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의 문제>
거리마다 십자가 불빛이 스산하게 비추인다. 한국교회는 전세계 개신교 역사상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냈다. 적은 떠돌이 민족의 신이 이제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메시아를 낳았고 온 세계의 주류 종교가 되었다. 유블선의 한반도 땅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져 신분과 성별을 뛰어넘는 구원의 역사가 펼쳐졌다. 종교가 흥황하는 좋은 토질을 가진 한국 땅의 기독교는 신분제의 벽에 절망했던 이들에게 빛을 비추었고, 나라잃은 민족의 설움을 달래주었고, 전쟁으로 온 국토가 파손되어 극심한 가난으로 내일을 약속할 수 없었던 국민들에게 희망과 풍요를 전도하였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새벽부터 교회로 가서 하나님께 끊임없이 매달렸고 풍요와 성공과 승리를 기원하였다. 귀찮게 매달리는 기도자들에 시달린 재판관 하나님은 그들의 소원을 어느 정도 들어주셨다.
그로 인해 서서히 자신감을 회복한 가난한 성도들은 꾸준한 경제성장과 함께 강한 교육열로 아직도 전쟁에 대한 긴장감을 유지중인 반쪽짜리 나라가 문화와 경제를 선도하는 나라가 되게 하였다.
개교회주의
교회는 진짜 문제는 성공과 풍요가 넘칠 때 시작된다. 목회자들이 청춘을 바쳐 이룩한 교회는 개인의 소유물이 되었고 더 이상 교회는 하나의 우주적 교회의 일원으로 작동되지 않았다. 각자도생이라는 진화론적 사고가 교회에 적용되는 것이 바로 개교회주의다. 성도들도 자기 교회와 담임목사에게 충성하는 것을 믿음으로 여기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범위를 현저히 좁혀버렸다.
기복주의
모든 목회자는 대형교회를 꿈꾼다. 그들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 이상한 목표를 품고 모든 조직원들의 일치단결을 선동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현세의 복과 내세의 복을 약속한다.
또한 오래전부터 들려오는 괴이한 표현인 '물권', '영권'을 받는 복된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현혹한다. 영적인 능력을 통해 내세천국행 입장권을 확보하고, 물질적인 능력을 통해 현세에는 부유하고 이름을 날리고 높은 자리에 서는 것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 성도의 모습이라고 천명한다.
사람들이 현실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필요를 따라 복을 구하는 것은 극히 인지상정이며 당연하며 비판할 수 없다. 그러나 신앙의 열매가 부자가 되고 성공의 신화를 이루고 남보다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이라고 부추기는 것은 나쁜 기복주의다. 기복주의는 믿음을 빙자해 이기적인 욕망을 투사하게 하고사사로운 탐욕을 채우는 것이다. 이는 맘몬을 섬기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
성직주의
한국교회는 언잰가부터(처음부터 였을지도) 성직자와 일반 성도를 나누었다. 그것에 의하면, 성직자들은 특별하고 성도는 그렇지 않다, 성직자는 주님이 쓰시는 사람들이고 성도는 그렇지 않다, 성직자들은 기름부음을 받았고 성도는 아니다. 성직자들은 주님의 종이지만 성도들은 아니다.( 성직자들의 종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성도를 구별하고 분리시키며 계급을 조장하는 것은 결코 좋은 전통이 아니다. 오히려 악하다 할 수 있다. 이것이 주는 폐해는 많지만, 기독교의 역사는 규모와 질서를 위함다는 명목으로 이 성직주의를 꾸준히 지켜왔다.
<우리의 대응>
우리는 이제 성경과 신앙을 놓고 무엇을 할 것인가? 기존의 전통적 유산을 다 몰아내고 완전히 새로운 것을 세우자는 것은 요즘 흥왕하는 이단과 사이비종교에 흔한 일이다. 그들은 기독교의 본질과 뺘대마저 저버린 새로운 종교를 마치 새롭고 진정한 기독교 인양 내세운다. 기독교의 탈을 쓴 그것은 악한 영들이 허락한 능력과 신비주의를 통하여 기성교회에서 희망을 찾지 못한 많은 이들을 꾀어내는데 성공한듯 보인다.
자세히 보라. 그들의 끝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들이 수많은 보기좋은 열매들로 포장을 한다 해도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적그리스도임을 숨기며 광명의 천사인양, 보햬사 성령으로, 예수의 영을 입은 재림주님으로 위장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짐승과 용과 거짓예언자의 나타남이다.(계11장, 13장, 17장)
한편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기보다는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말이 있다. 교회의 개혁이 요구되는 사회적 변화의 바람속에서 옛 부흥의 기억을 되살려 좋았던 시절로 회귀하고자 하는 세력이 있다.
이들은 기성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면서 다시 성령 운동을 통해 기도와 말씀 중심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성령의 은사를 통해 인간의 세속성과 실존의 한계를 극복하고 더 높은 신앙의 참모습을 찾으려 한다.
성령운동이 결국 파국에 이르는 것은,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을(고전2:4) 간절히 고대하며 시작한 성령운동이 희한하게도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목적이 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기도와 말씀과 예배가 수단으로 전락하면서부터이다. 주객이 전도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사사로운 욕망이 성령운동에 혼합되면서 성령의 거룩성과 새롭게 하는 능력조차도 남보다 더 낫고 더 높은 명예를 위한 내 소유의 달란트 쯤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 그릇된 이해가 주객전도의 한 몫을 담당한다.
사람은 언제나 뭔가를 선택한다. 그것이 바른것이지 그른 것인지는 당시에는 잘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잘못된 선택에는 대가를 지불한다.
개교회주의, 기복주의, 성직주의라는 잘못 짜여진 틀 안에서 여태껏 살아온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올바른 변화에 이르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