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28:20,새번역)
요즘의 신자들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무엇인지를 고민하지 않는 듯 보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을 이미 교회에서 모두 배웠고 다 알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신자들은 대부분 기독교 신앙의 기본이 되는 4영리 정도를 알고 있을 것입니다.
4영리는,
1.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2. 사람은 죄에 빠져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 수 없고, 또 그것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3. 그라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람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길입니다. 당신은 그를 통하여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게 되며,또 그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4. 우리는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각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게 되며, 또 그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런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찬국에 간다, 이 정도가 4영리를 통한 기독교 신앙의 일반적 정의로 생각합니다.
한편 구원에 대한 사람의 자유의지를 강조했던 알미니안 주의를 반대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의한, 개혁주의 5대 강령도 있습니다. 전적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뜻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항상 설교를 통해 듣는 것처럼, 오직 십자가 복음, 그리스도를 통한 죄사함의 은혜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마치 그것만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다양한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풍성하게 존재함에도 오늘날의 많은 교회는 굉장히 협소하게 선택적으로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그리스도로 인한 죄사함의 은혜와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개혁주의는 인간은 완전히 타락해서 스스로를 구원할 아무런 능력도 없다는데서 출발합니다. 완전 타락하고 완전 무능력한 인간이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고백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지만, 현실은 죄에 빠졌던 옛사람의 잔재가 남아있음으로 여전히 악의 영향을 받으며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부터 강조되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 자비와 긍휼은 십자가에서 이제 완전히 새롭게 인식된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태생적인 유약함과 여전한 악한 본성으로 기인한 이 땅의 정의롭지 못함, 불공평, 부조리, 구조적 불의, 도덕적 타락은 십자가의 피흘림뒤에서 항시적으로 용서받을 항목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오늘의 교회는 사탄이 악과 죄를 통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지식은 가르치지만, 그것을 영적인 싸움으로 권장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신자들의 반응도 시들해졌습니다.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영적인 싸움은 사실상 자신의 생활에 대한 올바른 각성 정도로 그치는듯 보입니다.
지금의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처럼 보이는 가치는, 대놓고 주장하지는 읺지만, 하나님의 복으로 주어지는 현세의 풍요입니다. 세상의, 현실의, 물질적인 풍요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구원의 확증과 결과이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누릴 분깃이라는 생각이 교회안에 비집고 들어왔음을 도저히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의 교회가 왜 이렇게 볼성사나운 모습이 되었을까를 곰곰히 생각해봅니다. 이것은 교회가 추구하는 중요한 신앙의 가치를 무엇으로 두는 지를 살펴보는 것과 일맥상통 합니다.
인간의 공로와 행위에 의한 구원에 방점을 둔 가톨릭에 대한 반작용으로 태어난 개혁주의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최우선으로 강조해야만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들풀처럼 독버섯처럼 생겨난 숱한 이단과 사이비 종교들을 상대하기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보다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완전성과 유일성에 대한 신념이 더욱 필요했습니다.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대한 극적인 이해로서 이중예정이라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로 인해 불안한 구원에 대한 확증이 필요했고, 그것은 의도치 않게 자본주의 정신을 만들었습니다.
온라인상에서 근대 자본주의의 태생에 대한 기독교적 자부심을 깅조하고, 자본주의를 기독교와 분리할 수 없는 당연한 가치로 가르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자본주의가 망해야 할 마르크스 주의의 완전한 대척점에 서 있다고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경직된 사고라고 봅니다.
교회내에서의 집단적 예식과 신앙의 형식에 대한 헌신만 있으면 교회밖 생활은 무척이나 느슨한 가톨릭에 반해, 개혁주의는 모든 영역에서 개인적인 철저한 신앙의 구도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개혁주의의 실제 모습은 그토록 터부시했던 가톨릭과 별로 다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절대적 주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되신 교회에 충성하고, 담임목회자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교회에서 제시하는 모든 신앙의 틀에 맞춰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받기로 예정된 이들의 모습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또한 교회 밖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직업을 하나님이 주신 소명으로 여겨 절제와 금욕, 근면과 합리적인 사고를 통해 자연스럽게 자본을 축적하게 됩니다. 의도치않게 결과적으로 교인으로서 세상의 권력가와 자본가와 성공자는 구원의 확증을 얻은, 예정론에서 말하듯 창세전에 구원받기로 예정된 사람이 됩니다.
본질을 지켜내기 위한 형식이 필요합니다. 속을 보호하는 것은 겉입니다. 알맹이는 껍질이 있어야 유지됩니다.
사람의 어리석음과 한계 탓일 수 있습니다.
늘 망각은 역사에 반복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형식만 남고 본질은 사라집니다. 겉을 속보다 중요시여기기 시작합니다. 껍데기가 알맹이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 환원 됩니다.
주객이 전도되는데도 전통이라는 강력한 수단이 사림들을 거기로 끌고갑니다.
형식이 본질의 자리을 차지하고, 겉을 속보다 앞세우고, 껍데기로 알맹이를 대체합니다.
형식을 지킴이 본질을 살아냄이라는 공식에 매몰됩니다. 그러다보니 형식을.지켜냄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떤 본질을 위함인지에 대힌 숙고가 사라집니다. 우리가 지금 딱 그.자리에 서 있습니다.
[마28:18-20, 새번역]
18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