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일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바울"입니다. 제목을 듣고서 바울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히게 되었을까? 그 후 바울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일들을 했을까가 궁금해집니다.
본문 사도행전 18장은 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아굴라부부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이들은 로마의 추방령으로 인해 이탈리아 반도에서 그리스 땅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 된 유대인부부로 바울과 함께 텐트사업을 함께 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안식일마다 유대인 회당에서 성경을 강론하였고, 그 후 실라와 디모데가 합류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분명하게 증언할 때 유대인들은 바울을 대적하고 비방함으로 바울은 그들에게서 떠납니다.
(바울이 말씀에 ‘붙잡혔다’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스케이케토”라고 하여“붙잡혀 있었다”는 말입니다. 헬라어 성경은 바울이 말씀에 붙잡혀 있었다고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NIV성경은 "devoted himself exclusively to preaching" NASB 성경도 유사하게 "devoting himself completely to word"라고 표현을 했는데 개역개정판이 원어 성경에 충실하게 ”말씀에 붙잡혀 있었다’고 번역했습니다.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에 붙잡혀 복음의 메지시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킹제임스버전은, "Paul was pressed in the spirit", ASV는 "Paul was constrained by the word"으로 표현했습니다.
새번역성경은, "실라와 디모데 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온 뒤로는, 바울은 오직 말씀을 전하는 일에만 힘을 쓰고"
현대인의 성경은,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와 바울은 말씀 전하는 일에만 힘쓰며"로 번역했습니다)
회당 옆에 살고 있는 디도 유스도의 집에 거하게 되고, 회당장 그리스보의 온 집안과 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고 세례를 받습니다.
밤에 주님이 환상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하지 말아라. 침묵하지 말고 말하거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너를 대적하며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다. 이 성안에는 내 백성이 많단다." 이에 힘을 얻은 바울은 1년 6개월 동안 고린도에서 머물며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칩니다.
성령의 강한 이끄심으로 헬라 땅에 첫 발을 내디딘 바울. 마게도냐 지방의 빌립보를 시작으로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에 이르기까지 결코 녹록치 않은 사역의 노정을 걸어갑니다. 유대인들의 예수에 대한 반대와 격분, 헬라인들의 위협과 비웃음속에도 전도의 귀한 열매들이 맺어집니다.
그 길은 바울의 개인적인 일이 아닌, 성령의 사역이고 주님과의 동행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준비된 하나님의 사람들과 동역자들이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섭리에 중요한 기점인 된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의 상징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시작을 완성해갑니다.
늘 그래왔듯이 설교자들은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을 때 성경의 본문을 적절히 이용합니다. 제목설교, 주제설교라고 부르는 것들이 그런 형식을 갖고 있죠. 이것은 성경본문을 차용해 현재 우리 삶에의 적용을 강조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형식이 계속 반복되면 한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성경의 역사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의 통전적인 이해보다는 현재 내 상황에 대한 이해와 문제에 대한 해결로 고착화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 본문의 역사적이고 상황적인 의미를 본의아니게 축소시키고 어떤 사건속에서 일반화된 메시지를 끌어내는 도구로서만 성경이 기능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되도록이면 강해설교만를 하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아굴라부부라는 훌륭한 동역자들과의 만남과 경제적 협력을 통해 생활적인 도움과 함께 선교사역에 대한 격려와 지지를 받았을 겁니다. 외로운 나그네길을 걷는 낯선 선교지에서 기대치 않게 동일한 믿음을 지진 헌신적인 동역자를 만나는 것은 늘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도우신다는 것을 체득하는 참으로 기쁜 순간이었습니다. 설교에서는 이런 헌신적인 동역자를 얻는 비결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먼저 헌신의 사람이 되는 것과 멀리서 차지 말고 지금 내 옆에 세워진 사람에게 집중하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은 모든 일반적인 교훈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인 도덕적인 교훈이 무시되는 복음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선순위는 분명합니다. 케리그마라고 부르는 예수를 통한 복음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집중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믿는 도리이기 때문이죠. 이 세상을 위한 예수의 오심과 죽음과 부활이 헬라인들에는 어리석은 말로 느껴져도 믿음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삶의 기초가 됩니다.
앞선 설교의 내용중에 헌신적인 동역자를 얻는 비결이 자신이 먼저 헌신적인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성실하게 임하면서 상호신뢰를 쌓으라는 뜻이죠. 그리고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내 맘에 안들고 원수같더라도 하나님께서 동역자로 세워놓았으니 더 배려하고 존중하며 참고 기도하고 품으라는 뜻이죠. 바울이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혔기에 그런 행동들이 가능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저는 복음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을 구별할 때 한가지 비교를 사용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가정하에 다시 묻습니다. 당신은 맡겨진 일에 성실하게 임하십니까? 주변에 있는 있는 사람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배려합니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내게 믿음이 없다해도 이런 일은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이렇게 살도록 애쓰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을 때, 그는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밝히 증거하였습니다. 그가 나중에 로마에서 순교를 당할 때까지 그는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사로잡혀 모든 고난을 감내하였습니다. 그런 중에 하나님은 사역의 열매로서 준비된 동역자들을 보내주셨고, 많은 회심자들을 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바울은 성령의 이끄심속에 모든 일을 감당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성령의 이끄심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삶의 자리에서 주변사람들에게 성실하다고 인정받고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삶을 살지라도 내게 복음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을 성실하게 잘살고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실하고 선한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세상사람들과는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는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따르는 것 아닙니까?
지금 우리의 영적 진실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