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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침체

강가딘777 2019. 6. 22. 22:20

교회의 영적 침체 7단계 (조엘 비키)

 

영적 침체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그리스도를 거부하며, 성령을 근심시키고, 율법을 짓밟으며, 복음을 오용하는 죄. 영적 침체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길에서 이탈하는 것

 

 

성령 없는 종교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회개 없는 용서

죄 고백 없는 화해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는 일이 없는 칭의

중생 없는 구원

지옥 없는 천국

 

 

‘내 백성이 나를 외면하고 나에게서 돌아서고 있구나’ 

 

하나님에 대한 외경심, 진리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사랑, 진리 체험의 필요성,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고자 하는 소망이 모든 교회에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가? 정직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시인해야할 것이다. 

 

피상적 진리와 외면적 성장, 그리고 외형적 특권 주장

‘교회가 바른 기초에서 이탈하고 있다’

 

 

1. 교회적 영적 침체의 1단계: 세속화 증가

 

세상적인 인식이 교회에서 점점 더 빈번하게 발견됨.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 세상과 교회, 그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들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을 구분했던 흑백의 경계선이 점차 희미

 

 

2. 교회적 영적 침체의 2단계 : 불신

 

세속화로 인해 교회는 불신이라는 마비 상태로 한 단계 더 깊은 영적 침체를 경험한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이 사역하셨던 세대를 행해,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이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함과 같도다”(마 11:16-17)라고 안타까워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아이들은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그들은 피리를 가지고 결혼식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흥겨운 가락을 연주했습니다. 그 후에 장례식장에 어울리는 애달픈 가락으로 슬퍼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은 그 무엇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보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대다수 교회의 상태가 아닐까요? 율법에 나타난 애도의 가락이 아무리 강단에서 선포되어도, 얼마나 많은 죄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뼈저리게 느끼고 한탄하면서 가슴을 칠까요? 복음에 담겨져 있는 혼인잔치의 흥겨운 가락이 아무리 만방에 울려 퍼져도, 자신의 죄에 대해 가슴을 부여잡고 탄식하는 죄인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된 기쁨을 누릴까요? 이젠 율법도 죄인들이 자신의 잘못으로 두려워 떨게 만드는 힘을 상실했으며, 복음도 영원한 축복을 누리기 위한 열심을 더 이상 성도들에게 호소하지 못하는 듯이 보인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은 개인적으로 어떠한 상태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경우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 같습니까? 여러분은 혹시 ‘아, 저는 율법에 둔감하고, 복음에도 마비된 상태에 있습니다. 심지어 지옥에 대한 생각까지도 무감각해지지 않을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태는 아닙니까?

 

오늘날에는 지옥 형별에 대한 설교조차도 교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에 관한 설교는 어떠합니까? 인간은 본래부터 천국이나 지옥 어느 쪽도 원치 않았습니다. 언젠가 한 무신론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만 천국과 지옥을 고수하면 된다. 나에겐 단지 발붙이고 살 수 있는 이 세상만이 필요할 뿐이다.” 물론 우리가 이런 말을 감히 입밖에 내놓지는 않을지라도 우리 역시 그러한 태도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불신은 우리를 실제적인 무신론자로 만듭니다. 불신은 우리가 지옥을 지옥으로 인식하고 천국을 천국으로 인식하는 것을 방해할 뿐 아니라, 은혜를 은혜로 , 죄를 죄로, 그리스도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성경을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불신은 우리를 진리에 대해 무감각한 자로 만듭니다. 우리가 지성을 사용해서 진리를 알 수도 있겠지만, 그 진리가 우리 가슴 속에 뿌리박히지 않으면, 그것은 단지 우리에게 저주 받을 빌미를 제공하는 것이며 우리를 꺼지지 않는 지옥 불 속으로 던져 넣은 것에 불과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분명히 ‘에브라임은 뒤집지 않은 전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을 한 쪽이 너무 새까맣게 타 버렸고, 다른 한 쪽은 아직 덜 익은 반죽 상태로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음 문을 하나님께로 열어 성령께서 가르치시는 내면적 지식을 소유하기 보다는, 오히려 무감각하고 차가운 이성적 지식만을 소유하고 있는 우리의 삶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불신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가 심지어 불행이나 행복에 대해 완전히 무감각한 상태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증대됩니다. 완전히 무감각하고 무정한 상태가 바로 불신의 지향하는 최종 목표입니다.

 

 

3. 교회적 영적 침체의 3단계: 무관심

 

불신은 교회가 무관심이라는 보다 더 마비된 상태로 침체되도록 이끈다. 불신은 우리가 진리에 관한 모든 관심을 잃어버리도록 유혹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강단에서 선포되는 참된 교리를 듣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는 기독교 핵심 교리들이 충분히 설교되기를 얼마나 바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전에 보여주셨던 사랑, 에덴동산에서의 인간 타락,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완전하 구속, 칭의, 성화, 성도의 견인, 성령의 필요성 등에 관한 교리들이 우리의 삶과 실제로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는 구원에 은혜의 필요성, 무한한 은혜의 충만함, 그리고 구속하는 은혜의 열매가 모든 설교에서 선포되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는 고통과 구원과 감사를 체험적으로 아는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우리는 설교를 통해 은혜의 표지들, 곧 알곡과 가라지, 하나님의 자녀들과 사탄의 자녀들,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 영적 지식과 세상적 지식, 아이같이 천진한 경외심과 노예적 두려움, 일시적 믿음과 참된 구원의 믿음, 극심한 두려움(약 2:19)과 참된 떨림(빌 2:12), 막연한 뉘우침과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구별해 주는 표지들을 듣기 위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것에 전혀 무관심한 상태로 머물러 있습니까?

 

우리는 참된 교리, 곧 우리가 삶에서 경험할 수 있고 생활 속에 지속적인 영향을 마치는 교리가 우리의 일상과 마음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극도로 냉담하고 분별력을 잃은 경박한 시대에 몸담고 있습니다. 진리를 향한 참된 관심이 놀라울 정도로 급속히 침체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극단적이 부분들은 오늘날 교회의 성도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조차도 점차 뚜렷이 식별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설령 그 차이를 안다고 해도,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감정이나 이성의 미명 하에 그렇게 구분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나봇은 아합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왕상 21:3). 나봇은 왕명을 거역했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지만, 솔직히 우리들 대부분은 완전히 무가치한 것이나 사소한 것들 때문에 우리의 유산을 기꺼이 팔아 버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성경 말씀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은혜의 표지들과 실제 역사 속에서 현상적으로 표출된 은혜의 표지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을 더 이상 귀담아 들을 수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남긴 작품들을 읽는 데 시간과 노력을 쏟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머리를 써 그 차이점들을 애써 연구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 어떤 차이점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이런 것들을 식별하는 일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갈리오 총독(행 18:12, 역주 : 철학자 세네카의 동생으로서, 황제 글라우디오 때에 아가야의 총독을 고린도에 있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끌고 왔을 때, 그것을 단순히 유대 종교의 문제로 생각하여 개입하기를 거부했다)과 같습니다. 우리는 거의 동물과 같은 수준으로 생활합니다. 단지 일하고 먹고 잠자고 하면서 살다가, 수명을 다하면 죽어서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명성과 삶을 위해 참된 교리를 적당히 변형시킴으로써 영적 침체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된 교리보다 우리의 자아를 우선시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실제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한 채로 일상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는 이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리를 지루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전에 루터는 ‘교리는 천국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루터에게는 교리가 결코 지루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왜 그렇게 느꼈을까요? 그에게 교리가 지루하지 않았던 것은 그가 교리를 몸소 체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생명을 살리고 유지하는 능력을 가지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리가 그의 영혼에 주입되었기 때문입니다. 교리를 체험하는 것과 관련해서, 루터는 히스기야 왕과 같이, ‘나는 이것들(교리들) 때문에 산다’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루터의 태도가 과연 여러분의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신실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은 설령 그것이 자신에게 아무리 준엄한 메시지일지라도, 철저하고 엄중하며,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으며, 세상과의 구별을 외치는 설교를 좋아합니다. 본래부터 우리의 현세적 신념과 무의미한 희망과 거짓된 확신과 거침없는 주장을 선호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스스로를 속이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이를 알리요?”(렘 17:9)라는 말씀의 교훈을 체득한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속지 않는 것보다 속임을 당하는 것이 훨씬 쉽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빼놓고 아무리 많은 눈물을 흘리며 밤새워 기도한다 해도, 사냥해서 잡은 사슴 요리를 아무리 갖다 바쳐도(창 27:20), 그리고 위선적인 헌물(비록 그것이 아무리 순전한 것처럼 위장된 것이라 할지라도)을 아무리 많이 드려도, 그런 행동들이 결코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눈물과 기도와 회개와 뉘우침과 겸손 이상의 무엇인가를 필요합니다. 그들에게는 견실하면서도 깨어지지 않는 기초가 필요합니다. 그들에게는 자신 외에 다른 사람과 다른 어떤 것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영혼 속에 경험적으로 불타오르는 참 교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아의 모든 것을 완전히 소멸시켜 그리스도의 모든 것으로 뜨겁게 불타오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성령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전혀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완전한 경험을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참된 교리가 그들의 영혼 속에 불타오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제 영혼의 마음 판에 새겨진 것이 제 자신이 교리와 도장과 펜 자국과 눈물과 행위가 아니라, 거룩한 당신의 교리임을 알 수 있도록 나에게 당신의 거룩한 인으로 새겨 주십시오’라는 고백이 바로 그들의 탄식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그들의 삶의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성령께서 이루신 교리와 영혼으로 경험할 수 있는 천국의 이슬로 적셔진 교리를 더욱 간절히 추구합니다. 그들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도록 해 주는 그런 진리를 열망합니다. 그들은 거부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의심을 몰아내고, 그들의 영혼을 북돋아 주며, 굳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고, 복음으로 양육하며, 그들의 영혼에 은혜를 베푸는 진리를 갈망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런 진리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여러분의 삶과 희망이라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신봉하는 기독교는 단지 가금씩 마음에 떠오르는 일상적인 상념들과 뒤죽박죽되어 버린 형식적 종교에 자나지 않습니까? 아무 힘도 없는 하찮은 종교와 머리에 떠오르는 보잘 것 없는 진리가 여러분의 양심에 만족을 주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영혼을 방치해 두고 육체를 위해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마음에 새겨진 참된 진리의 지식을 맛보지 못한 채, 단지 종교의 외면적이 껍질과 형식만으로 만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날마다, 매 설교마다, 그리고 매주 마다 영적 침체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냉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이 참된 진리입니다. 본성적으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 그분의 저주에 이를 수 있는 지름길을 요청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곧장 지옥에 빠뜨릴 만한 영적 침체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너무 늦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셔서 우리가 처해 있는 심각한 영적 침체의 상태를 직시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4. 교회적 영적 침체의 4단계: 무지

 

’ 무관심은 하나님의 백성이 영적 침체의 길에서 자신의 단짝 친구인 무지(ignorance)와 동행하게 만든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

 

 

5. 교회적 영적 침체의 5단계: 영적 죽음

 

진리에 대한 영적, 본성적 무지는 교회 안에 영적 죽음이라는 치명적인 질병을 야기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스스로를 살피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영적 삶을 위한 현재적이며 능동적이며 현실적인 훈련들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그들은 “오,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눈이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민 11:6)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다시 오시면, 그 사건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님의 첫 강림보다 분명히 훨씬 더 큰 이적이 될 것인데, 그 이유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새롭게 하는 은혜와 아울러, 이미 받았던 은혜에 대한 모든 권리들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당신은 매주 교회에서 벗어나 그토록 무심하게 일상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잠자는 그대여 죽은 자들로부터 깨어나세요’라고 말하면서 여러 성도들의 어깨를 흔들어 주고 싶다고 느꼈던 순간이 그들의 삶 속에 있었지만 이제 그들은 자신을 흔들어서 깨울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아, 그들 속에는 메마른 뼈에 생기를 불어넣는 하나님의 깨우침이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무기력하고 의존적이며 메마른 상태에서,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겔37:3상)라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질문 앞에, 그들이 할 수 있는 대답이라고는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겔 37:3하)라는 에스겔 선지자의 솔직한 답변 밖에 없을 것입니다.

 

 

6. 교회적 영적 침체의 6단계: 인간 중심적 태도

 

영적 죽음은 인간 중심적 태도라는 훨씬 더 암담한 영적 침체의 상태로 성도들을 몰아간다. 만일 인간이 교회의 중심을 차지하게 되면, 항상 입에 오르내리고, 시선 집중을 받으며, 높임을 받으며, 평가의 대상이 되는 인간만이 존재하게 될 뿐,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은 한 쪽 구석에 방치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될 때, 직분자들, 특히 목사에 대한 이야기가 늘어나고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 

 

우리는 갈수록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말씀과 증언의 척도에 비추어 목회자의 영적 상태를 평하기보다는, 인간이 만든 기준으로 그들을 평가하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는 사실을 걱정해야 합니다. 결국 인간 중심적 태도는 모든 기대와 전망을 인간에게 둠으로써 인간을 경배하게 만든다. 

 

 

7. 교회적 영적 침체의 7단계: 거룩한 기대감의 상실

 

이런 인간 중심적 태도는 영적 침체의 길에 서 있는 교회가 치달을 수 있는 마지막 단계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거룩하지 못한 소망의 열매는 거두면서도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거룩한 소망의 열매는 거두지 못하는 것이다. 

 

거룩하지 못한 소망은 인간의 할동에 기초한 것으로, 인간에게 아무런 소망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분이 자신에게 축복하실 것을 기대할 때에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께 대해 거룩한 소망을 가지지 못하는 것은 밖으로는 경건한 척하면서도 안으로는 인간 중심저 태도를 가진 이중적 인식의 결과로서, 이것은 하나님을 인간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거룩한 소망은 세속화의 경향과 불신과 냉담함과 무지와 영적 죽음과 인간중심적 태도에 결코 안주할 수 없다. 거룩한 소망은 영적 침체를 혐오한다. 거룩한 소망은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 불쌍한 죄인들의 회심, 그리고 교회의 유익을 추구한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교회의 유일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만이 영적으로 침체하는 그분의 교회를 소생시키실 수 있기 때문이다. 

 

 

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저희를 기억해 주옵소서.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저희를 위해 변론하시는 유일한 분이시며 저희가 소망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저희에게 반드시 필요한 당신의 영을 보내 주시고, 주님의 이름으로 설립된 교회의 촛대가 영원히 이방인들에게 옮겨 가지 전에 저희를 회복시켜 주옵소서. 그리고 저희의 자녀들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산 시온에서 거듭나게 하셔서, 교회를 통해 세상의 모든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고, 세속적인 것들을 멀리함으로써 사탄을 부끄럽게 하시며, 하나님의 백성을 영원무궁토록 굳게 세우셔서 영광의 보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이 많아지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습니다. 하나님마이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은 만유의 만유이시니, 그분께 영광을 돌릴지어다’라는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