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특별한 소유 (벧전2:1~10) 2020.4.19
오늘 설교의 키워드는 '선택'과 '소유'다.
4월 15일은 국회의원 선거일이었고,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문재인정부의 훌륭한 코로나19 대책에 힘입어 여당이 180석이라는 기록적인 당선율을 보였다. 사림들은 '선택'을 했고, 그 선택에는 가볍지 않은 '책임'이 따른다. 잘못된 선택은 후회가 뒤따른다.
이 부분에서 아쉬운 것은, 바른 선택의 기준은 무엇일까에 대한 논의이다. 선거를 비롯한 정치적 선택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현재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올바른 신앙적 선택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해야 하는가? 그 구체성에 대한 질문이 우리의 신앙적 삶에는 매우 중요하건만 그것이 빠져있어 못내 아쉽다.
요즘 반려동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날로 커지고 있다. 반려견을 '소유'한 주인은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지는가? 지금은 예전에는 가축으로서 인식했지만 지금은 가족과 같은 관계로 변화되었다.
애완동물들은 자신들의 거울과 같은 존재이다. 사랑을 주면 더 많은 사랑을 주고, 미움을 주면 곧바로 경계한다. 늘 즉각적인 반응이 온다. 그들은 단순하지만 직관적이고 그들만의 질서가 있고, 서로의 교감이 필수적이다. 그것을 이해하며 반려동물들을 대할 때에야 제대로 된 관계가 이루어진다. 그 속성을 이해하지 않으면 잘못된 접근법으로 인해 굳어진 생활습성이 서로를 힘들게 할 수 있다.
소유욕은 본성일까? 인간의 여러 기본적인 욕구 중 하나인가? 성경의 관점은 자본주의와 함께 소유에 대해 가치중립적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긍적적이라고 보지도 않는다. 지나친 소유욕은 탐심이 된다. 성경은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말한다. 하나님앞에서 큰 죄가 되는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이다.
성경이 자본주의와 소유에 대해 부정적으로 대하지 않지만, 이기적인 소유욕인 탐심과 부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욕심은 언제나 죄를 잉태한다고 말한다. 예수의 정신은 낮은 곳을 향하며 소유는 결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삶으로서의 섬김과 나눔과 청지기로서의 삶의 태도를 지향해야 한다.
무분별한 자본주의의 끝은 필연적으로 양극화를 불러오며, 비판적 사고가 없는 소유의 개념은 타인의 결핍에 대해 공감없는 이기심의 폐해을 가져온다는 경고를 왜 교회들은 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하나님을 반대하는 또 다른 삶의 양태가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파괴하는 폭력과 차별과 탐욕에 있고, 그것은 자꾸만 이기심을 조장하는 신자유주의를 위시한 비생명적 문화조류에 근거한다는 것을 왜 교회들은 말하지 않을까?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너희를 소유했다고 표현하였다. 여기에서의 생각할 바는 무엇일까? 하나님은 소유한 인간을 어떻게 대하시며 그의 소유가 된 사람은 주인이신 하나님께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가 관건일 것이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장이 되라고 하신다. (벧전2: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 아들의 목숨값으로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 되었다. (벧전2:10)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께로 가는 막힌 담은 허물어지고 하나님과 화평케하는 속죄의 사역을 이루셨다. 인류의 모든 죄와 허믈에도 불구하고 그를 주와 구주로 믿음으로 우리는 그 분의 소유가 되어 종국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백성이 되었다.
예수님의 속죄의 사역의 목적은 이것으로 끝일까?
복음서에서 얻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그분의 가르침과 삶의 본들이 구약의 이야기들속에 나타난 하나님이 하신 일들과 말씀들과 전혀 연관성이 없다는 듯이 강요하는 듯한 지금의 교리적 성경이해를 이제는 그만 놓아주어야 할 것 같다. 더 이상의 인지부조화를 견딜 수 없다.
어떤 이유에서든 현재의 우리는 기독교 교리를 반드시 수호내기 위해서 앙상한 뼈대만을 붙잡고서 더 깊고 풍성한 신앙의 진리들을 애써 밀어내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저 예수 믿으면 천국감, 그리고 끝,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 뜻, 하나님의 창세 전부터의 계획, 하나님의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이다. 하나님은 어떤 세상, 어떤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셨고, 그리스도를 통해 그것이 온전히 회복되기를 바라신다는 그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믿는 우리는 이제 그것을 위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새로운 삶의 가치관과 방식으로 주어진 삶을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성령을 의지하여 걸어가야 한다.
오늘도 여전하게 베드로전서 2장의 본문을 통해 지극히 개인적인 감흥을 지진 두 단어, '선택'과 '소유'를 설교함으로 본문의 주요한 내용들이 병풍이 되어버렸다. 참으로 아쉽다. 두 단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는 이해하나 성경의 역사성과 문맥적 이해를 포기해버리는 이 지극히 개인감성적이고 피상적인 설교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울림이 되지 못하고 좁고 단편적인 신앙적 구호만을 반복해서 외치는 메아리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