고 가나안 성도가 되기도 하고,  성경을 알고자 나섰다가 미혹당해 이단 사이비 종교로 빠지기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말합니다. 시대가 악하기 때문에 우는 사자처럼 다니는 사단과 악한 영들이 영혼을 멸망의 길로 가게 만들고 오늘날이 바로 그런 시간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예정론을 신봉하는 개혁주의자들은 어떤 상황에도 구원받을 사람은 구원받기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악합니다. 인간의 본성도 기본적으로 악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하나님께 나갈 자격을 얻었고, 성령의 능력으로 악한 세상에서 악한 본성을 거스르고 거룩한(공의와 정의, 자비와 사랑의)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새로운 정체성과 가치관을 가진 성도가 되었음을 잊으면 안됩니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절대적 주권에 대한 깊은 믿음에서 나온 생각이라는 점에서 동의는 됩니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고백에 대한 차원이면 충분합니다. 더 이상의 논쟁은 소모적이고 불필요합니다. 성경의 몇 구절을 가지고 예정론이 명확하다고 주장하면서 그걸 가지고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삼는다면, 그것이 성경이 그리는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의 통일성과 균형과 신앙의 본질을 무너뜨리는 원인이 됩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형제들을 만난 후 그동안의 고난이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큰 구원을 베푸셔서 많은 생명을 지키기 위함이었다는 고백을 기억하며 예정론을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정해졌다는 이중예정은 지나친 생각입니다. 생각해서도 안될 잘못된 사고입니다.

이 이중 예정을 따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생각해보십시오. 먼저, 사람에 대한 깊은 연민과 사랑이 더 이상 의미없어집니다. 지옥의 땔감이 되기로 예정된 사람에 대한 작은 동정도 사치일 뿐입니다.

또한 이것은 사람들의 모든 행동과 삶의 모습을 결국 구원받을 사람이었다는 증명거리로 삼게합니다. 행위구원을 그토록 증오했던 사람들이 예정론을 따른 구원의 확증에 대한 내적 불안감 때문에 오히려 삶의 결과들을 구원의 증거들로 내세우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게 지금의 교회 현실입니다.

이런 사실을 조금씩 깨닫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마음(mind)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의 바램도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류사회에서는 여전히 '너나 잘 하세요'라는 절반의 해답만이 주어집니다.

비판하지 말고, 누구나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한다는 구절이 어떻게 이용되는가를 살펴보면 그것이 신앙에 꽤 심각한 유해를 끼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과 교회의 온갖 불의와 부조리, 악한 구조와 상황에서 억압받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한 저항과 거부와 항의 조차도 성경에서 지지하지 않는다는 근거로 삼습니다. 그로인해 교회의 바른 개혁과 변화와 정의를 세우는 일에 언제나 소극적이게 만듭니다.

성경의 말씀들이 본문의 문맥과 내용이 무시된 채 문자 그대로, 경우에 따라서는 자의적으로, 또는 취사선택히여 해석되고 사용되다보니, 영혼구원을 강조하며 어떤 부정과 불의에 침묵하고, 세워진 권위에는 철저한 무소불위함을 허락하고, 어떤 변화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에서도 구체적인 해결책에는 손을 놓게 만드는 마법같은 일들이 무수히 발생되게 합니다.

그런데 자기들과는 결이 다른 사람들이 권위있는 자리에 올라가면, 그동안 고수했던 정교분리를 던져버리고 이제는 반대의 자리로 몰려가는 재미있는 일이 우리 주변의 모습입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을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교회의 간판을 걸고, 그들만의 신학이론을 걸고 한다는 것입니다.


결론)

'비판하라'는 단어는 '판단' '판결' 심판'으로 대체해야 합니다. '심판'은 그 사람에 대해 유죄를 선고하는 것이고, 공적인 자리에서 죄있음을 판결하여 공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기준에서 그 사람을 정죄할수 있다고 생각하여 공개적인 자리에서 그 사람을 심판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부족할 뿐더러 자신의 무고함를 주장할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방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먼저 상대방의 생각을 들어보며 대화와 토론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비판은 비난과 정죄와는 다르게, 어떤 사안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상대에게 적절한 변론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렇게 나온 대립되는 생각을 가지고 적절한 공론의 장이나 책임있는 평가나 판정이 가능한 그룹에서 그것들을 처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1. 옳고 그름을 가려 평가하고 판정하는 것이 비판이라고 하면, 과연 누가 완전한 심판관 역할을 할수 있을까요?

성경은 유일하고 최종적인 심판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법과 원칙과 양심에 따라 사람을 합리적으로 판단한다고 해서, 그것이 완벽할 것이라는 생각은 내려놔야 헙니다.

2. 비판이 옳고 그름을 평가하고 판정하는 것이라 하지만, 사람들은 어떤 사안이나 행위를 판단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결국 합리적인 비판이라 할지라도 평가과 판단의 영역에서 정죄와 심판의 단계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비판은 개인적인 판단으로 나온 반대되는 의견을 어떻게 표현하고 전달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것은 지적하고 정죄의 마음을 내려놓고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합니다. 적절한 때와 상황에서 공격적이지 않고 무례하지 않은 온유하고 친절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진지한 대화와 토론을 이끌어줄 수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적절한 장소에서 이뤄져야 합니다.

3. 우리는 무분별하고 증거 없는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그것은 합리적 비판보다는 비인격적 비난이고, 사랑없는 비방이고, 관계를 파괴하는 험담이 되고, 신뢰를 깨뜨리는 잘못된 정죄가 될 뿐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비판을 악한 것으로 거부해서는 안됩니다. 분명한 불의와 부정과 악행이 보이는데도 '비판금지'가 성경의 명령으로 곡해하여 비판 자체를 불신앙으로 치부하는 것은 또다른 심각한 문제를 가져옵니다.

4. 우리는 심판자가 아닙니다. 세상과 사람은 여전히 악과 죄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판이나 심판할때 자신을 먼저 살펴야합니다. 그렇다고 비판 자체를 금기시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시는 자비와 용서와 긍휼과 사람의 은혜안에서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펼치시는 거룩하고 선한 하나님을 기억하고 모든 악과 죄에 대한 민감성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럴때 올바르고 적절한 비판이 당연히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