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한 사람, 준비하는사람 (잠6:6~11)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잠6:8)
설교요약)
개미의 부지런함을 통해 자발성을 배우고 자발성은 자기결정으로 나타난다. 결정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믿음의 결정, 주의 법과 질서를 따르는 믿음의 결정, 악을 떨치고 의를 행하기로 결정이다. 이 결정들을 지켜 가는 것이다.
개미의 부지런함은 본성에서 나온다. 성도의 부지런함은 믿음에서 나온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생명,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부지런함은 주의 영으로 사는 부지런함, 성령으로 행하는 부지런함이다. 하나님은 일중독적인 부지런함을 원하시지 않는다.
부지런함의 신학 성경의 요구를 살펴보자.
(롬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벧전 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우리의 부지런함, 자발성, 결정, 이 모든 것이 사랑에 집중되어야 한다. 사랑의 사람이 되겠다고 결정해야 한다.
사랑에 있어 감정에만 치우치는 사람은 성숙하지 못한 인격체다. 감정을 지켜라! 먼저는 내뜻대로, 내 의지대로 안되는 감정임을 인정해야 한다. 망가진 감정이다. 쉽게 변하는 감정을 신뢰할수 없다.
사랑이 감정으로 시작되나 그 다음 단계인 의지로 나가야 한다. 삶의 어려움, 인간관계의 녹록치 않을 현실을 사랑으로 살아내겠다고 뜻을 정하고, 사랑의 감정을 키우고, 지키고, 완성하겠다는 결정을 하고, 자기 의지를 굳게 하는 것, 이것이 진실하고 성숙한 사랑이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내 생명이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신뢰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믿음으로 내가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세우는 것이다. 부족한 것을 채워주시고 능히 도우실 주님을 기대하면서 행하는 것이다.
뜨겁게 사랑하겠다고 결정하였는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겠다 결정하였는가? 이것을 결정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부지런한 역군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옳은 일이라 여기면 결정해야 한다.
개미를 통해 배울 2번째 지혜는, 준비성이다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잠6:8)
개미가 누구를 위해 준비하는가? 개미들의 나라를 위해서, 여왕개미와 알들 다음세대를 위해서이다. 자신만을 위한 부지런함은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와 거리가 멀다. 영혼의 악에 가깝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부지런함이어야 한다.
열심히 주를 섬기고, 무엇보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기 위한 부지런함이 아니면, 그 부지런함의 외형이 저주를 불러오고 자신을 파멸에 몰아넣을수 있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 그의 부지런함이 인류의 재앙이 되었다.
부지런함에 담는 가치가 무엇이냐가 중요하다. 우리는 인격의 결정으로 미래를 준비한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십자가 복음의 은혜를 따라서 결정하고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미래의 영원한 나라와 생명을 준비한다. 예배와 매일 삶에서 드리는 기도가 영원을 준비하는 부지런함의 일부이다. 영원한 나라의 주가 되시는 주 하나님과 교제 - 예배, 기도, 말씀 읽기 - 를 통해서 그분을 더 알아가고, 그분과 점점 더 깊은 관계에 들어가고, 그분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다.
영원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영원한 나라의 주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영원한 나라에서 함께 살 주의 백성들과 뜨거운 사랑을 연습하는 것이다. 그 과정이 힘들고 쉽지 않지만 멋지고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고 훈련하는것이다.
영원한 천국을 준비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미 천국을 확정받았다. 영원한 미래에 가지고 갈 것은 사랑의 추억밖에 없다. 주님과 함께, 주님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온 추억, 주님과 함께 하는 그 기쁨을 누리는 일에 열심을 내서 부지런함으로 온전함을 이루고, 그 영원한 천국을 하나님의 자녀로 함께 누릴 이들과 힘겹지만 사람의 관계를 이루어가고, 정말 열심히 감정을 넘어서서 의지로 사랑해내고 사랑의 열매를 맺어내는 부지런한 수고로 미래를 준비해가야 한다.
요약 끝)
개미를 통해 자발성을 배우고, 두번째로 준비성을 배운다. 자발상은 결정으로 연결되고, 준비성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기서의 미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말한다. 예수님을 믿고 죽으면 가는 영원한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는 방법으로, 열심으로 주를 섬기고 주님과 교제하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인 주변 성도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어가는 것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관계는 감정을 넘어 의지로 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설교의 요지입니다.
첫번쨰 설교에서 미흡했던 것을 보완하였습니다. 그때 미리 다뤘더라면 설교내용에 대한 반발이나 저항이 덜했을텐데 아쉽습니다. `결정`이란 단어에 강조(또는 집착)때문에 탐욕과 악이 아닌 어떤 결정도 좋다는 설명이 지나쳤습니다. 믿음도 결정이라는 설명에서 신앙의 수동성과 능동성을 비교했더라면 조금 나았을 것입니다.
항상 동일한 문제가 반복되는데, 그것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그 주제를 선택하게 한 단어나 문장을 가지고 내용을 완성해 가다보니 비약과 파격을 빈번히 사용하게 되고, 그로 인해 전체적인 내용이 균형을 잃고 굉장히 일방향적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복합적이고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면을 다루지 못하게 되고, 결국 안타깝게도 설교의 내용이 피상적이고 현학적이고 자기계발의 교훈만을 제시하는 것처럼 되버립니다.
또 한가지 문제는, 어떤 설교도 결국 주제설교화 되어버리는데 따른 심각한 부작용입니다. 성경본문의 문맥이 본의아니게 무시되고 주해작업이 너무나 빈약해져서 성경을 듣는 성도들에게 본문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가져올수 있는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질문을 해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준비하는 목적이 오직 사후천국에 가기 위함인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무엇인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세상에는 말하는 사랑의 종류는 많고, 사랑에 대한 정의는 심히 오염되었습니다. 희생하는 사랑, 용납하는 사랑,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과 세상에서 널리 유통되는 사랑이 어찌 같을까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요?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우리는 그 사랑을 보이며 살아가야 하는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에서 항상 물어야합니다. 내 삶에서 드러내야 할 구체적인 사랑의 방법들은 무엇인지를.
요즘의 교회에서는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상투적이고 관용적인 표현들이 한쪽 귀로 흘러들어가 여과되지 않고 다른 귀로 흘러나갑니다. (예전 같으면 영적인 것이라고 주장했을) 그저 시적이고 아름다운 느낌만 남습니다. 그것은 이제 너무나 막연하고 모호하고 피상적 언어가 되어 사람들을 몽매의 늪에 빠뜨립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진짜 무엇을 해야할지를 모릅니다.
하나님나라의 원리와 가치도 어느덧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이제는 예수 믿고 천국에 가는 것 말고는 남은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삶에 구체성을 찾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선재적으로 해야 할까요?
우리 삶의 변화를 위한 방법론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설교는 말합니다. 예수님 믿고 죽으면 우리는 영생을 주는 천국으로 간다, 그것은 이미 믿음으로 확정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이신칭의에 캘빈의 성도의 견인교리가 더해져 끈질기게 우리의 신앙을 한 방향에 세워놓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탈락에 대한 불안때문에 내가 뭔가를 해볼려는 행위구원에 대한 차단책으로서 제격입니다. 이것에 따르면 사실 구원파에서 강조하듯 죄에 대한 해결책을 골치 아프게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쉽고 편한 믿음의 길을 제공해주고 때문에 언제나 환영받습니다.
한 때 가톨릭 교회들이 공로와 행위에 대한 사상을 개인적 탐욕과 공명의 수단으로 삼고자 너무 막나간 시간들 때문에 기독교 역사는 새로운 방향을 역방향으로 잡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보니 칭의보다는 성화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믿음의 고백이 삶의 실제적인 변화보다는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금 우리 교회의 현실은 이러합니다. (약간은 과장된 설명일 수 있지만)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 ==>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라 ==>
영혼구원하여 제자 삼아라 ==>
애석하게도 결론은 늘 동일합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 기도 성경읽기 헌금 봉사 선교 교제 하기 (가정과 사회는 그 연장선상일 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곧 사후 천국에 올라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현실에서 요구되는 필요들도 당연히 주신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왜 미래에 영원한 천국과 영생이 약속되었으니 이 땅에서의 허무한 시간, 짧은 고생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사후에 가게 될 천국과 거기서 누릴 영생이 그리스도인이 추구할 전부일까요?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깊이 아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는 것은 단지 지식의 차원이 아닙니다. 아는 것은 온전히 속깊이 아는 것입니다. 그분의 인격과 사역과 뜻과 생각을 내 안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현재의 삶의 문제입니다.
나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성경의 하나님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삶으로 그저 막연히 주를 섬기고 서로 사랑하라는 구호를 부르짖는 것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성육신하신 주님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삶에 중점을 두셨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너희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은 주어진 이 땅에서의 현실에서 너는 어떻게 선택하고 어떤 삶을 살아갈지를 묻고 계십니다. 물론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줄곧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이미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가치와 질서를 따라 구체적인 삶의 모습들을 세워가라고 하십니다. 그리하여 일상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세우는 삶, 자비와 평화를 추구하는 삶을 죽는 날까지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놓친 교회는 항상 무기력하고 공허할 뿐입니다.
결국 우리의 미래는 다시 오실 주님과 함께 새하늘과 새 땅으로 화할 이 땅에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그 찬란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 주님을 모시고 영원히 왕노릇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잠6:8)
설교요약)
개미의 부지런함을 통해 자발성을 배우고 자발성은 자기결정으로 나타난다. 결정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믿음의 결정, 주의 법과 질서를 따르는 믿음의 결정, 악을 떨치고 의를 행하기로 결정이다. 이 결정들을 지켜 가는 것이다.
개미의 부지런함은 본성에서 나온다. 성도의 부지런함은 믿음에서 나온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생명,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부지런함은 주의 영으로 사는 부지런함, 성령으로 행하는 부지런함이다. 하나님은 일중독적인 부지런함을 원하시지 않는다.
부지런함의 신학 성경의 요구를 살펴보자.
(롬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벧전 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우리의 부지런함, 자발성, 결정, 이 모든 것이 사랑에 집중되어야 한다. 사랑의 사람이 되겠다고 결정해야 한다.
사랑에 있어 감정에만 치우치는 사람은 성숙하지 못한 인격체다. 감정을 지켜라! 먼저는 내뜻대로, 내 의지대로 안되는 감정임을 인정해야 한다. 망가진 감정이다. 쉽게 변하는 감정을 신뢰할수 없다.
사랑이 감정으로 시작되나 그 다음 단계인 의지로 나가야 한다. 삶의 어려움, 인간관계의 녹록치 않을 현실을 사랑으로 살아내겠다고 뜻을 정하고, 사랑의 감정을 키우고, 지키고, 완성하겠다는 결정을 하고, 자기 의지를 굳게 하는 것, 이것이 진실하고 성숙한 사랑이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내 생명이 하나님의 사랑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을 신뢰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믿음으로 내가 사랑하겠다는 의지를 세우는 것이다. 부족한 것을 채워주시고 능히 도우실 주님을 기대하면서 행하는 것이다.
뜨겁게 사랑하겠다고 결정하였는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겠다 결정하였는가? 이것을 결정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부지런한 역군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옳은 일이라 여기면 결정해야 한다.
개미를 통해 배울 2번째 지혜는, 준비성이다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잠6:8)
개미가 누구를 위해 준비하는가? 개미들의 나라를 위해서, 여왕개미와 알들 다음세대를 위해서이다. 자신만을 위한 부지런함은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와 거리가 멀다. 영혼의 악에 가깝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부지런함이어야 한다.
열심히 주를 섬기고, 무엇보다 뜨겁게 서로 사랑하기 위한 부지런함이 아니면, 그 부지런함의 외형이 저주를 불러오고 자신을 파멸에 몰아넣을수 있다. 히틀러의 '나의 투쟁' 그의 부지런함이 인류의 재앙이 되었다.
부지런함에 담는 가치가 무엇이냐가 중요하다. 우리는 인격의 결정으로 미래를 준비한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십자가 복음의 은혜를 따라서 결정하고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미래의 영원한 나라와 생명을 준비한다. 예배와 매일 삶에서 드리는 기도가 영원을 준비하는 부지런함의 일부이다. 영원한 나라의 주가 되시는 주 하나님과 교제 - 예배, 기도, 말씀 읽기 - 를 통해서 그분을 더 알아가고, 그분과 점점 더 깊은 관계에 들어가고, 그분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가는 것이다.
영원한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영원한 나라의 주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 영원한 나라에서 함께 살 주의 백성들과 뜨거운 사랑을 연습하는 것이다. 그 과정이 힘들고 쉽지 않지만 멋지고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고 훈련하는것이다.
영원한 천국을 준비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미 천국을 확정받았다. 영원한 미래에 가지고 갈 것은 사랑의 추억밖에 없다. 주님과 함께, 주님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온 추억, 주님과 함께 하는 그 기쁨을 누리는 일에 열심을 내서 부지런함으로 온전함을 이루고, 그 영원한 천국을 하나님의 자녀로 함께 누릴 이들과 힘겹지만 사람의 관계를 이루어가고, 정말 열심히 감정을 넘어서서 의지로 사랑해내고 사랑의 열매를 맺어내는 부지런한 수고로 미래를 준비해가야 한다.
요약 끝)
개미를 통해 자발성을 배우고, 두번째로 준비성을 배운다. 자발상은 결정으로 연결되고, 준비성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여기서의 미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말한다. 예수님을 믿고 죽으면 가는 영원한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는 방법으로, 열심으로 주를 섬기고 주님과 교제하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인 주변 성도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어가는 것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 사랑의 관계는 감정을 넘어 의지로 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설교의 요지입니다.
첫번쨰 설교에서 미흡했던 것을 보완하였습니다. 그때 미리 다뤘더라면 설교내용에 대한 반발이나 저항이 덜했을텐데 아쉽습니다. `결정`이란 단어에 강조(또는 집착)때문에 탐욕과 악이 아닌 어떤 결정도 좋다는 설명이 지나쳤습니다. 믿음도 결정이라는 설명에서 신앙의 수동성과 능동성을 비교했더라면 조금 나았을 것입니다.
항상 동일한 문제가 반복되는데, 그것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그 주제를 선택하게 한 단어나 문장을 가지고 내용을 완성해 가다보니 비약과 파격을 빈번히 사용하게 되고, 그로 인해 전체적인 내용이 균형을 잃고 굉장히 일방향적이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복합적이고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면을 다루지 못하게 되고, 결국 안타깝게도 설교의 내용이 피상적이고 현학적이고 자기계발의 교훈만을 제시하는 것처럼 되버립니다.
또 한가지 문제는, 어떤 설교도 결국 주제설교화 되어버리는데 따른 심각한 부작용입니다. 성경본문의 문맥이 본의아니게 무시되고 주해작업이 너무나 빈약해져서 성경을 듣는 성도들에게 본문에 대한 오해와 왜곡을 가져올수 있는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질문을 해봅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준비하는 목적이 오직 사후천국에 가기 위함인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무엇인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세상에는 말하는 사랑의 종류는 많고, 사랑에 대한 정의는 심히 오염되었습니다. 희생하는 사랑, 용납하는 사랑,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과 세상에서 널리 유통되는 사랑이 어찌 같을까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요?
사랑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우리는 그 사랑을 보이며 살아가야 하는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상에서 항상 물어야합니다. 내 삶에서 드러내야 할 구체적인 사랑의 방법들은 무엇인지를.
요즘의 교회에서는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상투적이고 관용적인 표현들이 한쪽 귀로 흘러들어가 여과되지 않고 다른 귀로 흘러나갑니다. (예전 같으면 영적인 것이라고 주장했을) 그저 시적이고 아름다운 느낌만 남습니다. 그것은 이제 너무나 막연하고 모호하고 피상적 언어가 되어 사람들을 몽매의 늪에 빠뜨립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진짜 무엇을 해야할지를 모릅니다.
하나님나라의 원리와 가치도 어느덧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이제는 예수 믿고 천국에 가는 것 말고는 남은 것이 없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삶에 구체성을 찾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선재적으로 해야 할까요?
우리 삶의 변화를 위한 방법론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설교는 말합니다. 예수님 믿고 죽으면 우리는 영생을 주는 천국으로 간다, 그것은 이미 믿음으로 확정되어 있다고 말입니다. 이신칭의에 캘빈의 성도의 견인교리가 더해져 끈질기게 우리의 신앙을 한 방향에 세워놓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탈락에 대한 불안때문에 내가 뭔가를 해볼려는 행위구원에 대한 차단책으로서 제격입니다. 이것에 따르면 사실 구원파에서 강조하듯 죄에 대한 해결책을 골치 아프게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쉽고 편한 믿음의 길을 제공해주고 때문에 언제나 환영받습니다.
한 때 가톨릭 교회들이 공로와 행위에 대한 사상을 개인적 탐욕과 공명의 수단으로 삼고자 너무 막나간 시간들 때문에 기독교 역사는 새로운 방향을 역방향으로 잡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보니 칭의보다는 성화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믿음의 고백이 삶의 실제적인 변화보다는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금 우리 교회의 현실은 이러합니다. (약간은 과장된 설명일 수 있지만)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라 ==>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라 ==>
영혼구원하여 제자 삼아라 ==>
애석하게도 결론은 늘 동일합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 기도 성경읽기 헌금 봉사 선교 교제 하기 (가정과 사회는 그 연장선상일 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 곧 사후 천국에 올라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현실에서 요구되는 필요들도 당연히 주신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왜 미래에 영원한 천국과 영생이 약속되었으니 이 땅에서의 허무한 시간, 짧은 고생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사후에 가게 될 천국과 거기서 누릴 영생이 그리스도인이 추구할 전부일까요?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깊이 아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는 것은 단지 지식의 차원이 아닙니다. 아는 것은 온전히 속깊이 아는 것입니다. 그분의 인격과 사역과 뜻과 생각을 내 안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것은 현재의 삶의 문제입니다.
나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성경의 하나님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삶으로 그저 막연히 주를 섬기고 서로 사랑하라는 구호를 부르짖는 것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성육신하신 주님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은 이 땅에서의 삶에 중점을 두셨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너희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은 주어진 이 땅에서의 현실에서 너는 어떻게 선택하고 어떤 삶을 살아갈지를 묻고 계십니다. 물론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 있는지를 물으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줄곧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이미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가치와 질서를 따라 구체적인 삶의 모습들을 세워가라고 하십니다. 그리하여 일상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세우는 삶, 자비와 평화를 추구하는 삶을 죽는 날까지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놓친 교회는 항상 무기력하고 공허할 뿐입니다.
결국 우리의 미래는 다시 오실 주님과 함께 새하늘과 새 땅으로 화할 이 땅에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그 찬란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 주님을 모시고 영원히 왕노릇하며 살아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