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요약입니다. 이런 초등학교가 있다는 것을 여지껏 몰랐습니다.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지방마다 이런 학교가 많이 생기길 소원합니다.
책제목이 머리속에서 계속 맴돕니다. 진짜 믿음은 이상적,관념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과 절대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생활이라고 부르는 것이겠지요...
날이 갈수록 뚜렷해지는 것은,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능력의 삶이란 어떤 기적적인 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순하게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정말 잘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그 안다는 것은 지식의 차원이 아닌 삶의 실체적이며 영속적인 관계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이 시대의 비극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님에 대해 안다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자신과 심각하게 관련이 없다고 느끼는 데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저의 괴로움 중 하나입니다. 이런 한계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심히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 수있는 능력을 부어주시라는 간절한 소망을 여전히 부여잡고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씁니다.
오늘, 어떤 책의 제목처럼 '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 라고 스스로 물으며 하루를 살아가기를 제안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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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는다.
(수원중앙기독초등학교 교목 김요셉목사 지음,두란노)
Teaching is caught, not taught. 가르치는 것은 잡는 것이 아니라 잡히는 것이다!
(= Faith is not taught but caught. 믿음은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얻어지는 것이다.
믿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믿는것이다.
그러기에 이해하지 말고 잡으라(catch)는 뜻.)
1부. 나는 어떻게 교사가 되었는가: 조건없는 사랑의 통로
~ 예수님은 가르침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계셨고 잘가르치는 방법을 알고 계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교육철학은 무엇이었을까?
@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11:25~26)
@ 제자들에게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아는 관계 중심적 앎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11:27)
@ 마지막으로 안식에 참여하자고 회중들에게 초청하셨다.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11:28~30)
예수님은 기도하고 ,가르치시고, 초청하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교육철학이다.
~ 요즈음은 교사들뿐만 아니라 부모들도 교육의 전문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 굉장히 애를 쓰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교수법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아이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기독교 교육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같이 권하려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고린도전서 4:14-15)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은 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서 그 아이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부모라고 해서 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교사가 샤프 선생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자녀 교육에 대해서 부모도 교사도 늘 고민해야 하는 이유이다.
~ 참 배움은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얻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이든 삶으로 가르쳐야 한다.
~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배우지만, 학교에서는 하나님이 없다고 배운다.
부모님은 교회에 다니지만 평소에는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간다.
이를 보고 자라난 아이가 어떻게 참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겠는가.
~ "아비의 마음으로 우리의 자녀를 양육하라." 이것이 바로 기독교교육의 정수이다.
2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기도
~ 내가 보는 관점을 사람 중심의 색안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바로 기독교 교육인 것이다.
~ 그런데 문제는 성경을 볼 때도 인본주의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씀을 볼 때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된다.
우리는 말씀을 보기전에 기도해야 한다. 성령님은 내가 성경을 바로 볼 수 있도록 하신다.
성경과 성령님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바로 기도이다.
기도는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내 삶의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활동이다.
이것이 기도와 말씀이 늘 같이 가야하는 이유이다. 기도를 강조하는 삶이 결코 반지성주의가 아닌 까닭이다.
~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훈련받았는지 알고싶다면, 그가 기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는가를 보면 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무릎을 꿇을 수없는 까닭이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외우고, 각 과목을 성경적 세계관으로 가르친다 해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건 기독교 교육이 아니다.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이 진리를 얻기까지 우리 학교가 치러야 했던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 " 목사님, 우리가 그렇게 기도했는데도 왜 최선생님은 돌아가셨어요? ",
" 하나님은 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 것 같아요. "
나도 잘 이해할 수 없는데,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 준단 말인가.
나는 간신이 이렇게 말해줄 수 밖에 없었다.
" 기도는 마술상자가 아니야. 기도는 삶이야.
기도는 하나님과 만나는 거야. 하나님께 맡기는 거야.
우리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만이 기도 응답이 아니야.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의 생각을 피조물인 우리는 다 알 수 없어.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다스리신다는 거야.
나중에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최선생님을 먼저 데려가신 것이
왜 지금 우리 기도의 응답이었는지를 알게 될거야. "
~ 최선생님은 기도를 율법적으로 하지 않았다. 다만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
움직이는 것도 소화시키는 것도, 심지어 보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상황에서도 기도했다. 죽는 순간까지 죄를 고백했다.
~ 어떻게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 교육인지, 수억원을 들여 기독교 교과서를 만들어야 하는지, 이런 모든 혼란을 최형석선생님은 한번에 끝냈다. 기도하면서 기도하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것, 그것이 기독교 교육의 뿌리라는 것을 그는 몸소 알려주었던 것이다.
그는 마지막에 가장 큰 일, 가장 많은 일을 했다. 그래서 나는 기도한다.
예수님. 제게도 기도를 가르쳐주세요.
진리대로 진리를 가르치려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기도하는 부모가, 교사가 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기도의 영을 부어주신 하나님, 기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하나님,
코너로 몰아가신 하나님.
저도 최선생님처럼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할 수 있게 해주시고,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영과 육의 자녀들을 위해
이름 하나하나 불러가며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진리를 통합하고 이 진리를 전해주는 통로로
가장 필요한 기도의 영을 받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자녀들에게 진리와 많은 정보를 주려고 하지만,
기도로 아이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오히려 흐르는 물처럼 흘려보낼 수도 있습니다.
기도의 마음으로 진리를 전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냥 기도하게 해주시고 그냥 무릎 꿇게 해주십시오.
그동안 기도를 의무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기도의 축복과 기도의 영이 살아나게 해주십시오.
무릎을 꿇고 생활하게 해주십시오.
기도하기 위해 모이고 흩어지게 해주십시오.
기도의 용사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우리학교에 기도의 후원자들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동지들을 보내주소서. 기도할 때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우리 교실이 변하게 될 줄 믿습니다.
기도할 때 기적을 베풀어 주소서. 기도의 무릎으로 더 살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 우리학교 아이들은 기도가 최후 반응이 아니라 최우선의 반응이죠.
살면서 문제를 만나면 이 아이들은 하나님 앞에 바로 무릎을 꿇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만드는 것이 우리학교의 목표입니다. "
기도가 수단이 아닌 목적이 되도록, 삶에서 기도가 중심이 되도록, 기도하는 사람이 되도록,
교육하는 것이 기독교교육이다.
기도는 응답이 아니다. 기도는 생활의 흐름이 되고 체험이 되어야 한다.
@ 화분기도 : 돌아가면서 화분을 일주일씩 기른다. 그동안 화분에 물을 주면서 기도를 수첩에 적는다.
일주일후 다른 사람에게 화분과 기도수첩을 넘긴다.
@ 마라톤기도(바통기도) : 기도 바통을 받은 사람은 가족과 함께 바통에 있는 기도제목을 넣고 함께 기도한다.
일주일이 지나면 자신의 기도제목을 써서 다음번 타자에게 넘겨준다.
3부.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관계를 통해서
~ 체험적인 앎을 알기 위해서는 진리와 정보를 구별해야 한다.
기독교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이다. 그런데 진리란 무엇인가?
(요18:37~38)빌라도의 잘못은 진리를 정보로 착각한 것이다.
진리란 무엇(what)이 아니라 누구냐(who)이다. 하나님이 진리다.
성경말씀은 '하나님은 진리'라는 것을 우리가 체험할 수 있도록 인도해 준다.
말씀은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다.
~ 우리는 가끔 말씀을 데이터로 취급할 때가 있다.
빌라도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진리를 정보로 알거나, 또는 정보를 진리로 알고 있다.
~ 진리가 존재라면 우리가 진리를 배우고 가르치기 위한, 즉 그 진리를 전달하는 방법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것이 관계를 통한 전달이라고 생각한다.
관계속에서 함께 진리를 추구해나가는 것, 이것이 교회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몸은 교회다. 우리 자신이다. 이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이라는 진리를 체험할 수 있다.
관계중심의 협동학습은 진리는 아니지만, 진리를 갖는 그릇임은 분명하다.
~ 교회, 가정, 학교, 이 세 기관이 교육공동체로서 협력해야 온전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
~ 라틴어로 학교교육은 'in locoparentis'라고 쓴다. 영어로 하면 'in the place of parents' 이다.
그러니까 '부모를 대신하여'라는 뜻이다. 모든 교육은 부모가 주도적으로 해야 한다.
학교의 교사는 옆에서 돕는 조수일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나라는 바뀌어도 한참 바뀌었다.
4부. 왜 가르치는가?: 안식하기 위해서
~ 우리가 서로의 관계속에서 예수님을 경험할 때 예수님은 우리를 쉼으로 초청하신다.
~ 하나님은 7일 동안 창조하셨다. 7일째 안식까지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안식이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일하시려고 쉬신 분이 아니라, 쉬기 위해 일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다시 일하기 위해 쉰다. 휴식은 재충전의 시간일뿐이다. 이런 시각이야말로 대표적인 인본주의적 시각이다.
하나님이 지구를,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쉬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영원한 안식을 준비하기 위해 우주를 만드셨다.
~ 예수님의 초청은 빈말이 아니라 매우 의미심장한 말이다. 창조하실 때부터 하나님은 이것을 목표로 하셨다.
다만 인간의 일그러진 죄성때문에 우리가 쉼을 포기했고, 예수님의 초청을 귀담아 듣지 않았을 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쉼에 대한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쉼을 왜곡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던 까닭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욕심때문이었다. 그러한 경향성안에서 인간은 안식을 포기해온 것이다.
멈춘다는 것은 인간인 나는 이 일을 할 수 없고, 나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정기적인 고백인 것이다.
정기적으로 멈출 때 피조믈의 원래 목적이 회복된다.
~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피조물을 관리하는 청지기가 아니라 내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 일하기 시작한 것,
이것이야말로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과 맞바꾼 죄의 영향력이다.
내가 하나님이 되고 싶다는, "내가 하나님이면 좋겠어! 내가 나의 삶을 통제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이것이 나의 죄였다.
하나님이 축복으로 주신 일, 노동을 하나님이 되고 싶다는 경향성으로 맞바꾼 것이다.
~ 하나님은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어서 나를 부르신 게 아니다. 하나님의 일에 동참한 기회를 주신 것뿐이다!
하나님은 내게 겸손의 지혜를 주셨다.
성공한 아버지보다 성실한 아버지가 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하나님은 내게 가르쳐주었다.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하는 존재가 되길 원하신다고.
~ 모든 사람에게는 각각의 다른 ‘똑똑’이 있다. 음악 똑똑, 신체 똑똑, 공부 똑똑.... .
이렇게 저마다 다른 색깔과 독특함이 있다. 그것을 계발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한 가지 색깔만 강요하는 교육은 위험하다. 나머지 사람들을 무가치한 사람으로 인식시키기 쉽다.
우리학교 개교 때부터 방침을 정했다.
“6명을 버리고 1명의 걸출한 인물을 양성하지 않겠다.”
“7명 모두 각자의 달란트에 맞도록 교육하겠다.”
~ 인간의 창의성은 쉼으로부터 온다. 일을 멈추는 것은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다.
" 하나님, 인간인 저는 이 일을 할 수가 없고,저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쉼은 창조주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주신 것이다.
그 분께 순응해서 그 분과 함께 멍에를 매고 그 분의 일에 동참하는 것, 그것이 쉼이다.
하나님의 교육의 목표는 쉴 줄 아는 사람, 만끽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쉼 속에서 창조성이 나오는 것이다.
여유와 쉼이 없으면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표현하고 체험할 수 없는 것과 같다.
~ 부모로서, 교사로서 아이를 교육시키는 과정은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쉼의 가치를 회복하는 교육을 해야한다. 음표보다 중요한 것은 쉼표이고, 그림만큼 중요한 것은 여백이다.
쉼의 가치가 회복되는 교육, 아름다움과 가치가 회복되는 교육을 해야 한다.
쉼을 얻을 때 아이들의 은사도 계발할 수 있다.
5부. 자녀를 제자삼는 7가지 티칭포인트
~ 가정은 출생과 성장의 보금자리이다. 올바른 가치관과 생활습관의 형성지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부모를 교사로 부르셨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 집에서 양육의 역할을 등한시하고, 돈이나 벌어다 주면 그만인 것으로 생각하는 아버지처럼,
교회에 헌금하고 자녀의 영적양육을 주일학교 선생님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나님은 자녀의 영적상태에 대한 책임을 주일학교 선생님들에게 묻지 않으신다.
"너희 자녀를 내가 분부한 대로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양육하였는냐?" 부모에게 물으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부모에게 주신 책임이다. 가정에서 영성으로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 교육의 가장 중요한 철학이다.
1.가정이 교육의 출발이다.
"교회가 잘못되면 다른 목회자를 구하면 되지만 내자녀들이 잘못되면 아무도 책임져줄 사람이 없소"
(아버지 김장환목사의 말)
< 가정에서의 신앙교육 >
1. 정기적인 가족시간을 가져라. ~ 다 함께 공유하는 시간으로
2. 가정의 주기를 교회절기에 맞춘다. ~ 가정의 전통으로 만들기.
3. 예배를 축제로 승화시켜라. ~ 예배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자녀가 생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유도해주면 부모로서의 임무는 끝난다.
생일케이크 촛불을 끄기전에 자녀에게 질문하라. " 하나님께 감사한 것 세가지만 말해볼래 "
4. 식사를 예배로 기념하라. ~ 자녀들과 식사를 할 때 반드시 하나님을 기억하는 식사가 되도록 하라.
5. 하루에 한번 자녀를 축복하라. ~ 하나님은 가정의 제사장인 아버지에게 자녀축복권을 이미 주셨다.
축복은 표현되어야 한다. 자녀에게 능동적으로 표현하라. 믿음은 세대간의 축복으로 보존된다.
자녀에게 축복할 때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축복을, 자녀에게 축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 '하나님의 거룩함을 하루 속히 닮아라.'
2. 자녀를 하나님께 바치라.
~ 헌아는 요식행위가 아니다. 우리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기억하는 행위다.
믿음의 가정이라면, 자녀를 하나님께 바쳐야한다. 그렇게 바칠 때 기대치 않은 축복이 일어난다.
3. 살아있는 신앙교육을 하라.
~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2:52)
(어떤 설교에서) 예수님도 4가지 영역에서 자라나셨다. 키는 신체적, 지혜는 인지적, 사람은 사회적, 하나님은 영적.
이런 주장의 문제점은 영역화 되어 있다는 것이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다."라는 것을 안다면 이분법은 깨뜨려야 한다.
사람의 다섯가지 영역 : 도덕적, 사회적, 신체적, 정서적, 인지적 영역. 영성은 이 다섯가지 영역의 뿌리이다.
~ 처음 우리학교에 오시는 분들은 모두 깜짝 놀란다.
" 예배실이 없단 말입니까? "
' 이렇게 어수선한 체육관에서 드리는 예배가 과연 은혜로울까? '
이러한 질문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숨은 생각을 잘 보여준다. 바로 신앙의 영역화.
이것의 뿌리는 이원론적 신앙관이다.(Dicatomy)
거룩(Sacred)과 세속(Secular). 우리 신앙안에 이 둘에 대한 구분이 크다.
주일성수는 뭘까? 말을 풀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이다. 이 용어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거룩과 세속을 무 자르듯 구분해 놓는 것이 문제다.
이렇게 신앙이 영역화 되면 문제는 금세 드러난다.
주일은 거룩하게 지킨다. 하지만 거룩하지 않은 월요일에는 어떤가?
사무실에 앉아서 탈세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기도 한다. 이것이 과연 비약일까.
결국 이원론적 신앙은 삶에 파고들어갈 힘이 없다.
학교와 교회 건물을 함께 쓰기로 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삶과 신앙을, 거룩과 세속을 구분하고 싶지 않았다.
교회에서는 창조론을, 학교에서는 진화론을 배우는 아이들이 나중에 주일학교에서 배운 복음을 어떻게 여길까?
단순히 어른들의 말장난이나 신화 정도로 여길 것이다. 기독교는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종교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라는 기독교의 세계관, 그 세계관을 우리의 아이들에게 심어 주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교육의 핵심이다.
어른들부터 거룩과 세속을 구분하는 악습에서 벗어나야 한다.
컵에 담기면 물이고 대야에 담기면 물이 아닌 게 아니듯, 신앙과 그 신앙에 근거한 교육은 연속선상에 있다.
4. 신앙의 갈등을 충분히 겪게하라.
~ " 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많은 열매를 맺을까요? "
" 왜 생명을 버리면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 "
" 성부, 성자, 성령? 셋이면서 하나라고? "
아이들은 자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하기 시작한다.
~ 피조물이 창조주를 체험하는 데 있어 패러독스는 필연적이다.
우리는 이해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는 박스 안에 하나님을 넣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도덕적 교훈대로, 이미 알고 있는 정답대로 살아가도록
기독교는 사람을 로봇과 같은 존재로 만들기 쉽다.
~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세상의 이치로 설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이치를 따져본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믿는데 똑 떨어지는 만족스런운 설명을 얻기는 어렵다.
언제나 하나님의 패러독스와 직면하게 된다. 언제나 합리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부분이 불씨처럼 남는다.
설명은 달콤하다. 속시원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이사야55:9)” 라고 하셨다.
타락한 인간의 인지로는 수용하지 못할 하나님의 인지가 있다. 하나님은 나보다 더 크시다.
설명할 수 없어서 속시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숯불처럼 가슴을 태우는 아픔이 있을지라도 그 불씨를 계속 붙잡고 나아가면 그것이 겸손이 된다.
겸손은 잘 모름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패러독스에 직면했을 때는 오히려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낫다.
“얘들아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나도 알고 싶어.”
아이들의 신앙적 고민을 너무 쉽게 해결해 주면 안된다.
질문을 무마시키지 말고, 다그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아이들 스스로 신앙 갈등을 겪도록 해야 한다.
~ 피조물이기에 우리는 제한되어 있다.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을 다 이해하고 알 수는 없다.
믿음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믿음은 갈등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진리를 믿는 것이다. 진리를 의심하는 것도 믿음이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것도 믿음이다.
믿음에도 스텝이 필요한 것이다.
~ 질문을 김치처럼 익혀라.
하나님의 패러독스가 존재하는 것, 그것이 크리스천의 실존이다.
앎에 대한 작은 힘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통로가 되었다면,
예수님을 깊이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앎이 더 넓어질 것이다.
5. 6살 이전에 교육하라.
~ 어떤 창조물이든 자기역할이 있고 저마다 충분히 사랑받을 존재임을 알려주는 것,
그것이 기독교 교육이다.
6. 자녀를 향한 게획을 갖고 있으라.
아이에게 어떤 교육을 시킬 것인지, 부모 스스로가 결정하고 판단하고 계획해야 한다. 부모는 아이를 통한 하나님의 계획을 실현시켜 드려야 할 책임을 맡은 자들이다.
가정은 교육하고, 교회와 학교는 가정의 교육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그것이 우리하 회복해야할 모델이다.
7. 훈육의 아픔을 충분히 견뎌라.
~ 참 사랑은 필링(Feeling)이 아니다. 짜릿하고 부드러운 게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훈육 속에서 나타난다. 이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어버린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12:5-6)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잠3:11-12)
~ 부모는 아이를 괴롭히는 쇠철사같은 죄를 빼내는 것이다.
그런데 부모는 아픔을 견디지 못해서 훈육을 포기한다.
부모는 훈육을 과정을 끝까지 인내하면서 지켜보아야 한다. 그럴때 훈육의 열매가 있다. (히12:10)
~ 부모가 훈육할 수 있는 짧은 기간동안에 훈육의 과정에 잘 적응해서
결국은 장기적인 훈육을 이해하고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아이들로 키워야 한다.
그래서 아이들이 아픔을 감사할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
진정한 거룩의 과정(성화의 과정)은 평생에 걸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