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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를 길들이는 사람

강가딘777 2024. 3. 10. 16:45

혀를 길들이는 사람 (약3:1-12)
2024.3.10.주일

((( 길이 사람의 삶을 바꿔놓는다.  입에도 길이 있다. 혀는 지옥불과 연결되어 있다. 옛사람의 혀의 뿌리는 지옥불의 대로에 연결되어 있다. 그 대로를 차단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십자가 보혈의 공로에 힙입어 하나님 찬양하는 길을 우리 혀 안에서 넓혀가고, 지옥불에서 나오는 악한 길을 차단할 수 있다. 십자가 은혜로 지옥의 샘을 막고 천국문에 이르기까지 찬송의 샘을 열기 위한 길닦는 공사를 쉬지않고 해야한다. 찬양의 샘을 하늘나라 생명샘에 연결해야 한다.

우리의 혀가 주 예수님의 혀를 닮아가야한다. 사랑과 위로, 격려를 담은 혀, 예수님의 지혜와 축복이 담긴 예수님의 혀처럼 늘 말해야 한다. 혀와 연결하여 천국의 샘으로 우리 영혼과 인격이 연결된다면, 우리 혀의 말이 권능의 말이 될 것이다. 그것은 죽은 영혼을 살려내고 아픈 영혼을 치료해내는 축복의 혀, 아름다운 혀다.

복음의 은혜로 혀를 제어하고, 우리 입과 혀에 늘 하늘길 대로를 닦는 축복의 사람, 하늘샘 깊은 곳으로 혀의 길을 닦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한다.)))

본문에 나온 단어중에서 '길', '지옥불', '찬송'을 '샘'이라는 단어와 조합해 설교가 이루어진다. 입안에 두가지  대로, 두가지 샘이 있다는 것이다.

본문에 대한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또는 알레고리적 해석은 불가피하다. 대부분의 설교는  자신이 가진 신학적 기초 위에서 상상력과 아이디어, 인사이트가 주쟈료가 되기때문이다.

한편 피상적이고 추상적이며 모호하게 영성화된 해석은 나중에 실제 무얼 해야할지를 모르게 한다. 이것이 영적이고 복음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의 말씀이냐고 물어본다면 아니라고 말해야겠다.

혀는 능히 <>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약3:8)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약3:6)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약3:9)


성경 본문의 문맥을 따라 읽고 역사문법적 읽기를 훈련하면 그동안 들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르고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성경을 진짜 존중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첫번째 일이라는 생각이 더욱 뚜렷해진다.

야고보서는 루터로부터 지푸라기 서신이라는 끔찍한 대우를 받았다. 가톨릭교회의 행위와 공로사상과는 정반대의 입장인 이신칭의가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행위를 강조한  야고보서는 루터에게 매우 매우 언잖았을 것이다.

야고보서는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가장 중요하다고 부추기는 책은 아니다. 믿음을 입술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실제 삶에서 믿음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음을 지적한다.

앞선 두가지 전제를 기억하자.
1.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약2:26)
2.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약1:19)

행함은 믿음의 열매를 확인하는 것이다 실제 삶의 변화를 증명하는 것이다.

듣기보다 말하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의 지식, 경험, 성취를 지랑하는 사람이다. 남보다 자신이 더 낫다고 여기는 사람이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따르지 않으면 남들을 향해 쉽게 화를 낸다. 결국 이 사람은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세상이 자신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한편 자신의 이름을  남들에게 인정받고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을 분명하게 알고 믿는 것은 하나님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 삶속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이웃사랑은 남에 대한 진실한 공감으로부터 시작한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약 2:8)

본문 첫 구절은 가르치는 선생이 되는 것을 쉽게 생각하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더 큰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생을 포함해서 누구라도 말 실수를 저지른다.

이는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15:14)', '믿는 작은 사람 가운데 하나라도 걸려 넘어지게 하면(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고 하신(마18:6)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 본문은 혀를 길들이고 적절히 통제해서 거친 말 대신에 부드러운 말, 은혜롭지 못한 말 대신에 인격적인 말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게 아니다.

지옥 불의 대로와 하늘의 대로, 지옥의 샘과 찬송의 샘, 생명샘과 천국문, 하늘샘 깊은 곳으로 혀의 길을 닦는다, 이런 기독교적 색채를 지닌 매우 자의적인 표현들을 들을 때미다 친숙하고 신비롭고 은혜롭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표현들은 교회의 은사주의 열풍이 지나가면서 지극히 피상적이고 몽환적으로 다가온다. 각자의 집에 돌아갈 때 실제 무엇을 들었는지 금방 잊어먹고 휘발되어 버린다. 물을 움켜쥘 때는 기뻐하지만 곧 손바닥에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듯이.

성경의 말씀들은 천상의 용어들로 이뤄지지 않았다. 생생한 역사안에서 특정한 상황에 놓인 특정한 사람들에게 일어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현실의 이야기들이다.

물론 성경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다룬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성경의 내용 하나하나가 명제적 영적 진리를 말하지 않는다. 또한 성경의 엑기스를 빼낸 기독교 교리의 렌즈만이 성경을 보는 유일한 틀이라는 믿음은 우리 신앙을 아주 편협하게 만든다.


지금 야고보서의 문맥의 흐름은 '믿음'을 말하는 '혀'와 그 믿음을 보여주는 '행동'을 대비시키는 빌드업을 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 혀는 믿음만을 말하는게 아니었다. 신성한 믿음의 고백을 했던 그 입으로 남을 정죄하고 비방하는 말이 동시에 나오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는 것이다.

'혀는 큰 불이요 불의의 세계'(약3:6)로 우리 몸의 지체지만 온 몸을 더럽히고 지옥 불을 가져오는 것이다. 사람의 혀는 아무도 길들일수 없고, 쉬지 아니하는(걷잡을 수 없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다.

마음에 숨겨진 어두움으로부터 나오는 악한 것들이 입을 통해서 나오고, 그 말들은 사람을 쉽게 규정지어 버린다. 악한 말의 무서운 힘은  관계를 파탄으로 이끌고 온 인생을 파멸시킨다. 독이 든 말은 온 세상을 떠돌면서 악을 부추기고 남을 죽이는데 앞장선다. 그것들은 결국 믿음의 삶까지도 오염시키고 파괴한다. 결국 혀 스스로 멸망으로 향한다. (이것이 혀가 온 몸을 더럽히고 인생을 파멸시키고,  불의한 혀도 지옥불에 불살라진다는 의미가 아닐까?)

말들의 입을 재갈 물리고, 작은 키로 배를 조종하고, 작은 불이 큰 숲을 태우는 것은 작은 혀의 엄중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도 복음서에 동일한 말씀을 하셨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11)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은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15:18~20)

혀(입술, 말)는 이중적이며 모순적이다.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한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온다. 그러나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이 나오고,  무화과 나무가 감람나무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 나무를 맺을 수 있는가?

지혜의 원천이신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왜 선한 삶을 살지 못하는가? (약3:13) 왜 한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내는가?

혀는 상징적인 악의 통로다. 마음의 악을 발현시키는 스위치다. 믿음을 입술로 고백함으로 의롭다함을 자랑했지만, 똑같은 입술에서 어떻게 악이 나올 수 있느냐를 묻는 것이 본문의 핵심내용이다.

악은 혀에만 머무는 게 아니다. 악은 혀를 통해 말에 실리고 그 말은 사람의 중심을 맹렬히 공격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을 적대시하고,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웃 사랑의 명령을 무시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에 반기를 드는 행위로 이어지게 만든다.   패역한 삶은 진정한 믿음을 의심할 수 밖에 없게 한다.

야고보서는 '바울의 이신칭의 진술에 대한 신자들의 오해를  바로 잡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의 의로운 삶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 이상한 현상에 대해 당혹해하는 것이다.

왜 그들의 혀는 상반된 말을 내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1) 너의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경쟁)이 있기 때문이다. (약3:14)

스스로를 자랑하고 주님이 분부하신 진리(하나님사랑, 이웃사랑, 서로 사랑)를 거슬러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것은 땅에 속한 것이고, 육신에 속한 것이고, 귀신(악마)에게 속한 것이다. 시기와 다툼(경쟁)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한 행위가 있다.

(위에서 오는 지혜는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한 열매, 편견과 거짓(위선)이 없다) cf.성령의 열매

2) 싸움과 다툼은 정욕(육신의 욕심) 때문이다. (약4:1)

자기이익, 자기의 쾌락을 위해서 구하면 결코 바른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3) 두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다. (약4:8)

세상과 벗하고, 세상과 친구가 되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 믿음이 있다 말하지만 세상 가치관이 삶의 중심이 된 사람의 믿음은 헛된 것이다. 하나님께 복종하여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감으로 죄를 멀리하고, 마음을 성결하게 하기를 삶에서 '행해야' 한다.

또한 독한 시기와 다툼으로 서로를 비방하고 판단하고 있다. 모든 판단과 심판은 오직 하나님께 맡겨라.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다.

너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 너희 생명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 허탄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해야 할 선한 일을 알면서 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에게 죄가 된다. ( 약4:17)



*****더 생각해보기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이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줄 아느니라 (갈2:16)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하노라 (롬3:28)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약2:21-24)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약2:22, 새번역)


"바울은 모세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의식행위, 특히 할례가 이방인들을 의롭게 만들어 주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행하신 것을 믿는 믿음만 필요하다. 이런 믿음은 삶의 의무를 수반한다.

야고보서의 저자는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성적으로 예수를 믿고 있으나(심지어 마귀가 믿을 수 있는 것처럼, 약2:19), 믿음을 삶의 실천으로 전환시키지 않았던 사람들을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야고보서의 저자는 그들의 행위(율법에 묘사된 의식 행위가 아닌, 사랑을 드러내는 행동)는 믿음과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견해는 바울도 동의하는 것으로서, 그의 서신에서 활동을 강조하는 "명령적인" 단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만약 야고보서의 저자가 로마서를 읽었다면, 그는 바울과 자기 자신은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살라고 하신 삶을 수반하지 않는, 믿음을 통한 칭의를 선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더 논리적이다. 곧 야고보서가 기록될 때, 바울의 진술은 문맥에서 벗어나 되풀이되었고 수정이 필요할 정도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야고보와 바울은 많은 동일한 단어들을 기본적으로 사용했지만 이 단어들을 서로가 아주 다르게 사용했고, 실제적으로 동일한 관심사를 말하지 않았다.

(간추린 신약개론,레이몬드 E.브라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와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서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갈5:6)

그리스도 예수안에서는,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갈5:6, 새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