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히 좋아하셨습니다 (창1:24~31)
주제구절 :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6~27)
하나님의 형상이란 무엇일까? (정확한 뜻을 모르는데도 알고 있다고 착각함이 우리의 문제)
분명한 점은 하나님의 창조의 때에 다른 피조물들에게는 없는 독특하고 특별한 요소가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물리적 형체가 없으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에게 부여해주신 그분의 속성(성품)이나 또는 기능(역할)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하나님이 원형이시고 그 원형을 반영한 image가 사람 안에 포함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존하시고 불변하시며 무한하시고 영원하시며 유일하시다. 인간이 하나님의 이같은 절대적인 성품을 물려받지 않음은 분명하다. 성경에 계시된 것처럼 하나님의 지식과 지혜, 거룩과 사랑, 의지와 능력 같은 보편적이고 인격적인 성품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인간성의 회복과 발현이 곧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인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생각들은 오랜 역사가 있다. 먼저 '형상'과 '모양'에 대한 구분을 했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형상은 영혼의 지적 특성, 모양은 영혼의 도덕적 특성과 관련있다고 셍각하였다.
중세 스콜라 신학자들은 형상은 타락이후에도 남아있는 이성과 의지의 자유를, 모양은 타락과 함께 잃어버린 원의(본래적인 의)라고 보았다. 가톨릭신학은 형상은 자연적 은사(영성, 의지)로 타락후에도 남아있고, 모양은 초자연적 은사(원시적 의)로 타락시 상실되어 그리스도에 의해 회복된다고 하였다.
종교개혁 이후 현상과 모양은 강조를 위한 중복된 표현으로 보고 더이상 구분이 불필요하다 여겼다. 루터는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창조시 부여받은 영적특질이며, 이 원시적 의는 참 지식과 의와 거룩함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다.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영혼에 자리한다고 했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 보았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의 이성이나 본질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았다.
<<개혁주의에서 설명하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처럼 존귀하고 영화로운 존재로 지음받았다는 것이다. 인긴은 (본질)이신 하나님을 드러내는(현상)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나타내며, 하나님의 통치를 위임받은 대리인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실제의미를 나타내는 성경구절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엡4:24, 새번역)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이 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끊임없이 새로워져서, 참 지식에 이르게 됩니다. (골3:10, 새번역)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고전1:30, 새번역)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새사람을 입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은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 (하나님을.바르게 아는) 참 지식을 말한다. 죄로 왜곡되고 뒤틀린 하나님의 형상이 참 지혜(지식)과 의와 거룩이신 그리스도로 인해 회복됨으로 구원이 임펬다.
어떤 모양이나 형태가 아닌, 어떤 영적 종재고 아닌,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의로우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향상을 닮은 사람들은 그것을 드러낸다. 참된 말을 하며 서로를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며 살아간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장 잘 드러내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히1:3)
에수님은 자신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화복(회개/거듭남)하여 새사람,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구원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이후 하나님의 형상은 손상되었다. 찌그러지고 일그러진 하나님의 속성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회복되었다. 참 의로움, 참 거룩함, 참 진리를 아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었다.)
<<본문묵상>>
-인간이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전혀 다른 특별한 존재임을.가리킨다.
-'다스리게 하자' : 통치의 개념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의 속성을 부여받은 지상의 왕이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왕처럼 존엄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다스리는 왕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시8:5-6)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지 다른 생물들처럼 '종류별로' 창조하지 않으셨다.
-"우리", 다스림 : 하나님의 뜻과 성품에 따라 다스려야 한다. 삼위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합하여 존재하시는 방식대로 남녀가 조화와 연합을 통해 온전한 존재다움을 누리도록 의도하셨다.
제사장처럼 이웃과 생명을 품고, 왕처럼 다스리고 보살피는 것, 그것이 왕깉은 제사장으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잘 구현하는 모습이다. (벧전2:9)
<<묵상의 심화>>
'우리' : 하늘의 천상회의를 생각해볼 수 있다. 스랍(사6장), 그룹(겔), 여호와의 회의(렘23:18)
하나님이 '의논'가운데 사람을 만드셨다. (오직 사람만)
1.하나님의 형상은 관계안에 존재하는 사람이다. (복수형으로 존재: 우리, 남녀)
관계를 떠나 공동체를 떠나 살때 사람다움이 없어진다. 삼위일체 하나님도 관계 안에 공동체 안에 머물러 계신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엡1:23)
신앙들과의 관계,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이다.
2.하나님의 형상은 "다스려라" 통치를 뜻한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고 이 땅이 하나님의 통치영역임를 표시하는게 사람이다. 사람이 존재하는 곳곳마다 여기가 하나님의 통치영역, 하나님의 나라이며, 하나님의 통치가 이곳에 있음을 보여준다.
이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증거하고, 동시에 사람들이 그 통치의 대행자로서 그 통치를 감당하는 자로서 이 땅에 존재한다.
벧전2:9) 왕 같은 제사장은 '왕인 제사장'이 본래 단어. 계시록) 성도들이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라
"하나님은 우리를 왕으로 부르셨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를 대행할 존재로 부름받았다."
그러므로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이 왕적인 존재임을 알고 그에게 순종하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 성도의 자세이다. 함께 존재하는 공동체내의 지체들(심지어 어린아이일지라도)에게 귀 기울이는 것이 하나님이 세운 권세에 순종하는 태도이다.
*그렇다면 다스림은 어떤 식으로 구현될까?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창2:15)
경작은 일하다, 노동하다는 단어. 목적어가 하나님이 되면 예배하다가 된다.
다스림이 오염되었다. 서서 섬기는 자가 존귀한 자다.
다스림은 노동을 통해 현실이 되고 일상이 되소 구체화된다. 노동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 함께 일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육체노동일수록 천하다는 생각은 세상의 속된 영을 따라 사는 것이다. 노동자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이다. 곁에 있는 사람이 대상이지 않다. 내가 돕는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이웃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형상이 되게 되는 것이다.
예수 믿는다는 것의 내용이 무엇이냐? 무엇으로 어디에서 드러나는 지를 하나 하나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의 과세이다.
설교되새김)
하나님이 사람을 지어놓고 심히 좋아하신 이유
1.인간은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이 당신의 image를 부여하셨기에 사람은 존엄한 존재이다. 이 고백이 노예제도, 유교적 신분질서등 차별적 질서를 무너뜨렸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당연히 해야 할 일(당위)
a.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다는 것이 자존감의 이유가 된다. 죄로 인해 그 형상이 깨어지고 망가져 불완전하게 나탄난다. 예수 스리스도를 통해 형상이 회복된다.
b.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형상을 지닌 사람을 귀하게 바라봐야 한다.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사람이 된다. 사람과 함께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형상이 다 죽어버린다.
사람이 싫은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 그 영혼에 자기 존엄의식이 깊이 새겨져 있기에 하나님처럼 대접 받고자 하는 욕망이 인간 존재안에 있기에 그렇다.
자기존엄의식은 점점 자라서 더 존귀하게 대접 받고자 하는게 인간의 본성이다. 형상이 망가진 사람은 더 삐뚤어졌음에도 여전히 인격적인 대접받기를 원한다.
사람 사랑 포기는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참된 인셍의 가치는 사람을 사랑하는데 있다.
2.사람이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이기에
사람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 세상과 온 우주는 숭배 대상이 아니다. 사람도 숭배 대상이 아니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 존중항 대상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과 사는 것은 곧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배우고 훈련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기록된 말씀으로 자기를 계시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제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에 반응하며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갈 때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역사적 맥락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면 하나님의 형상, 이미지가 우리에게 부여되어 인간이 존엄한 존재라는 전제에서 이야기가 시작될 때 너무나 막연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항상 그렇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용이다. 명제적 선포가 동어반복이 될 때 허울뿐인 동의만이 난무했음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닫게 된다. 오늘도 역시 피상적인 일반화의 오류가 마음을 아프게 찌른다.
모든 면에 심하게 까탈스러운 성격을 지닌, 또는 자기만 챙기는 지극히 이기적인 어떤 사람이 있다고 치자.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기가 불편해 할 그 어떤 말도 못 참지만, 정작 본인은 타인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고 상처되는 말을 쉽게 해버린다. 주고 받는 정상적인 관계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편에서 꾸준히 침아주고 일방적인 사랑의 섬김이 필요하다. 만약 이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직 마음의 상처, 쓴뿌리, 옛 사람의 본성이 남아 있어서 그렇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런 이유중에는 하나님의 형상됨을 반영하는 자기존엄의식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자기안에 망가져 있는 상태에서도 자기존엄의식이 분출되어 기계적인 대우가 아니라 인격적인 대우를 받기를 원한다. 그러니 우리가 사람들을 대하기가 쉽지 않다. 뒤틀린 김성을 나타내면서도 존중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포기하면 안된다. 사람은 사람과 함께 살때만 사람이다. 사람과 살면서 인격체로 성장한다.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을 포기하면 자신이 사람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이 말을 들으면서 멍해지면서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말은 말인데 맞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 참 의로움, 참 거룩함을 회복하고, 관계안에 살아가는 존재로, 자기 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도 왕깉은 존재로 다스리는 자로 부르셨음을 인식한다면 이럴 수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회개하고 거듭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당장에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그 형상이 보여주는 영광과 소망의 푯대를 향해 같은 곳을 보고 경주를 해야하는 존재들이 아니던가?
그리고 현대의 사람들은 어찌되었든 사람하고 부대끼며 살아간다. 아니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사람에 대한 태도에 따쓰함이 있느냐 차가움이 있느냐다. 사람들의 엣 상처에서 오는 공격성이나 두러움, 이기심과 비교의식, 또는 가치관과 성격 차이에서 오는 복합덕인 요인들이 바른 관계를 방해한다. 이런 삶의 복합적이고 께층적이고 다면적인 ㅇ요소들을 헤아리지 않고 어떤 비정상적인 모습을 가지고 자기존엄의식이라는 표현은 너무나 피상적이다.
자기존엄의식의 표출이 남에게서 인격적인 대우를 받는 것이라면, 동물들도 그 못지 않는 자기존엄의식이 있다. 사람이 사랑해주고 정성을 쏟는 동물은 똑같이 사람을 대하고, 미움받고 매맞는 동물은 사람을 극도로 경계한다. 사실 동물들도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어한다.
자기 존엄의식은 반대로 이해해야 한다. '내가 비록 이렇게 뒤틀린 심성으로 당신을 대하지만 속으로는 당신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싶어요, 그런데 내 안의 무언가가 그것을 못하도록 방해하네요. 미안하지만 그런 나를 용서하시고 내가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도록 기도해 주세요'
그 사람의 문제를 깊이 파악하고 그 사람이 그 한계나 어려움을 극복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돕고 섬기는기 오히려 우리의 과제이다. 그저 참고 인내하며 이 어찌 할 수 없는 현실을 견뎌내는게 믿음이 아니다.
또 사람들과 함게 산다고 하지 말고 믿음의 공동체와 함께 살아간다고 해야 맞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진정한 신자들은 듣고 싶은 말이.아닌, 성경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말씀을.전하는 자들은 하고 싶은 말이 아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전해야 한다.)
먼저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성경적인 분명한 설명이 필요해보인다. 그 다음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과 믿음 밖에 있는 사람들과의 구분이 필요하다. 사람에 대한 일반론을 말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을 모든 것애 무분별하게 적용해버리는 것은 문제가 된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밈음으로 구원에 들어선 사람들이다. 또한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가운데 드러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뭔가 결함을 안고 있는 것이다. 진짜 거듭나지 못했거나,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내주하는 죄의 유혹과 악한 환경을 이용하는 사단의 농단에 놀아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현실이 그렇다고 무작정 순응해야 한다고 느껴지는 말은 너무나 무책임한 말이다. 성령은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참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 우리를 변화시키신다.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거둡난 신자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섬김과 사랑의 수고와 노동을 통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소명을 감당하도록 큰 소망과 기쁨과 능력을 주시기를 주님께 간구하자.
추가묵상) 하나님 형상에 대한 잘못된 접근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입장에서 존엄하고 고귀한 존재라는 생각으로 자존감을 지키는 방식이 아닌, 자칫 자만심과 자기애로 이어지면 인된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죄는 하나님 계명에 대한 불순종이었고, 그것은 잘못된 욕망을 부추긴 사단의 유혹이 시작점이었다.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하나님처럼 되리라'이다.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형상이, 선악에 대한 기준을 자신이 세워 모든 것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권력을 직접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그릇된 자의식을 사단이 심어주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된 것은 결국 자신이 하나님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은근한 욕망의 결과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자기애는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심이 되기 쉽고, 그 이기심은 남을 행한 무관심과 폭력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열등감으로부터 자기 존엄의식을 지키게 한다. 나아가 자아도취나 자기애, 이기심으로부터 벗어나 타인을 공감하고 세상과 하나님 나라가치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 이르게 된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이다. 사람은 의지적으로 선택할 수 있지만 그 선택의 결과에는 책임이 따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처럼 행세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