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이란 여러 종교인중의 하나가 아니다. 그들은 완전히 다른 삶의 체계에 헌신을 자처한 이들이다.(타종교인은 웃을지 모르겠지만)
이런 세계관이 심각하게 훼손된 오늘날의 신앙고백자들의 남은 보루는 앙상한 교리에 있다. '십자가 대속을 감당하신 예수믿고 죽어 천국행'이 마지막 남은 교리로 작동한다.
아이러니하게 정반대인 현실의 삶에는 어이없게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위장된 욕망추구가 있다. 부자, 성공, 성취는 무조건적 하늘 축복이라는 왜곡된 믿음의 집단적 합리화가 그것들을 게걸스럽게 계속 불러오고 있다.
이것을 고치려면 최우선적으로 지금 남은 유일한 기준인 성경 읽기가 바로잡혀져야 한다. 바른 성경읽기는 먼저, 한 문장의 의미로 자꾸 거창한 뜻을 세우려 말고( 또는 자신이 깨달은 바를 위해 본문을 들러리로 이용하지도 말고), 앞뒤 문맥을 꼼꼼이 살펴보고서 그 문장의 본래 의미를 숙고해가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길이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하나님과 이웃과의 바른 관계로 이끄시는 주님의 은혜에 든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노력이 아닐까 싶다.)
두번째, 성경의 1차 독자는 2000년 이전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전제해야 한다. 성경의 모든 문장들이 오늘 우리에게 불변하는 영원한 진리를 전달하다는 생각은 신심이 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리석은 태도이다. 성경의 내용을 취사선택해서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우리는 성경속 하나님의 메시지와 그것를 전달하는 수단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진정한 메세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그 시대의 과학/문화/ 세계관(설정값)이 있다. 이 수단들은 그 시대마다 다르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한다.
성경이 스스로 진리를 드러낸다거나, 기도만 하면 사람이 바뀐다는 말은 모두 맞지 않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그것은 자기의 기존의 생각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낯선사람, 낯선 환경을 접할때 새로운 생각, 새로운 해석으로 나갈 수 있다. 낮은 존재들과의 만남을 통해 새롭게 성경을 잃게 되고, 새로운 변화가 생긴다.
공동체안에서의 열린 토론과 생각나눔을 통해 말씀의 본질과 의미를 숙고하고 나아갈 수 있다. (이게 힘든 이유는 교회내 선포에 대한 독점권이 있다고 믿는 교권주의가 만연한 것, 이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순종이라는 껍데기를 쓰고서 교인들을 종교바보로 만들고 있다는 슬픈 현실에 있다.) _요약_
요즘 다른 설교를 거의 듣지 않는데, 더 이상 들어야 할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들었던 것과 동어반복인 그 설교들로부터 더 이상 현재를 변화시킬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게 참 슬프다.
2022.6.12. 오랜만에 교회의 설교를 정리해본다. 잘 듣는 사람, 잘 웃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잠3:5~6 유명한 본문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주님께서 네게 가는 길을 곧게 하실 것이다." (새번역)
이 본문의 키가 되는 구절은 '주님을 신뢰(의뢰), 주님을 인정'이다. 설교자는 성도들이 주님을 신뢰하고 인정하게 되면, 설교제목처럼 남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잘 웃어주게 된다고 결론지었다.
◎ 주님을 신뢰/ 인정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뭘까?
창조자이시자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옳고 선하신 길로 결국 인도 하시리라는 믿음, 하나님께서 세상에 세우신 뜻이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날 것을 기뻐하신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역사하심를 믿는 것이 기독교적 믿음의 본질이며, 모든 인생에는 최종심판이 있고 하나님은 행한대로 갚으시는 분임을 아는 것, 이것이 성경이 초지일관 말하고 있는 바이다. (항상 교회는 이것을 거의 강조하지도 언급하지도 않는다는게 문제이지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느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합당한)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분받지 말고 오직 마음(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1-2)
우리의 모든 일상의 삶까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로 삼고, 변화는 먼저 생각을 바탕으로 시작되어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아가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기를 원하시는 그 뜻은 무엇일까?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할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창18:19)
여호와의 사자 셋이 아브라함의 장막에 나타나자 아브라함은 이들을 극진히 대접한다. 그들은 노년의 부부에게 아들이 태어날것을 예언하고, 소돔으로 가려한다. 이때 아브라함에게 들려주신 여호와의 한마디가 의미있게 들려온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만민은 그로 말미암과 복을 받게 될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하시려는 것을 위해서 너를 선택했다. 강대한 나라, 복의 근원은 그 결과로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고자 하시는가?
그 자손들에게 여호와의 도(길)을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렇게 된다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 자손이 번성/강대한 나라/ 복의근원 (그로 말미암아 만민이 복을 받음)을 다 이루어 줄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하나님의 도(길)를 따르는 것)은 자손대대로 정의와 공의를 지키는 삶을 사는 것이다. 강대한 나라가 되고 복의 근원이 되려면 먼저 의와 공도를 행하는 것이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믿음의 고백과 주님 기뻐하시는 삶이 함께 가는 것과 같다. 얘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혜에 든 우리는, 의와 공도(공의와 정의)를 삶에서 드러내게 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복의 근원으로 부르신다는 곳과 동의어임을 알게 된다.
잘 들고 잘 웃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의지하고) 인정하는 사람이다는 설교의 주제는 그런 의미에서 본문의 의미하고는 동떨어진 내용이다.
남에게 귀기울이고 환한 웃음으로 대하는 것은 특별한 신앙이 없어도 인격적이고 남에 대한 존증/배려가 넘쳐나는 사람들에겐 흔한 행동이다.
물론,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잘 듣고, 선한 미소와 웃음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라나 이것도 그저 어떤 결과로서의 행동패턴에 대한 설명일뿐, 하나님은 진정으로 신뢰하고 그를 인정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뜻은 아니다.
하나님은 이 참혹한 현실에서도 결국은 옳고 선한길로 인도하시리라는 굳건한 믿음이 하나님을 신뢰(의지)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와 공도가 행해지는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선택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세상에 세우신 뜻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삶에 아름답게 드러날 것을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시리라는 믿음이 곧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단순하다. 그리고 타락함으로 스스로 회복될 힘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오셔서 하나님 앞에 서서 새롭게 변화할 수있는 능력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합당한 삶의 길이 아닐까 싶다.
본문에 나오는 선명한 뜻이 이렇다고 가르치지 않고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는 것 같아 당혹스러움 감출 길 없다.
2022..6.29(수)
이런 세계관이 심각하게 훼손된 오늘날의 신앙고백자들의 남은 보루는 앙상한 교리에 있다. '십자가 대속을 감당하신 예수믿고 죽어 천국행'이 마지막 남은 교리로 작동한다.
아이러니하게 정반대인 현실의 삶에는 어이없게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위장된 욕망추구가 있다. 부자, 성공, 성취는 무조건적 하늘 축복이라는 왜곡된 믿음의 집단적 합리화가 그것들을 게걸스럽게 계속 불러오고 있다.
이것을 고치려면 최우선적으로 지금 남은 유일한 기준인 성경 읽기가 바로잡혀져야 한다. 바른 성경읽기는 먼저, 한 문장의 의미로 자꾸 거창한 뜻을 세우려 말고( 또는 자신이 깨달은 바를 위해 본문을 들러리로 이용하지도 말고), 앞뒤 문맥을 꼼꼼이 살펴보고서 그 문장의 본래 의미를 숙고해가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길이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하나님과 이웃과의 바른 관계로 이끄시는 주님의 은혜에 든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노력이 아닐까 싶다.)
두번째, 성경의 1차 독자는 2000년 이전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전제해야 한다. 성경의 모든 문장들이 오늘 우리에게 불변하는 영원한 진리를 전달하다는 생각은 신심이 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리석은 태도이다. 성경의 내용을 취사선택해서 듣고 받아들이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우리는 성경속 하나님의 메시지와 그것를 전달하는 수단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진정한 메세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그 시대의 과학/문화/ 세계관(설정값)이 있다. 이 수단들은 그 시대마다 다르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한다.
성경이 스스로 진리를 드러낸다거나, 기도만 하면 사람이 바뀐다는 말은 모두 맞지 않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그것은 자기의 기존의 생각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뿐이다.
낯선사람, 낯선 환경을 접할때 새로운 생각, 새로운 해석으로 나갈 수 있다. 낮은 존재들과의 만남을 통해 새롭게 성경을 잃게 되고, 새로운 변화가 생긴다.
공동체안에서의 열린 토론과 생각나눔을 통해 말씀의 본질과 의미를 숙고하고 나아갈 수 있다. (이게 힘든 이유는 교회내 선포에 대한 독점권이 있다고 믿는 교권주의가 만연한 것, 이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순종이라는 껍데기를 쓰고서 교인들을 종교바보로 만들고 있다는 슬픈 현실에 있다.) _요약_
요즘 다른 설교를 거의 듣지 않는데, 더 이상 들어야 할 기대가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들었던 것과 동어반복인 그 설교들로부터 더 이상 현재를 변화시킬 어떤 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게 참 슬프다.
2022.6.12. 오랜만에 교회의 설교를 정리해본다. 잘 듣는 사람, 잘 웃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잠3:5~6 유명한 본문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의뢰하고, 너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라.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주님을 인정하여라. 그러면 주님께서 네게 가는 길을 곧게 하실 것이다." (새번역)
이 본문의 키가 되는 구절은 '주님을 신뢰(의뢰), 주님을 인정'이다. 설교자는 성도들이 주님을 신뢰하고 인정하게 되면, 설교제목처럼 남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잘 웃어주게 된다고 결론지었다.
◎ 주님을 신뢰/ 인정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뭘까?
창조자이시자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옳고 선하신 길로 결국 인도 하시리라는 믿음, 하나님께서 세상에 세우신 뜻이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날 것을 기뻐하신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역사하심를 믿는 것이 기독교적 믿음의 본질이며, 모든 인생에는 최종심판이 있고 하나님은 행한대로 갚으시는 분임을 아는 것, 이것이 성경이 초지일관 말하고 있는 바이다. (항상 교회는 이것을 거의 강조하지도 언급하지도 않는다는게 문제이지만.)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느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합당한)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분받지 말고 오직 마음(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1-2)
우리의 모든 일상의 삶까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로 삼고, 변화는 먼저 생각을 바탕으로 시작되어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아가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기를 원하시는 그 뜻은 무엇일까?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할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창18:19)
여호와의 사자 셋이 아브라함의 장막에 나타나자 아브라함은 이들을 극진히 대접한다. 그들은 노년의 부부에게 아들이 태어날것을 예언하고, 소돔으로 가려한다. 이때 아브라함에게 들려주신 여호와의 한마디가 의미있게 들려온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만민은 그로 말미암과 복을 받게 될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하시려는 것을 위해서 너를 선택했다. 강대한 나라, 복의 근원은 그 결과로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고자 하시는가?
그 자손들에게 여호와의 도(길)을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렇게 된다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 자손이 번성/강대한 나라/ 복의근원 (그로 말미암아 만민이 복을 받음)을 다 이루어 줄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하나님의 도(길)를 따르는 것)은 자손대대로 정의와 공의를 지키는 삶을 사는 것이다. 강대한 나라가 되고 복의 근원이 되려면 먼저 의와 공도를 행하는 것이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믿음의 고백과 주님 기뻐하시는 삶이 함께 가는 것과 같다. 얘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혜에 든 우리는, 의와 공도(공의와 정의)를 삶에서 드러내게 하는 것이 결국 하나님의 복의 근원으로 부르신다는 곳과 동의어임을 알게 된다.
잘 들고 잘 웃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의지하고) 인정하는 사람이다는 설교의 주제는 그런 의미에서 본문의 의미하고는 동떨어진 내용이다.
남에게 귀기울이고 환한 웃음으로 대하는 것은 특별한 신앙이 없어도 인격적이고 남에 대한 존증/배려가 넘쳐나는 사람들에겐 흔한 행동이다.
물론,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하고 인정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온전한 믿음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잘 듣고, 선한 미소와 웃음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라나 이것도 그저 어떤 결과로서의 행동패턴에 대한 설명일뿐, 하나님은 진정으로 신뢰하고 그를 인정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본뜻은 아니다.
하나님은 이 참혹한 현실에서도 결국은 옳고 선한길로 인도하시리라는 굳건한 믿음이 하나님을 신뢰(의지)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와 공도가 행해지는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선택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세상에 세우신 뜻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삶에 아름답게 드러날 것을 하나님이 참으로 기뻐하시리라는 믿음이 곧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단순하다. 그리고 타락함으로 스스로 회복될 힘을 잃어버린 인류에게 오셔서 하나님 앞에 서서 새롭게 변화할 수있는 능력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합당한 삶의 길이 아닐까 싶다.
본문에 나오는 선명한 뜻이 이렇다고 가르치지 않고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는 것 같아 당혹스러움 감출 길 없다.
2022..6.29(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