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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함을 두려워할수록 힘에 기대고 싶은 유혹이 커진다.

강가딘777 2010. 4. 2. 12:52

 
 



얼마전 매일성경을 나누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의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를 예비하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늘 깨어 주의 재림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자기생각을 채울 때, 우리 삶의 태도와 선택은 달라질 것입니다.
재림의 약속을 지금보다 더 굳게 믿고 고대한다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질 것 같습니까?" 
그 날과 그 시는 오직 아버지만이 아시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우리의 마음가짐과 준비는 어떡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내일 예수님이 오신다면 나는 지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먼저 굉장히 바쁠 것 같습니다. 그동안 못한 것 하느라고요.^^
주님이 원하시고 명령하신 것, 기도하고 성경말씀을 읽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구제하는데 열심을 내지 않을까 합니다.
또 삶의 목표를 새롭게 두고 집중력을 가지고 매순간 주님말씀대로 행하며 살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모습은?
 
모임에서 저는 언젠가부터 갖고 있었던 생각을 말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전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을 대할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물론 저는 에수님이 다시 오실 때, 성도들이 영광스런 모습으로,
예수님을 따르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홀연히 변화될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나의 본디 모습인 나의 속마음 내지는 나의 영혼은,
"혹 낯선 느낌으로 예수님을 대하지 않을까?"
또 평상시 일상의 삶 중에 혹시라도 예수님께서 제 앞에 나타나신다면,
"난 당황하지 않고 기쁘고 환영하는 마음으로 그 분을 맞을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을 때때로 스스로에게 합니다.
 
물론 믿음이 부족해서 이런 걱정과 불안을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더 큰 이유는 예수님을 만날뵐 때, 나는 정말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기쁨의 떨림으로 그 분을 맞이할 지,
그런 친밀감이 내게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는지 스스로 궁금해집니다.
제 자신이지만 깊고 진실하게 저를 살펴보려고 노력하려는 중입니다.
 
예수님이 앞에 계실 때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향해 두 팔 벌리고 달려갈 수 있을까요?
아니면 왠지 꿔다놓은 보리자루처럼 왠지 낯설어하고 쑥스러워하며 머뭇머뭇 그 분을 향해 나아갈까요?
이런 생각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의 실제적인 믿음에 중요하고 민감한 변화를 가져다 주는 물음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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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함을 두려워할수록 힘에 기대고 싶은 유혹이 커진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받았던 세번째 시험은 바로 힘에 대한 시험이었습니다.
마귀가 "내가 이 세상 모든 나라의 영광을 네게 주겠다"며 유혹했습니다.
 
지난 수십년간 서구교회의 그 많은 사람들이 왜 교회를 떠났을까요?
바로 힘 때문입니다.
기독교역사의 가장 큰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는 크리스천 지도자들이 힘의 시험에 굴복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정치적인 힘, 군사적인 힘, 경제적인 힘, 도덕적이고 영적인 힘 등에 매료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중에도 바로 그 '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말로는 자신의 신성한 힘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을 비워 인간의 모습이 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포해왔습니다.
 
가장 큰 유혹은 힘을 복음선포의 유용한 도구로 간주하려는 것입니다.
'힘을 갖는 것'이 하나님과 동료들을 섬기는데 쓰인다며 좋은 것이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어왔고, 또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해왔습니다.
이런 합리화때문에 십자군이 생겨났고, 종교재판소가 설립되었으며, 인디언들은 노예가 되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는 권세있는 자리들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감독들은 갈수록 집을 크게 짓고, 교회들은 저마다 더 화려하게 치장했습니다.
양심까지도 도덕적으로 조작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11C에 있었던 교회대분열, 16C의 종교개혁, 20C의 거대한 세속화 등과 같은 교회사에 큰 위기를 불러일으킨 주요 원인은,
가난하고 힘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행사한 바로 그 '힘'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의 관계로 들어가라>

 
힘에 대한 유혹에 그토록 쉽게 무너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힘이 사랑이라는 어려운 과제에 대한 손쉬운 대체물을 제공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었던 것처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묻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나라에서 당신의 오른편에 또는 왼편에 앉을 수 있을까요?'라고 묻습니다.(마20:21)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하나님이 되기가 더 쉽고,
사람을 사랑하기보다는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이 더 쉽습니다.
 
뱀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3:5) 라고말한 이래로
우리는 사랑을 힘과 바꾸려는 유혹을 끊임없이 받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십자가까지 이 유혹을 가장 고통스런 방법으로 받는 삶을 사셨습니다. 
교회역사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역사는
사랑대신 힘을, 십자가대신 지배를, 인도받기보다는 인도하려는 유혹을 받아온 사람들의 역사입니다.
 
이런 유혹을 끝까지 이겨내어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성도들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친밀함 intimacy'을 두려워할 때 '힘 power'에 기대고 싶은 유혹이 극대화된다는 것입니다.
건강하면서도 친밀한 관계를 발전시키는 법을 모른 체 그저 힘과 지배력만 내세우는 많은 크리스찬들이 위험한 리더십을 행사합니다.
기독교 왕국을 세우려했던 많은 사람들이 정작 사랑을 할 줄도, 또 받을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