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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강가딘777 2023. 6. 1. 13:46

사랑은 온유하며 (고전13:4~7) 2023.5.21

< 설교 요약>

성경이 말하는 오래 참음은 운명에 눌려서 그저 참는 것이 아니다.

오래 참음의 원리: 깎이고 깎으면서 참아야 한다.
오래참는 인내가 나를 깎아내는 과정이면서 상대를 깎는 과정이기도 해야 한다. 서로 안맞는 면이 있을때 참으면서 나를 깎고 상대도 깎아야 한다. 안맞는 부분이 있을 때에는 너그럽게 수용하면서 참아줘야 한다. 그러나 한없이 참기만 해서는 안된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도록 서로 깎아내야 한다.

더러는 자신을 먼저 깍지 않고 네가 깎여야 한다고 하기도 한다. 한쪽은 자신을 깎는데 상대는 안깎는 것도 문제다. 제대로 안깎으니까 상대를 찌른다. 상대와 함께 주님께 맞추기 위해서 먼저 나를 깍아야 한다.

사랑은 온유하며

주님에 맞추기 위해서 나를 깎아내는 과정에 있는 사람은 온유함 가운데 있게 된다.
주님 바라보며 참게 된다. 주님 바라보면서 내 톱니를 온유한 톱니로 깎아가는 것이다.
자신만 돌아보다보니 자기만 깎아가는 소극성도 피해야 한다. 주님이 하셔야돼..하면서

나부터 주님이 깎으시도록 내어드리면서 온유한 태도와 말로 오래참는 것이다.
상대도 주님앞에 깎이도록 적극적인 도전을 온유함으로 해야한다. 비난과 정죄, 화내는 말로 하지 않고 온유함으로 하기 위해 씨름하는 것이다.

포기하지 않고 주님앞에서의 믿음의 싸움을 이어가야 한다. 영적인 전쟁이다. 기도뿐 아니라 사람들과 부딛히는 가운데 인격과 품성을 깨트리고 깎아가도록 주님께 온전하게 빚어가도록 내어드리는 것이다. 주위의 사람들도 깎여가도록 섬기는 것이다. 자신을 깎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니까 상대방을 쉽게 비난할 수 없다. 겸손하고 온유하게 온전한 한 몸을 이루도록 주님의 보좌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주님 사랑으로 깎이고 주님께 맞물려 돌아가는지 늘 점검해야 한다. 시기심과 자기자랑과 교만으로 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봐야 한다.
시금석은 온유함을 드러내느냐이다. 온유함을 내 표정과 말과 삶에 나타내고 있다면 주님앞에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나를 깎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화내고 비난하고 정죄하고 다투고 있고 자랑하고 있다면 주님앞에 나를 깎아가는 것도 주님의 사랑으로 상대방을 깎아가는 것도 아니다. 자기를 깎아가는 것도 온유하게 해야 한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율법적인 행위로 은유를 생각하면 안된다. 성도의 사랑은 보좌의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사랑의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여정이다. 하늘의 온유를 품으신 분이 어깨를 같이하며 나와 함께 걷자 하신다.
온유하신 주님과 함께 걸으면서 그 온유를 묵상하고 느끼고 경험하고, 누리는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성경의 윤리적인 요구들 대부분이 결국은 주님과 우리가 함께 동행하면서 그분을 배우고 그분을 누릴까 그분을 반사할까를 말씀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향한 주님의 온유를 내가 누리는 과정이다. 사랑을 향한 내 삶의 여정은 주의 온유하심을 맛보고 누리고 기뻐하는 과정이다. 주님을 더 배우고 더 알아가고 닮아가는 과정이다.

그 온유가 무력해보여도 보좌의 주권자이신 주님을 향한 사랑의 걸음이기 때문에 더디고 느릴수 있지만 하나님나라의 권세와 힘이 반드시 나타난다. 그 믿음으로 주님안에서 영적인 선한 싸움을 이어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선한 결과, 복과 부유하심으로 갚으신다.
<END>

<질문 해보기>

1. 오래참음의 확장된 의미인 "나를 깎고 상대를 깎는 것"(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도록 서로 깎는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다는 것인가?

2. 기준이 되시는 주님께 맞추고 깎는 사람은 참고 온유함가운데 있게 된다, 주님이 깎으시도록 내어드리면서, 상대도 주님 앞에 깎이도록 적극적인 도전을 온유함으로 해야한다. 어떻게? 무엇을?

3. 표정과 말과 삶에 온유함을 드러내느냐가 자신을 깎고 있다는 시금석이라 했는데, 경험상 이 말은 절반만 맞는것 아닌가?
사기꾼들처럼 표정과 말이 온유한 사람도 없다. 흉악범들 중에는 그처럼 선한 사람이 없다는 주변의 평가를 받는 사람이 많다

4. 예수님은 스스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는데, 이 말이 표정과 말의 온유함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느냐?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마12:34, 새번역)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 (마23:33, 새번역)

5. 주님의 온유하심은 표정과 말로 온유를 설명하기보다는 끝까지 우리를 참으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동의어로 설명을 해야 훨씬 납득이 되지 않을까?

하나님께서는 이 예수를 속죄제물로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피를 믿을 때에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심으로써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롬3:25, 새번역)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실증하셨습니다. (롬5:8, 새번역)

6.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을 배우고 그분을 누리는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통해서인가?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마7:21, 새번역)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28:20, 새번역)


<다시 생각해보기>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롬5:20, 새번역)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무척이나 심각했습니다. 전혀 교회답지 못한, 은혜와 기쁨이 넘치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사랑에 뿌리내린 교회의 정체성을 망각헸습니다.

문제들)
*파벌을 나눠서 다툼 -  성령으로 하나되지 못함
*저녁 만찬시 음식을 먼저 먹음 - 서로를 돌아보지 읺음으로 교회를 멸시함
*신자들간의 법정소송 -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에 순복하지 않음
*음행 - 아버지의 아내를 취함 - 공동체의 거룩함을 더럽힘
*우상숭배(+음식문제) -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음
*성령의 은사의 무질서(은사의 등급화.여성은사자의 무분별함) - 공적은사의 사사화, 은사에 대한 심각한 오해

문제들의 원인은 세속적 욕망과 세상의 가치들이 여전히 교회 안에서 작동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피의 구속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백성이 된 성도들이 모인 교회의 모습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고린도교회을 향한 이 편지에 분통과 애통의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촉구한 전도자 바울의 심정이 녹아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전제 하에서 고린도서를 읽어야 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전체적인 맥락으로 이해하지 않고 특정 단어나 구절만으로 지엽적이고 단편적으로 이해하면 성경의 본 의미와 완전히 동떨어지게 됩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교회의 어지러운 모습을 보면서 바울은 예수님의 새 계명인 '서로 사랑하라'를 끊임없이 되뇌이고 되뇌였을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 보여준 사랑에 대한 놀라운 표현들을 이런 교회의 어지러운 상황에 비추어서 이해해보면 어떨까요?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이 사람들을 쉽게 정죄하여 내치지 않고 오래 참으십시오. 비난과 분노의 감정을 떨쳐버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대하십시오.

더 나은 지도자 편이라고, 더 높은 은사를 가졌다고 자랑하는 이들을 시기하지 마십시오.

대가나 노력없이 받은 은사를 자랑하지 말고, 더 나은 위치에 있다고 상대를 깔보는 교만을 버리고, 남을 돌아보지 않는 이기심을 버리십시오.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대하지 말고 분을 품지 말고 원한을 갖고 대하지 마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불의에 대한 타협은 있을 수 없으며, 바른 진리를 위한 열정을 늘 간직하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고난당하신 주님을 생각하며 참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선하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우리는 지속적인 성령의 임하심과 도유심을 바랄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으로 인하여  그 어떤 것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무엇이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를 실체적으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우리는 사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온 삶으로 따르는 사람이 되어갑니다.
(고전13:4-7)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들은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이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우리가 쉽게 할 수 없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언제나 꿰뚫어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들을 향해 명령하십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당신들의 정체성은 어떠한 것인지를 다음처럼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고전3:16, 새번역)

바울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믿음으로 하늘에 쌓아두는 구원의 소망"을 선언하면서 고린도교회를 왼전한 사랑으로 다시 바르게 세우고자 합니다.


(ps.사설)
몇 년전만 해도 이런 저런 설교에 적지 않은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압니다. 그것이 약간의 시간만 지나도 기억의 창고에 저장되지 않는 얼마나 휘발성 강한 말들인지를, 순간의 자극은 주지만 오랜 여운를 남기지 않는 이야기인지를. 공기나 물을 손으로 움켜쥐어도 남는 것이 없듯 지금의 설교들이 딱 내게는 그렇습니다.

왜 이리 되었을까요? 내 믿음이 약해지고 세상살이에 바빠 아니면 세상적인 관점에서 설교를 듣다보니 별다른 반향을 받지못해서읽까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아닌듯 합니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여러 이유로 인하여 복음적인 내용이나 구원론적인 내용을 뼈대로 한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를 하려고 대단히 의식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모든 설교의 내용이 너무나 동어반복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또 삶과는 유리된 너무나 피상적이고 빈약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문을 바르게 주해하고 해석하여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이 듣고 삶에 적용하여 살아가도록 성실하게 노력한다는 느낌보다는 언제나 똑같은 복음과 구원의 교리들을 본문의 특정한 단어나 구절들을 가지고 동어반복적으로 말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보니 설교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에 삶의 구체성이 떨어지게 되고 영적 각성을 주는 내용이 매우 피상적으로 작동됩니다. 듣는 순간에는 대단한 내용으로 들리지만 실상 내 삶에 변화를 주는 능력으로는 이어지지 못하고 쉽게 휘발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유일성과 완전성을 붙잡고 예수님 한분 외에는 중요하지 않다는 신앙은 대단히 칭찬받을만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지나쳐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약화시키고, 하나님이 하셨던 일과 하셨던 말씀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면서 이것이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신앙의 유일한 기준이 되는 성경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전혀 필요없게 만듭니다.

그 문제를 살펴봅시다. 예수님을 경배한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구체적인 믿음의 내용과 삶의 모습에는 관심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복음적이고 구원론적 교리를 강하게 붙잡지만, 이상하게도 우리의 신앙의 내용이 너무나 빈약해지고 편협해집니다.

예배와 기도와 성경을 읽는 행위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정작 어떤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 어떤  내용을 가지고  기도를 드려야 하는지,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고 우리는 주님이 가르치신 어떤 것을 내 삶에 지켜 행해야 하는지를 의식하면서 성경을 읽는 것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에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가까이 하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은 두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지 말고 더 나아가야만 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마음으로 만족함을 느끼고 기쁘고 즐겁게 하루를 살아갈 수 있지만 이것은 지극히 초보적인 믿음입니다. 이것은 단지 믿음의 태도요 믿음의 출발입니다.

에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가까이 하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을 닮아가고 예수님과 함께 동행할려면, 우리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과 그분의 말씀을 상고하고 우리에게 가르치신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가도록 애써야 합니다. 우리의 전인적인 모습이 변화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 언제나 우리의 신앙은 무기력하게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입슬로 주님을 가까이 한다 고백하고 그것을 믿음의 형식으로 은연중 인정받습니다. 이것이 굳어지면서 우리의 믿음은 무척이나 형식적이고 기계적이고 피상적이고 빈약해지고 편협해지고 이기적이고 위선적이 되버렸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하나님의 복음과 구원은 결코 개인적이고 내면적이고 내세만을 위한 것이 아님에도 지금의 교회들은 그것을 교정하려고 나설 마음이 없는 듯 보입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행위구원을 말함이 아닙니다. 예수믿음을 말할때 그 믿음의 내용이 뭔지에 대한 관심이 절실하다는 말이다. 또한 우상을 섬기듯 예수님을 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런 신앙의 올바른 변화를 위해 성경을 보는 눈이 바뀌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바른 주해와 해석으로 다듬어진 성실한 설교가 성도들에게 들려져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풍성해지고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삶의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 이것이 피상적이고 빈약하고 동어반복적인 말의 덫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해법임을 깊이 깨닫는 성령의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