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말 그대로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무관심한 나머지 '사심없이' 우리의 복지에 신경쓰신다는 뜻이 아니라, 두렵고도 놀라우며 참된 의미에서 우리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그 하나님이 여기 계십니다. 여러분이 대수롭지 않게 불러낸 위대한 영, 그 "무시무시한 용모의 군주"가 여기 계십니다.
꾸벅꾸벅 졸면서 여러분이 그 나름대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연로한 할아버지의 인자함이나 양심적인 치안판사의 냉담한 박애주의, 손님 대접에 책임감을 느끼는 집주인의 배려로서가 아니라, 소멸하는 불로서, 세상을 창조해 낸 사랑으로서, 작품을 향한 화가의 사랑처럼 집요하고 개를 향한 인간의 사랑처럼 전제적(專制的)이며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처럼 신중하고 숭고하며 남녀의 사랑처럼 질투할 뿐 아니라 꺾일 줄 모르는 철두철미한 사랑으로 여기 계십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피조물이, 더욱이 우리 같은 피조물이 창조자의 눈에 그토록 엄청난 가치를 지니는 이유를 인간의 이성으로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 부담스런 영광을 우리가 감히 받을 자격도 없고, 어쩌다 은혜가 임하는 순간이 아니며 감히 바랄 수도 없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의문의 여지 없이 확실해 보입니다.
감정을 초월한 분이 마치 열정에 휘말린 듯 말씀하시며, 자기안에 자신의 복과 다른 복의 원인을 지니고 계신 분이 마치 무엇인가 부족해서 갈망하는 듯 말씀하십니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31:20)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11:8)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마23:27)
인간의 고통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조화시키는 문제는,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에 하찮은 의미를 부여하며 인간이 만물의 중심인양 만물을 바라보는 한 결코 해결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중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계4:11)
우리를 만드신 주된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물론 이 목적도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우리를 그의 사랑이 '아주 기쁘게' 머물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드시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향해 현재의 우리 모습에 만족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 하나님이기를 그만두시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사랑의 본성상 지금 우리의 인격에 있는 흠들을 저지하고 거부할 수 밖에 없으며, 그는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실 수 없습니다. 전보더 더 나아졌다 해도 여전히 불순한 현재의 우리 모습에 만족해 주시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