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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한 기독교 (요약)

강가딘777 2017. 11. 14. 20:12

 

<1부 옳고 그름, 우주의 의미를 푸는 실마리>


1장 인간 본성의 법칙

제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지구 위에 사는 인간은 누구나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기묘한 생각을 갖고 있으며, 그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자연법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기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야말로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 대해 명확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는 토대입니다. (33)


3장 이 법칙의 실재성

그러나 '인간 본성의 법칙'이 말하는 바는 어떤 인간이든지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지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문제를 다룰 때에는 현실의 사실들 너머에 있는 무언가가 끼어듭니다. 사실(인간은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는가) 외에 무언가 다른 것(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이 더 있는 것입니다. (45-6)

4장 이 법칙의 배후에 있는 것

인간으로서 우리가 열 수 있는 유일한 봉투는 인간 자신입니다. 그 봉투를 열어 보았을 때, 특히 '나'라는 인간을 열어 보았을 때 제가 발견한 것은 '나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며 어떤 법칙 아래에 있는 존재'라는 사실, 즉 '내가 일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원하는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57)

5장 우리의 불안에는 이유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빠져 있는 끔찍한 곤경입니다. 절대 선이 우주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어떤 노력을 해도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반면에 절대 선이 우주를 다스린다면 우리는 매일 그 선의 원수가 되는 셈이고 다음 날이라고 해서 사정이 나아질 기미 또한 전혀 없으므로, 이 경우에도 역시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 선 없이 살 수도 없고, 그 선과 더불어 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위안인 동시에 최고의 공포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존재인 동시에 가장 피하고 싶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유일한 동맹자가 될 수 있는 존재이지만, 우리는 스스로 그의 원수가 되어 버렸습니다. (63)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용서를 약속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회개할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 자신에게 용서가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는 사람에게는 기독교가 아무 의미도 가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먼저 도덕률이라는 사실이 정말로 존재하며, 그 법칙의 배후에 어떤 힘이 있고, 여러분이 그 법을 어김으로써 그 힘과 잘못된 관계를 맺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기독교는 여러분에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병들었다는 것을 알 때에야 비로소 의사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처럼 여러분은 인간이 거의 아무 가망도 없는 처지에 있다는 점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인들의 말을 이해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왜 인간이 지금처럼 선을 미워하는 동시에 사랑하는가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도덕률 배후에 있는 비인격적 정신인 동시에 인격일 수 있는지에 관해서도 설명해 줍니다. (64-65)

물론 저는 기독교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안을 준다는 사실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제가 지금까지 말해 온 것과 같은 낭패감에서 출발하는 종교로서, 그 낭패감을 먼저 겪지 않는 한 아무리 위안을 얻으려고 노력한들 소용이 없습니다. 전쟁이나 그 밖의 경우에도 그렇지만 종교에서도 위안은 구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진리를 구한다면 결국 위안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위안 그 자체를 구한다면 위안도 진리도 얻지 못한 채, 오로지 감언이설과 몽상에서 출발해서 절망으로 마치고 말 것입니다. (65)



 

<2부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믿는가?>


1장 '하나님'과 경쟁하는 개념들

그러나 기독교의 개념은 전혀 다릅니다. 그들은 사람이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하듯이 하나님이 우주를 창안하고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화가와 그림은 별개의 존재이기 때문에 그림이 파괴되어도 화가는 죽지 않습니다. "화가가 그림 속에 자신을 쏟아 부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그 그림의 아름다움과 감흥이 모두 화가의 머리에서 나왔다는 뜻에 지나지 않습니다. 화가의 기교는 원래 그의 머리에 있는 것으로서 간혹 "그 손에 있다'고 표현할 수는 있어도 "그 그림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72)

2장 하나님의 침공

그런데 무신론만큼이나 단순한 관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물 탄 기독교Christianity-and-water'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하늘에 선한 하나님이 계시니 만사형통"이라고 말하는-죄니 지옥이니 악마니 구속이니 하는 어렵고 무서운 교리들은 전부 제쳐 놓은 채- 입장입니다.이 두가지는 전부 미숙한 철학입니다. (76)

종교를 단순하게 만들 수 있다는 개념에 주의하십시오. 이것은 '종교'가 '자신의 본성에 관한 절대 불변의 사실들을 공표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단순한 하나님의 발명품인 양 착각한 데서 비롯된 개념입니다. (78)

사실 실재란 대개 여러분이 짐작할 수 없는 어떤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기독교를 믿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기독교는 여러분이 짐작할 수 없는 종교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우리가 늘 생각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우주를 제시한다면, 저는 기독교를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기독교는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부류의 것이 아닙니다. 실재하는 것들이 다 그렇듯이 기독교에도 우리의 예상과 맞지 않는 기묘한 비틀림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미숙한 철학들-지나치게 단순한 답들-은 다 제쳐 두기로 합시다. 문제 자체가 단순하지 않고, 따라서 답 또한 단순하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78-79)

3장 충격적인 갈림길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한 악한 권세가 현재 이 세상의 군주 형세를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당연히 나올 질문이 있지요. 이런 현 상태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은 것입니까? 만약 일치한다면 하나님은 그야말로 이상한 분이 되어 버립니다. 반면에 일치하지 않는다면, 절대적 권세를 가진 존재의 뜻에 반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86)

하나님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자유 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옳은 일을 할 수도 있고 그른 일을 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자유 의지를 가졌으면서도 그릇 행할 가능성은 전혀 없는 존재를 상상하는 이들도 있지만, 저로서는 그런 존재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선해질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악해질 수 있는 자유도 있는 법입니다. 악을 가능케 한 것은 바로 이 자유 의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사람들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을까요? 악을 가능케 하는 것도 자유 의지지만, 사랑이나 선이나 기쁨에 가치를 부여하는 유일한 것 또한 자유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자동기계-기계적으로 움직이는 피조물들-의 세계는 창조할 가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고등한 피조물들에게 주고자 하시는 행복은 사랑과 즐거움의 절정에서 자유로우면서도 자발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며 이웃과 연합하는 데서 생겨나는 행복으로서, 거기에 비하면 지상에서 남녀가 나누는 가장 황홀한 사랑조차 물 탄 우유처럼 싱거울 것입니다. 바로 이런 행복을 누리기 위해 인간은 자유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유를 잘못 사용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88)

'어두운 권세'는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인간이 확실히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타락했던 경험에 비추어 합리적으로(그리고 전통에 의거하여)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아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갖게 되는 순간, 여러분에게는 자기 자신을 앞세울 가능성-스스로 중심에 있고 싶어 할 가능성, 사실상 하나님이 되고 싶어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지은 죄였고, 사탄이 인류에게 가르친 죄입니다. 어떤 이들은 인간의 타락이 성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창세기의 이야기는 오히려 타락 이후에야 성적인 본성이 부패하게 되었다는 것, 즉 성적 부패는 타락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탄이 우리 옛 조상들의 머릿속에 불어넣어 준 생각은 그들도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마치 스스로 자신을 창조하기라도 한 양 자존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다, 하나님 밖에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89-90)

이것이 역사를 푸는 열쇠입니다. 인간은 엄청난 에너지를 썼습니다. 여러 문명을 건설했습니다. 훌륭한 제도들을 고안했습니다. 그러나 매번 무언가가 잘못되었습니다. 언제나 몇 가지 치명적인 결함 때문에 이기적이고 잔인한 인간들이 우두머리가 되었고, 모든 것을 비참한 파멸로 몰고 갔습니다. 사실상 이 기계는 망가졌습니다. 출발은 잘한 것 같았고 처음 얼마간은 제대로 가는 것 같았지만 곧 고장나버렸습니다. 인간은 잘못된 연료를 넣고 달리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지금껏 우리에게 해 온 짓입니다. (91)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나는 예수를 위대한 도덕적 스승으로는 기꺼이 받아들이지만,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주장만큼은 받아들이 수 없다"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을 그 누구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 불과한 사람이 예수와 같은 주장을 했다면, 그는 결코 위대한 도덕적 스승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정신병자-자신을 삶은 계란이라고 말하는 사람과 수준이 똑같은 정신병자-거나 아니면, 지옥의 악마일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지금도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미치광이거나 그보다 못한 인간입니다. 당신은 그를 바보로 여겨 입을 틀어막을 수도 잇고, 악마로 여겨 침을 뱉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려 하나님이요 주님으로 부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니 어쩌니 하는 선심성 헛소리에는 편승하지 맙시다. 그는 우리에게 그럴 여지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그럴 여지를 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94-95)


4장 완전한 참회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무엇을 하려고 세상에 온 것입니까? 물론 그는 가르치려고 왔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이나 다른 기독교 저술들을 살펴보면 무언가 다른 일-그의 죽음과 다시 살아남-에 대해 계속 이야기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이야기의 주안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그가 이 땅에 온 주된 목적이 고난받고 죽임당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96-97)

제가 나중에 알게된 것은 이 이론(그리스도의 대속)뿐 아니라 다른 어떤 이론도 그것이 곧 기독교는 아니라는 점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떤 방식으로든지 간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해 주며 새로이 출발하게 해 주었다는 데 있습니다. (97)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야말로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가 바깥으로부터 우리 세상으로 뚫고 들어온 역사의 지점이라고 믿습니다. (99)

그렇다면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느냐고 물을 수 있겠지요.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했으며, 그 죽음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었고, 그가 죽음으로써 죽음의 세력이 힘을 잃었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것이 공식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어야 하는 바입니다. (100)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지성의 바다에서 물방울이 떨어져야 비로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죽음을 나누어 가질 때에만 회개라는 죽음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104)

그렇다면 인간이 빠져 있는 '곤경'이란 어떤 것일까요? 스스로 독립적인 위치에 서려고 한 것, 스스로 자기의 주인인 양 행세하려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타락한 인간은 개선의 필요가 있는 불완전한 피조물이 아니라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반역자입니다.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하면서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 그동안 잘못된 길을 걸어왔음을 깨닫고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준비를 하는 것, 이것이 '곤경'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렇게 항복하는 과정-전속력을 다해 뒤로 도는 동작-을 그리스도인들은 '회개'라고 부릅니다. 회개는 장난 삼아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히 굴욕을 감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수천 년간 익혀온 자기 만족과 자기 의지를 버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의 일부를 죽이는 것, 일종의 죽음을 겪는 것을 뜻합니다.

사실 회개는 선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정작 회개가 필요한 사람은 악한 사람인데, 완전한 회개는 선한 사람만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여러분이 악해질수록 회개의 필요성은 점점 더 커지고 회개할 능력은 점점 더 적어집니다. 완전하게 회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완전한 인간-회개할 필요가 없는 인간-뿐입니다.

이 회개. 즉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며 일종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일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로 찾으시기 전에 먼저 요구하는 사항이 아닐 뿐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면제해 줄 수 있는 일 또한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회개란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표현법일 뿐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반드시 회개를 거쳐야만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회개의 필요성을 주는 그 악함이 동시에 우리를 회개할 수 없게 만든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회개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대체 어떤 뜻에서 하나님이 우리는 도우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은 이를테면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조금 넣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는 자신의 추론 능력을 우리에게 조금 빌려 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조금 넣어 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5장 실제적인 결론

몸이 살아 있다는 것은 절대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어느 한도까지는 스스로 회복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란 절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 몇 번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사람 - 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매번 그를 회복시키며 그리스도처럼 일종의 자발적인 죽음을 반복할 수 있게(어느 정도 까지는) 해 주므로 - 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여타의 사람들과 구별되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 선하게 살려는 사람들은 그렇게 삶으로써 만약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를 만족시키기를 바라며, 아니면 적어도 선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할 경우에-바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선한 생동은 모두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지요.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선하게 만드신다고 생각합니다. (112)

하나님은 세상을 침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드러내놓고 직접 세상에 간섭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그 뜻을 알고 말하는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날은 바로 세상이 끝나는 날입니다. 극작가가 무대 위로 걸어나오면 연극은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세상을 침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계 전체가 하룻밤 꿈처럼 사라지고 무언가 다른 것-그 전까지는 한번도 생각지 못했던 무언가-이 밀고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될 그날,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아름답게,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무섭게 다가와 더 이상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을 그날에 가서야 그의 편이라고 나서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때 하나님은 변장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 모습은 너무 압도적이어서 피조물들은 저마다 거역할 수 없는 사랑에 뒤덮이든지, 거역할 수 없는 공포에 뒤덮일 것입니다. 그때에야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선택하려 들면 이미 늦습니다. 일어서는 것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엎드리겠다고 말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입니다. 그 때는 선택의 때가 아닙니다. 그 때는 우리가 참으로 어느 편을 선택했는지 드러나는 때이고, 우리가 그 사실을 전에도 알았는지 몰랐는지 깨닫게 되는 때입니다. (115)
지금, 오늘 이 순간이야말로 옳은 편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의 때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기회를 주려고 잠시 지체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영원히 지체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기회를 잡든지 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115-116)


<3부 그리스도인의 행동>


1장 도덕의 세 요소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봅시다. 인간이라는 기계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잘못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개인들이 각기 따로 놀거나 충돌함으로써 서로에게 해를 입히는 경우로서, 속임수를 쓰거나 횡포를 부릴 때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다른 하나는 각 개인의 내부에 무언가 문제가 생기는 경우, 즉 한 개인을 이루고 있는 서로 다른 부분들(각기 다른 기능과 욕구 등)이 각기 딸로 놀거나 충돌하는 경우입니다.
인간을 편대를 지어 항해하는 선단에 비유하면 이 점이 더 명확히 이해될 것입니다. 항해가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배들이 서로 충돌하지 말아야 하며 다른 배의 항로를 방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각각의 배들은 항해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며 양호한 엔진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만약 배들이 서로 충돌을 거듭한다면 머잖아 항해에 적합한 조건을 상실할 것입니다. 반면에 각 배의 조타 장치에 이상이 생기면 배들은 충돌을 면할 도리가 없겠지요. 또는 인류를 어떤 곡을 연주하는 악단에 비유해도 좋겠습니다. 연주가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합니다. 즉, 각 연주자들의 악기가 잘 조율되어 있어야 하며, 각각의 악기는 다른 악기들과 잘 융화될 수 있도록 정확한 순간에 소리를 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고려하지 않은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선단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어디인가, 이 악단이 연주하고자 하는 곡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아무리 악기들이 잘 조율되어 있고 정확한 순간에 소리를 냈다 해도 춤곡을 연주해야 할 상황에서 장송곡을 연주했다면, 그 연주는 성공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또 선단이 아무리 순조롭게 항해했다 해도 뉴욕에 가야 할 배들이 캘커타에 도착했다면, 그 항해는 실패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도덕은 세 가지 사항과 관련이 있습니다. 첫 번째, 도덕은 각 개인이 서로 공평하게 처신하며 조화를 이루는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 번째, 각 개인의 내면에 있는 것들을 정도, 또는 조화시키는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세 번째, 인류의 삶 전체가 지향하는 보편적인 목적, 즉 인간은 무엇을 위해 창조되었는가, 선단이 가야 할 경로는 무엇인가, 악단 지휘자가 연주하려는 곡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현대인들이 거의 언제나 첫 번째 사항만 생각할 뿐, 나머지 두 가지 사항은 잊고 있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123-124)

2장 기본 덕목


여러분 중에 혹시 그리스도인이 될까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까? 그것은 곧 두뇌를 비롯한 자신의 모든 것을 요구하는 일에 뛰어드는 것임을 미리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일은 우리의 생각과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정직하게 노력하기만 하면 어느새 지성이 예리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따로 특별한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는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가 바로 교육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버니언처럼 교육받지 못한 신자가 온 세상을 놀라게 만든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132)
마찬가지로 꾸준히 정의로운 행동을 하는 사람은 결국 일정한 인격적 특질을 갖추게 됩니다. 우리가 말하는 '덕목'이란 특정 행동이 아니라 바로 이런 특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구분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특정 행동만을 덕목으로 여긴다면, 다음과 같은 세가지 그릇된 생각을 조장하게 될 것입니다.

(1) 옳은 행동을 하기만 하면, 어떻게 왜 그 행동을 했느냐-기꺼이 했느냐 마지못해 했느냐, 부루퉁하게 했느냐 기분좋게 했느냐, 여론이 두려워서 했느냐 그 일이 옳기 때문에 했느냐-는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기가 그를 때에는 아무리 옳은 행동을 한다 해도 정작 중요한 내면의 특질이나 성품, 즉 '덕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형성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실력이 변변찮은 선수가 강한 스트로크의 필요성을 간과해서가 아니라 그저 홧김에 세게 친 공이 운 좋게 경기를 승리로 이끄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요. 그렇다고 해도 그 일은 그가 믿을 만한 선수로 자라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2)그저 하나님이 정하신 한 묶음의 규칙만 따르면 된다고 생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특정한 종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3) '덕목'은 현세에만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될 수 있습니다. 내세에는 다툴 일이 없을 테니 정의로울 필요가 없고, 위험이 없을 테니 용감할 필요도 없으리라는 것이지요. 다음 세상에서 정의롭거나 용기 있게 행동해야 할 기회는 정말 없을지도 모르지만, 이곳에서 정의롭고 용감한 행동을 해야만 형성될 수 있는 됨됨이는 여전히 요구될 것입니다. 제 말의 핵심은, 일정한 인격적 특질을 갖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제 말의 핵심은, 이러한 특질이 그 내면에서 싹조차 나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리 외부 조건이 좋은 곳도 '천국'이 될 수 없다는 것, 즉 그들은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그 깊고도 강하며 흔들리지 않는 행복을 행복으로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35-136)

3장 사회도덕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한 기독교의 도덕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 영역에서 새로운 종류의 특별한 도덕을 설파하기 위해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황금률("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모든 사람이 속으로 늘 옳다고 생각해 온 바를 요악한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도덕 선생들은 새로운 도덕을 소개한 적이 없습니다. 가짜와 괴짜들이나 새 것을 소개하는 법입니다. 존슨Samuel Johnson 박사 말처럼 "사람은 가르쳐야 할 때보다 기억시켜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모든 도덕적 스승들의 진정한 임무는, 우리가 자꾸 외면하고 싶어하는 단순한 옛 원칙들을 몇 번이고 다시 일깨우는 것입니다. (137)

사람들은 "교회가 세상을 이끌어야 한다"고들 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으로 말했느냐에 따라 옳은 말이 될 수도 잇고, 그른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옳은 말이 되려면 그들이 말하는 바 '교회'는 곧 실천적인 그리스도인 전체를 가리켜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을 이끈다'는 말은 어떤 그리스도인들-경제나 정치에 적합한 재능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경제학자나 정치가가 되어야 하며, 모든 경제학자와 정치가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하고, 그들은 정치 경제 분야에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원칙을 실천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뜻이 되어야 합니다. (139)

기독교 사회는 우리 대다수가 진정으로 원하기 전에는 도래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그런 사회를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을 입술이 까맣게 타도록 되뇌일 수 있지만,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기 전까지는 그 말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 사랑하기를 배우지 않는 한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 한 그 분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145)


4장 도덕과 정신분석


심리적 재료가 나쁜 것은 죄가 아니라 병입니다. 따라서 회개할 것이 아니라 치료받아야 합니다. 이 점은 아주 중요합니다. 인간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보고 서로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들의 도덕적 선택을 보고 판단하십니다.

~우리는 사람의 원재료에서 나온 선택의 결과만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원재료만을 보고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원재료로 무엇을 했느냐를 보고 판단하십니다. 심리적 기질의 대부분은 대개육체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까 육체가 죽으면 그 모든 기질 또한 떨어져 나가고, 진짜 그 사람의 중심, 선택을 내렸던 그것, 자신이 가진 재료로 최선의 것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최악의 것을 만들어 내기도 했던 그것만이 벌거벗은 모습으로 남을 것입니다. (150-151)

사람들은 기독교 도덕을 "네가 이 많은 규칙들을 지키면 상을 주고 지키지 않으면 벌을 주겠다"고 말하는 하나님과 흥정하는 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기독교 도덕을 바라보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저라면 오히려 여러분이 매번 선택을 내리는 행위는 여러분의 중심, 즉 선택을 내리는 그 부분을 조금씩 전과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가는 일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수없는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생애 전체를 놓고 볼 때, 여러분은 이 중심부를 평생에 걸쳐 천구의 피조물로 바구어가든지, 지옥의 피조물로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151-152)

이미 말씀드렸듯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면 평화뿐 아니라 지식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사람은 선하면 선해질수록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악을 더 분명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악해지면 악해질수록 자신의 악을 깨닫지 못하지요. 어느 정도 악한 인간은 자기가 그리 좋은 사람은 못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철저하게 악한 사람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것은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깨어 있을 때는 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막상 자고 있을 동안에는 모르는 법입니다. 맑은 정신으로 제대로 계산하고 있을 때에는 실수를 해도 금방 알아채지만, 틀리게 계산하고 있는 동안에는 자기 실수를 알아채지 못하지요. 취하지 않았을 때는 취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취해 있는 동안에는 모릅니다. 선한 사람은 선도 악도 다 알지만, 악한 사람은 선도 악도 다 모릅니다. (153-154)

5장 성도덕


어떤 정신없는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기독교가 성이나 육체나 쾌락을 본질적으로 악하게 여기는 양 말한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틀렸습니다. 기독교는 위대한 종교들 중 육체를 철저히 인정하는 거의 유일한 종교로서, 물질은 선한 것이고 하나님 자신도 인간의 몸을 입으신 적이 있다는 것을 믿으며, 또한 우리는 천국에서 새로운 종류의 몸을 갖게 될 텐데 그 몸은 우리의 행복이나 아름다움이나 활력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리라는 것을 믿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 결혼을 찬양합니다. (161)

6장 그리스도인의 결혼


이른바 '사랑을 느끼는' 황홀한 상태는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유익을 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너그럽고 용감해지도록 도와 주며, 연인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에 눈뜨게 해 주고, 단순한 동물적 성욕을 억제해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정욕을 이기는 위대한 정복자입니다. (174)


7장 용서


저 자신을 좋게 생각하거나 호감 주는 인간으로 생각하느냐고요? 글쎄요, 감히 그럴 때도 있긴 하지만 그것이 곧 저 자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아닙니다.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지요. 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호감 주는 인간으로 여기는 것이지, 제가 원래 호감 주는 인간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 또한 우리를 크게 안심시켜 줍니다. "원수를 용서하라"는 말씀을, 실제로는 악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을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여기라는 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꽤 많지요.
~오래 저에 기독교의 스승들이 사람의 악한 행위는 미워하되 그 사람 자체는 미워하지는 말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는 군요. 그들이 늘 말했듯이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저는 이런 구분이 너무 지나쳐서 우습기까지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어떤 사람의 행위는 미워하면서 그 사람은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몇 년 후, 제가 평생 동안 그렇게 대해 온 사람이 하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저 자신이었습니다. 저는 자신의 비겁함이나 자만심이나 탐욕은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계속 자신을 사랑해 왔습니다. 그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제가 그런 것들을 미워한 이유는 바로 저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짓을 저지르는 종류의 인간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토록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기독교는 잔인한 행동이나 배신 행위에 대한 미움을 티끌만큼이라도 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187)
~ 즉,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그에게 호감을 가지라거나 그가 근사한 사람이 아닌데도 근사한 사람이라고 말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잘되기를 바라라는 것입니다. (191)


8장 가장 큰 죄


사람들이 이보다 더 싫어하는 악이 없으면서도, 이보다 더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악도 없습니다. 이 악이 많이 있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이 악을 더 싫어합니다. 제가 말하는 이 악이란 바로 '교만pride', '자만self-conceit'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덕목을 기독교 도덕에서는 '겸손'이라고 부르지요.
~기독교 스승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가장 핵심적인 악, 가장 궁극적인 악은 교만입니다. 성적 부정, 분노, 탐욕, 술 취함 같은 것들도 이 악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합니다. 악마는 바로 이 교만 때문에 악마가 되었습니다. 교만은 온갖 다른 악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맞서는 마음 상태입니다. (194)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은 다른 악들은 이를테면 다만 우연히 경쟁적이 되는 반면, 교만은 본질적으로 경쟁적이라는 것-본성상 원래 경쟁적이라는 것-입니다. (195)

우리도 언제든지 이런 죽음의 덫에 걸려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볼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자신이 신상 생활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선한 사람으로 느껴질 때는-특히나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낫게 느껴질 때는-확실히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를 따르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진짜 시금석은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느냐', 또는 '나 자신을 하찮고 더러운 존재로 여기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중에서도 더 좋은 쪽은 자신에 대해 완전히 잊는 것이지요. (198)

겸손해지고 싶어하는 분들이 있다면, 제가 그 첫걸음을 알려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그 첫걸음이란 바로 자신이 교만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204)


9장 사랑


기독교적 의미의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감정의 상태가 아니라 의지의 상태로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남에 대해서는 배워서 익혀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용서를 다루는 장에서, 우리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해서 꼭 자신을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지적했습니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이 잘되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웃을 기독교적으로 사랑하는 것과 가들을 좋아하거나 그들에게 애정을 느끼는 것은 아주 다른 일입니다. (206)

좋아하는 마음이나 애정이 절로 생기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비교적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애정을 붇돋는 것-할 수 있는 한 사람들을 많이 '좋아하는 것'-은 우리의 정상적인 의무입니다(몸에 유익한 음식이나 운동을 좋아하려고 애쓰는 것이 의무이듯 말이지요). 그렇게 좋아하는 마음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마음이 사랑에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특정한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그 외의 사람들을 사랑 없이 대하거나 부당하게 대하지 않도록 아주 에민하게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207)

우리에게 주어진 법칙은 아주 간단합니다. 자신이 이웃을 사랑하나 사랑하지 않나 고민하는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그냥 그를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십시오. 그러면 곧 위대한 비밀 하나를 발견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 치고 행동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로 그를 사랑하게 된다는 비밀 말입니다. (207)


10장 소망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떠난다는 듯이 아닙니다. 역사를 더듬어 보면, 이 세상을 위해 가장 많이 일한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다음 세상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했던 이들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 국가로 전환하는 데 토대를 놓은 사도들이나 중세를 확립한 위대한 인물들, 노예 제도를 폐지시킨 영국의 복음주의자들이 지구상에 이 모든 흔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마음이 천국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다음 세상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면서, 기독교는 세상에서 그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천국을 지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지향하면 둘 다 잃을 것입니다. (212-213)

'그런데 만약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내 안에 있다면, 그런 내가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에 맞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애길 거야. 지상의 쾌락으로 그 욕구를 채울 수 없다고 해서 우주 전체를 가짜로 볼 수는 없어. 아마 지상의 쾌락은 처음부터 이 욕구를 채우기 위해 생긴 게 아니라, 다만 이 욕구를 일깨워 주고 진짜 쾌락이 어떤 건지 암시해 주려고 생긴 걸 거야. 그렇다면 한편으로는 이 지상의 축복들을 반갑잖게 여기거나 무시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쾌락들이 복사판이나 메아리나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지. 진짜 고향을 그리워하는 욕구는 죽은 후에야 채워질 수 있는 것이니만큼, 이것이 사라지지 않도록 잘 지켜야겠다. 이 욕구가 다른 욕구에 짓눌리거나 밀려나지 않게 하자. 나 자신이 그 나라를 향해 나아갈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 나라를 향해 나아가도록 돕는 일을 내 삶의 주된 목표로 삼자." (216)

"나는 영원히 하프나 타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면서 그리스도인이 가진 '천국'의 소망을 우습게 만들려는 경박한 이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전혀 개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른들의 책을 읽는 법도 모르거든 잠자코 있거나 하라고 말해 주면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천국의 이미지들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동원된 것일 뿐입니다. (217)


11장 믿음(1)


기독교를 믿을 때에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기독교를 믿으라는 것은, 잘 추론해 본 결과 기독교를 믿을 증거의 무게가 충분치 않은데도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믿음은 그렇게 생기지 않습니다. (221)

제가 여기에서 사용하고 있는 의미의 믿음은, 아무리 기분이 바뀌어도 한번 받아들인 것은 끝까지 고수하는 기술art입니다. 기분은 이성의 생각과 상관 없이 변하는 법입니다. (222)

믿음의 습관을 훈련하는 첫 단계는 사람의 기분은 바뀌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상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시간을 내서 그 주요 교리들을 찬찬히 정신에 새겨 나가는 것입니다. 매일 기도하며 성경과 경건 서적을 읽고 교회에 나가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지속적으로 상기할 필요가 있습비다. 가만히 내버려 두는데도 정신 속에 살아남을 수 있는 신념은 없습니다. (222)

여러분은 '겸손해지는 첫 단계는 자기가 교만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고 했던 말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제 저는 거기에 '그 다음 단계는 기독교의 덕목들을 실천하기 위해 진지하게 시도해 보는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223)

선을 행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 보기 전까지는 자기가 얼마나 악한 인간인지 깨닫지 못하는 법입니다. 선한 사람들은 유혹이 어떤 것인지 모를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이 요즘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유혹에 맞서 싸워 본 사람만이 유혹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압니다. (223)

우리가 기독교의 덕목들을 진지하게 실천해 보고자 할 때 알게 되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224)

사람이 이 두가지 사실(우리가 실패한다는 것과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발견할 때에야 하나님은 실제로 일을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진정한 삶이 시작됩니다. 그 사람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것입니다. (225)


제가 보기에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하나님에 대해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런 시험이나 거래에 관련된 생각을 합니다. 진정한 기독교를 믿을 때 처음 생기는 일은 그런 생각이 산산조각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생각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보면서, 자기한테 기독교는 끝났다면서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주 단순한 분으로 상상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십니다. 이런 생각을 산산조각 내는 것은 본래 기독교가 수행하게 되어있는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225)

12장 믿음(2)


바로 전에 말했듯이, 이 두 번째 의미로서 믿음의 문제는 기독교 도덕을 실천하려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패한 후에야, 또 설사 실천에 성공하였다 해도 그것은 원래 하나님의 것을 돌려드린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에야 비로소 대두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완전히 파산했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에야 대두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행동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우리가 일정한 특성을 가진 피조물이 되느냐-그의 의도에 맞는 피조물이 되느냐, 일정한 방식으로 그와 관계를 맺는 피조물이 되느냐-에 있습니다. (229)

여러분은 이제 구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이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하는 것입니다. 즉,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천국을 바라서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찬국의 희미한 빛줄기를 마음으로 이미 맛보았기에 때문에 자연히 이렇게 행동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이런 일들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232)

사람은 도덕적인 노력을 진지하게 기울여 봐야만 항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그 절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로 그 믿음으로부터 반드시 선한 행동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233)


<4부 인격을 넘어서, 또는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첫걸음>

1장 만드는 것과 낳는 것

지도가 색칠한 종이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이 아무리 사실이라 해도, 여러분이 지도에 관해 기억해야 할 사실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그 지도가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진짜 대서양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그 지도의 이면에는 해변에서 바다를 본 당신의 경험 못지 않게 생생한 경험의 덩어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둘째는, 여러분이 어딘가 가고자 할 때는 지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해변을 거니는 데 만족한다면 지도를 보느니 해변에서 직접 바다를 보는 편이 훨씬 재미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 가고 싶다면 해변을 거니는 것보다는 지도를 보는 편이 훨씬 유용할 것입니다.
신학은 지도와 같습니다.

기독교 신조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하들로 '창조되신 것이 아니라 나셨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모든 세계가 창조되기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셨다'는 말이 덧붙여 있습니다. (중략)

현대 영어에는 낳다begetting나 태어나다begotten라는 말을 쓰지 않지만 그 뜻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낳는다는 말은 아버지가 된다는 뜻이고, 창조한다는 것은 만든다는 뜻이지요. (중략)

그러나 인간이 자연적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영적인 생명-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으로서 생물학적 생명과 다른 생명, 그보다 더 위에 있는 생명-입니다. 우리는 두 가지 다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고 두 생명을 같은 종류로 생각한다면, 우주의 '광대함'과 하나님의 '광대함'을 같은 종류로 생각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2장 삼위이신 하나님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의 설명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됩니다. 인간적인 차원은 단순하며 어느 정도는 비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한 인격은 한 존재이며, 두 인격은 별개의 두 존재입니다. 2차원에서 한 정사각형은 한 도형이고, 두 정사각형은 별개의 두 도형인 것처럼 말이지요. 신적인 차원에도 인격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인격체들은 그 차원에서 살지 않는 사람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즉, 여러분은 하나의 차원에서 세 인격인 동시에 하나인 존재를 보게 됩니다. 정육면체가 하나의 정육면체인 동시에 여섯 개의 정사각형인 것처럼 말이지요. (중략)

한 단계 더 높여 봅시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알고 싶어 한다고 합시다. 그가 단호하게 여러분의 접근을 거절할 경우, 여러분은 그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를 알려면 먼저 그의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이 경우에 주도권은 양측에 똑같이 주어집니다. 두 사람 다 원하지 않으면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 그 주도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보여 주시지 않는 한 우리는 무슨 수를 써도 그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략)

기독교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라면 지금보다 훨씬 단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순성이라는 점에서는 새로이 종교를 창안해 내는 사람들과 경쟁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경쟁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는 '사실'을 다루는 데 말입니다. 물론 신경 써야 할 '사실'이 없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단순해질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3장 시간과 시간 너머


하나님이 시간에 매여 살지 않으신다는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삶은 연속되는 순간들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작가가 소설 속 가상의 시간에 쫓기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주의 시간 흐름속에 쫓기지 않으십니다. 시간을 우리가 곧장 따라가야 하는 직선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 직선이 그려진 종이 전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직선의 일부를 한 걸음씩 밟아나갑니다. 우리는 A를 지나야 B에 갈 수 있으며 B를 지나야 C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위에서, 밖에서, 또는 사방에서 이 직선 전체를 품고 계시며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완전한 실재이므로 역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시간 속에 매여 산다고 믿을 때 등장하는 어려움이 또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은 우리가 내일 할 일을 알고 계신다'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말 내가 내일 할 행동을 알고 계신다면, 나에게는 그와 다르게 행동할 자유가 없는 것 아닙니까? 이것 역시 하나님을 우리처럼 시간 흐름에 매여 사는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즉 하나님은 앞일을 미리 안다는 점에서만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어려움입니다. 자, 그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하나님이 우리의 행동을 예견하신다면, 우리에게 행동의자유가 있다고 보기는 대단히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시간의 흐름 밖, 그 위에 계신 분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그는 우리가 '내일'이라고 부르는 날도 '오늘'처럼 보실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모든 날이 '지금'입니다. 그는 여러분이 어제 한 일을 기억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고 계십니다. 여러분에게는 어제가 이미 지나가 버렸지만 하나님께는 지나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당신이 내일 할 일을 예견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고 계십니다. 당신에게는 내일이 오지 않았지만 하나님께는 이미 왔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하나님이 아신다고 해서 자유롭지 못할 사람도 없습니다. 그는 바로 이런 방식으로 당신이 내일 할 일을 아시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내일에 계시면서 당신을 지켜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당신이 행동하기 전까지는 어떤 행동을 할지 모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그 행동을 하는 순간, 하나님에게는 이미 '지금'이 됩니다. (264-265)


4장 좋은 전염


이번 장은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려 보는 것으로 시작할까 합니다. 책상 위에 책이 두 권 있는데, 한 권이 다른 책 위에 얹혀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 때 위 책을 위에 있게 해 주는 것-즉 지탱해 주는 것-은 분명 아래 책입니다. 이를테면 위 책이 책상 표면에 닿지 않고 2인치쯤 위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래 책이 떠받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 책을 A, 이 책을 B라고 합시다. 의 위치는 의 위치에 원인을 제공합니다. 맞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 두 책이 원래부터 계속 이런 위치에 있었다고-물론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하나의 예로서 그럴 수 있다고-상상해 봅시다. 이 경우에도 B의 위치는 언제나 A의 위치에서 나온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B가 이런 위치에 있기 전에 A가 먼저 이런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원인이 먼저 있고 결과가 다음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대개는 원인이 먼저 있어야 결과가 나타납니다. (하략)


조금 전에 저는 책 두 권을 상상해 보라고 했고, 여러분 대부분 제 말대로 하셨을 것입니다. 즉, 여러분은 상상하는 행위를 했고, 그 결과 머릿속에 그림 하나를 얻었습니다. 이때 상상하는 행위는 원인이고 머릿속 그림은 결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상상하는 행위가 먼저 있었고, 그 후에 그림이 그려진 것은 아닙니다. 상상하는 순간, 이미 그림은 그려져 있었습니다. 물론 그 그림을 계속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는 것은 여러분의 의지입니다. 그러나 그 의지적 행위와 머릿속 그림은 정확하게 같이 시작해서 정확하게 같이 끝납니다. (하략)


이와 마찬가지로 등불에서 빛이, 난로에서 열이, 정신에서 생각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이를테면 성자도 성부에게서 영구히 흘러나온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성자는 성부의 자기 표현-성부가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성부가 말씀하시지 않은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쯤에서 무언가 짐작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면서 대대는 성령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성령은 항상 여러분을 통해 움직이십니다. 성부가 여러분 앞 '저기' 계시는 준이고 성자가 여러분 옆에서 기도를 도우시며 여러분을 아들로 바꾸시는 분이라면, 성령은 여러분 안 또는 뒤에 계시는 분입니다.


이 삼위 하나님의 생명이 보여주는 춤, 드라마, 또는 양식의 전체는 우리 각자의 생명 속에 재현되어야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각 사람은 그 양식 속에 들어가야 하고 그 춤에 참여해야 합니다. 그 외에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나쁜 것뿐 아니라 좋은 것도 전염됩니다. 따뜻해지려면 불 가까이 가야 합니다. 몸을 적시려면 물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기쁨과 능력과 평화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그것을 가진 존재에게 가까이 가야 하며, 더 나아가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하략)

기독교가 제시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하시도록 자신을 그분께 맡기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에 동참하게 됩니다. 만든 생명이 아니라 낳은 생명, 언제나 있었고 언제나 있을 생명을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생명에 동참하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됩니다. 우리는 그가 성부를 사랑하듯이 성부를 사랑할 것이며, 그러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펴뜨리기 위해-제 표현대로라면 '좋은 전염'을 시키기 위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작은 그리스도가 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목적은 오직 이것 하나뿐입니다.


5장 고집센 장난감 병정들


6장 두가지 부연 설명


오해를 피하기 위해, 지난 장의 내용에 대해 두 가지 부연 설명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1) 어떤 지각 있는 비판적 독자가 제게 편지를 보내, 하나님이 장난감 병정들이 아니라 아들을 원하신다면 처음부터 아들을 많이 낳으면 되지 왜 굳이 장난감 병정들을 먼저 만든 다음 굳이 그토록 어렵과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생명을 주느냐고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답의 일부분은 아주 쉽지만, 다른 일부분은 인간의 지식을 뛰어넘습니다.

쉬운 부분부터 말해 봅시다. 인류가 오래 전에 하나님께 등을 돌리지 않았다면, 피조물에서 아들로 변화되는 과정이 그토록 유별나거나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인류가 하나님께 등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이 인류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것은, 자동 인형에 불과한 존재는 사랑할 수 없으며, 따라서 무한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즉, 가장 밑바닥에 있는 초석, 다른 모든 사실을 떠받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사실'에 대해- "지금과 달랐을 수도 있지 않은가?"라고 묻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 '사실'은 현재 그 모습이 전부이며, 더 이상 논의할 여지가 없습니다.

(2) 인류 전체가 어떤 의미에서 하나의 단일체-나무 같은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라는 개념을, 개인적 차이는 중요치 않다거나 탐이나 노비나 케이트 같은 실제 인물보다는 계급이니 종족 같은 집단이 더 중요하다는 사상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정반대 되는 것입니다. 같은 유기체에 속하는 것들도 아주 다를 수 있고, 같은 유기체에 속하지 않는 것들도 아주 비슷할 수 있습니다. (중략) 기독교는 인간 개개인을 단순히 어떤 모임에 속한 구성원이나 목록에 나열된 항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한몸의 기관들-자기만의 역할을 수행하는 서로 다른 존재들-로 봅니다.
여러분의 자녀나 학생, 심지어 이웃들을 당신의 판박이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과 그 사람들은 각기 다른 기관으로서 각기 다른 역할을 감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보고서도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하며 무관심하고 싶은 마음이 들거든, 그가 여러분과 다른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같은 유기체의 일부임을 기억하십시오. 그가 여러분과 같은 유기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잊을 때 여러분은 개인주의자가 됩니다. 반면에 그가 여러분과 다른 기관이라는 것을 잊을 때, 각자의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사람을 획일화시키고자 할 때 여러분은 전체주의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전체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되고 개인주의자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7장 가장합시다


이 장 역시 두 가지 그림 내지는 두 가지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한 가지는 누구나 읽었을 법한 이야기 <미녀와 야수>입니다. 기억하시겠지만, 한 아가씨가 어쩔 수 없는 이유로 괴물과 결혼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했지요. 아가씨는 사람에게 하듯 괴물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자 아가씨에게는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괴물은 청년으로 변했고, 두 사람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또 한 가지는 늘 가면을 쓰고 살아야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이 가면은 그 남장의 얼굴을 원래보다 더 잘생겨 보이게 했습니다. 남자는 이것을 수년간 써야 했지요. 그런데 어느 날 가면을 벗고 보니, 얼굴이 가면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 미남이 되었습니다. 위장이 현실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중략)
주기도문의 첫 문장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이것은 아주 정직하게 말해서,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의 아들 행세를 한다는 뜻입니다. (중략) 여러분은 자기 중심적인 두려움과 소원, 욕심, 질투, 자만 등 망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모아 놓은 꾸러미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로 분장한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 대단히 파렴치한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사실은 그리스도 자신이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중략)

그리스도의 도움이 없으면 사람의 도움도 없습니다. 그는 온갖 방법으로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로 여기는 부분을 통해서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을 통해서도, 우리의 몸을 통해서도, 책을 통해서도, 때로는 반기독교적으로 보이는(그 당시로서는) 경험들을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8장 기독교는 쉬울까, 어려울까?


기독교가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이것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기독교가 일반적 개념에서 도덕이나 선량함과 어떻게 다른지 짚어 보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는 보통 다음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욕구와 관심사를 가진 평범한 자아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그리고 이 자아와 다른 무언가-'도덕'이나 '바른 행동'이나 '사회적 안녕'-가 이 자아에 대해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점, 즉 자아의 욕구에 간섭할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요. '선량하다'는 것은 그 권리 주장에 승복한다는 뜻입니다. (하략)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한, 그 결과는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즉, 션량해지기를 포기하게 되든지, 아주 불행한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자, 보십시오. 자연적 자아에 대한 양심의 요구를 다 충족시키려다 보면 남아나는 것이 없습니다. 양심은 따르면 따를수록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하략)
기독교의 방식은 다릅니다. 더 어려우면서도 더 쉽지요. 그리스도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전부를 다오. 나는 너의 시간이나 돈이나 일을 원치 않는다. 나는 '너'를 원한다. 나는 너의 자연적 자아를 괴롭히러 온 것이 아니라 죽이러 왔다. 미봉책은 필요 없다. 나는 여기저기 나뭇가지를 쳐 내는 게 아니라 나무 자체를 아예 뽑고 싶다. 이를 뚫거나 씌우거나 막는 게 아니라 아예 뽑고 싶다. 너의 자연적 자아 전부를, 네가 악하다고 생각하는 욕망이나 죄 없는 욕망을 가리지 말고 전부 내게 넘겨다오. 그러면 그 대신 새 자아를 주마. 내 자아를 주만. 그러면 내 뜻이 곧 네 뜻이 될 것이다."
(중략)
우리는 교회에 다른 목적-교육, 건축, 선교, 예배-이 많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략)

마찬가지로 교회는 오직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어 작은 그리스도로 만들기 위해 존재합니다.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교회 건물도, 성직자도, 선교도, 설교도, 심지어 성경 자체도 시간 낭비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인가이 되신 목적은 단 하나뿐입니다. 이 우주 역시 다른 목적을 위해 창조되었을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성경은 전 우주가 그리스도를 위해 만들어졌으며, 모든 것이 그 안에 함께 모인다고 말합니다.


9장 대가를 계산하기


지난 장에서 말한 우리 주님의 말씀 "너희도 온전하라" 때문에 걱정하는 분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이 말의 뜻을 '네가 온전해지지 않으면 도와주지 않겠다'로 오해한 분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결코 온전해질 수 없는 우리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지요. 그러나 저는 그런 뜻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내가 유일하게 도울 일은 너를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다. 너는 그 이하를 바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이하에 만족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생각합니다.
(중략)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먼저 "대가를 계산하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그는 말씀하십니다. "잘 듣거라. 일단 너희가 나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너희를 온전하게 만들어 주겠다. 너희 자신을 내 손에 맡기는 순간, 내 목적은 오직 너희를 온전하게 만드는 그것뿐이다. 그 밖의 것도 안 되고 그 이하도 안 된다. 너희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으니 원한다면 나를 밀어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를 밀어내지 않겠다면, 내가 이 일을 끝까지 해내리라는 점을 명심하거라. 너희가 세상에서 어떤 고통을 대가로 치러야 하든지, 죽은 후에 어떤 알 수 없는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 하든지, 또 내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든지 간에, 너희가 말 그대로 온전해지기까지-내 아버지께서 나를 기뻐하신다고 하셨듯이 너희한테도 아무 망설임 없이 "내가 너희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실 수 있을 때까지-나는 결코 쉬지 않을 것이며 너희도 쉬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할 수 있고 이렇게 할 것이다. 그 이하의 것에는 결코 만족하지 않겠다."

10장 호감을 주는 사람이냐, 새 사람이냐


그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의 손에 자신을 맡기는 사람들은 그가 온전하신 것처럼-사랑과 지혜와 기쁨과 아름다움과 불멸성에서 온전하신 것처럼-온전해질 것입니다. 이 변화는 이생에서 완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도 그들을 다루시는 과정의 중요한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죽기 전에 어디까지 변하느냐는 그리스도인들마다 각각 다릅니다.

지금쯤 사람들이 종종 제기하는 질문을 다루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기독교가 진리라면 왜 모든 그리스도인이 모든 비그리스도인보다 더 호감을 주지 못하는 것인가?" 이 질문의 이면에 깔린 생각은 한편으로는 지극히 타당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타당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로 회심했는데도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면-전과 똑같이 속물적이거나 악의적이거나 시기심이 많거나 야심이 크다면-대개의 경우 그 '회심'이 그 사람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난 일은 아닌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심한 사람은 자기 신앙이 좀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아야 합니다. 실제 행동에 진보가 없다면 '종교'에 아무리 좋은 감정과 새로운 통찰과 더 큰 흥미가 생겼다 해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체온계의 눈금이 계속 올라가고 있는 한 아무리 환자의 '기분'이 좋아졌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듯이 말입니다.
(중략)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결과를 요구하는 바깥 세상의 태도에는 아주 비논리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마땅히 전보다 나아져야 한다고 요구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전 세계를 두 진영-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으로 정확히 양분해 놓고 볼 때, 첫째 진영에 속하는 사람이 둘째 진영에 속하는 사람보다 어느 때든지 확실히 더 호감을 주어야만 기독교를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요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근거에서 타당치 못합니다.

(1) 현실 세계의 상황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복잡합니다. 세상은 100퍼센트 그리스도인과 100퍼센트 비그리스도인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서서히 신앙을 버리고 있는 이들이 있습니다. 개중에는 성직자도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략)

(2) 구체적으로 꼬집어 생각해서, 가상의 그리스도인과 가상의 비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구체적인 이웃 두 사람을 놓고 이야기한다고 합시다. 이 때에도 우리는 정확한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만약 기독교가 참되다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타나야 합니다. (a)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을 경우보다 더 호감을 주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b)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면 누구나전보다 더 호감을 주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약 화이트스마일 회사의 치약 광고가 참되다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타나야 합니다. (a) 이 치약을 쓰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이 치약을 쓰지 않는 경우보다 더 좋은 치아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b) 이 치약을 쓰기 시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치아가 전보다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화이트스마일 치약을 쓰고 있는(또한 부모님께 시원치 않은 이를 물려받은) 제가 치약이라고는 구경도 못한 한 건강한 흑인 청년만큼 고운 이를 갖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이 광고가 참되지 못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3) 좀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중략) 사람이 호감을 주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어떤 의미에서 문제거리가 못 됩니다. (중략) 그 순간에 그들이 바치거나 바치지 않는 그 천성이 불쾌감을 주는 것이냐 호감을 주는 것이냐는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께는 그것이 별 문제가 안 됩니다.
(중략)
곰곰이 생각해 보면, 호감을 주는 사람들보다 불쾌감을 주는 사람들이 더 많이 그리스도를 찾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사실 때 바로 이 점 때문에 사람들의 반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그리스도는 '지극히 혐오스러운 사람들'만 끌어모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같은 이유로 그를 반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반대할 것입니다.
(중략)
물론 바리새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이렇게 말하겠지요. "저런 인간들이 그리스도인이라니, 기독교에 뭐 볼 게 있겠어?"

11장 새 사람

새 사람이 되는 일은 단순한 개선이 아니라 '변형'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자기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잃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그의 뜻이 우리의 뜻이 되어야 하며, 그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의 표현대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하는 것입니다.
(중략)
자신을 포기하십시오. 그러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것입니다. 자기 생명을 버리십시오. 그러면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이십시오. 매일의 야망과 이루고 싶은 바람들의 죽음을, 그리고 언젠가 찾아올 몸의 죽음을 받아들이십시오.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발견할 것입니다. 아무것도 남겨 두지 마십시오. 주지 않은 것은 진정한 여러분의 것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찾으면 결국 미움과 외로움과 절망과 분노와 파멸과 쇠퇴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찾으면 그를 만날 것이며,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얻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