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1,2,3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1: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예언자가 부재한 시대, 호세아·요엘·아모스·오바댜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다
저자 : 김근주
책소개
예언자가 부재한 시대,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다!
온 정성을 다해 신을 섬기면 약속된 풍요를 내려준다는 체계는 예나 지금이나 종교가 존재하는 근간일 것이다. 그래서 제사보다 인애와 정의로 대표되는 예언자들의 외침은 사람의 마음을 감싸고 위로하면서 언젠가 올 큰 복을 바라며 살아가게 하는 종교 체계에 물든 이들에게 불편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은 오늘날 한국 기독교에서도 낯선 모습이 아닐 것이다. 『소에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제1권은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의 외침이 이스라엘의 그릇된 종교 체계를 향할 뿐 아니라 동일하게 지금 우리를 향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책 속으로
구약성경의 마지막을 차지하는 책들이 12소예언서라는 점은 이 책들이 지닌 중요성을 가장 잘 보여 준다. 이 책들에 이르러 구약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이 끝을 맺으며, 이 책들이 구약 신앙을 마태복음으로 시작하는 신약 신앙과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첫 절에 소개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르게 안다는 것은 12소예언서에 담긴 말씀이 책망하고 위로하며 회복하려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필수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서론」중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본질적인 차이는 누구를 왕으로 고백하고 인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에브라임이 그토록 열심을 냈던 풍요 제의는 왕 되심의 문제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풍요를 약속하는 신에게 온갖 정성을 다하여 제사하고 분향했지만, 그들은 애굽을 의지하고 앗수르를 왕으로 모신다(이미 5:13; 10:6에서도 앗수르 왕을 가리켜 “대왕”이라 언급되었다). 이것이 종교의 특징이다. 종교는 진정한 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에서 더 낫고 풍요로운 삶을 추구한다. 여호와가 왕이심을 거부하고 종교로 남아 버린 이스라엘의 모습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해 바로를 만난 모세 때문에 노역이 심해지자 이스라엘은 모세를 향해 누가 자기의 왕인지 분명히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유대인들의 외침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호세아 11장)」중에서
주께서 은혜를 베푸실 수도 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만을 의지하며 마음을 찢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돌이킨다면,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놀랍게도 진노를 거두시고 은혜를 베푸실지 누가 알겠는가. 이 고백은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공식에 따른 당연한 것이 아니라 예기치 못한 은혜의 산물임을 분명히 한다.…하나님의 구원은 당연하지 않다. 하나님을 사모하고 찾는 이들에게 그 구원은 언제나 뜻밖이다. 어떻게 나와 같은 이를 기억하시고 이렇게 은혜를 베푸시는지 놀라게 된다. 그럴 때, 우리가 받은 은혜에 대해 겸손해지며, 우리 구원을 이루기 위해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품게 된다.
---「여호와의 날이 임박하였으니(요엘 2:1-17)」중에서
유다와 이스라엘을 다루는 틀이 다른 열방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들 모두에게 공통된 것은 약자에 대한 그들의 행동이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점이다.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것이 있다면, 그들은 열방과 다른 기준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들은 전쟁 중의 지나치게 비인도적인 처사로 인해 심판받지만 다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에 근거해 심판받는다는 점에서, 이방 나라들보다 좀더 강경하게 다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경우, 유다보다 상세하게 그들의 죄악상이 고발된다. 예언자는 사회에 가득한 가난한 자에 대한 억압과 착취야말로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는 근거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아모리 사람 대신 이스라엘을 인도해 그 땅에 거하게 하셨고, 그들에게 예언자와 나실인을 세우셨으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나실인과 예언자를 더럽히고 거부했으며, 사회에 불의가 가득해 사람이 돈으로 거래되게 만들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백성들이며, 그 구체적인 현실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착취였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죄(아모스 2:4-16)」중에서
11절은 예루살렘이 함락되던 날 에돔의 모습을 표현한다. 이방인들이 들이닥쳐 모든 재물을 약탈해 가던 날, 그들이 예루살렘 성문을 들어서며 제비를 던져 각자 차지할 몫을 나눌 때, 에돔은 “멀리” 서 있었다. 야곱이 당하는 곤경과 재앙을 그저 멀리서 지켜만 보던 에돔의 모습은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다. 11절은 그날의 모습을 사진처럼 생생하게 표현한다. 이웃의 곤경 앞에서 멀리 서 있다는 것은 중립적인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과 한패거리임을 보여 주는 것일 뿐이다.
---「에돔의 교만과 폭력(오바댜 1장)」중에서
출판사 리뷰
“소예언서를 읽는 것은 오늘 주님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모색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지만, 블레셋의 철 병거 때문에 곧바로 그 땅을 차지할 수 없었다. 물론 이스라엘도 곧 철기 문명을 받아들일 테니, 블레셋을 몰아내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하지만 정작 이스라엘을 어렵게 만든 것은 가나안 땅의 철기가 아니라 종교였다. 넘쳐나는 제사, 약속된 풍요를 골자로 한 바알 신앙은 금세 이스라엘의 몸과 마음을 장악했고, 여호와 신앙조차도 바알 체계에 물들어 버렸다. 이후로, 예언자들이 맞닥뜨려 싸운 대상은 겉모습은 여호와 신앙을 지녔으나 실상은 바알 신앙을 지닌 이스라엘이었다. 그렇기에 예언자들의 선포에 당시 이스라엘은 귀를 닫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정성을 다해 신을 섬기면 신이 약속된 모든 풍요의 복을 내려준다는 체계는 예나 지금이나 종교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하나님을 향한 정성이 표현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함께 살아가는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명확히 하면서, 이스라엘의 제의적 정성 전체를 산산이 부수어 버렸다. ‘제사보다는 인애, 정의, 공의’로 대표되는 예언자들의 외침은 사람의 마음을 감싸고 위로하면서 언젠가 올 큰 복을 바라며 살아가게 하는 종교 자체를 무너뜨린다.
진정한 여호와 신앙은 번영을 추구하는 이 세상과 맞지 않는다. 가나안의 철 병거가 아니라 바알 신앙 때문에 그 땅에서 쫓겨났던 이스라엘의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 이 끔찍한 세상에서 여호와를 왕으로 모시고 살아갈 수 있을까? 이스라엘은 계속 실패했고, 예언자들은 줄기차게 고발하고 심판을 선언한다. 오늘 우리라고 해서 그 시대의 그들과 다를 수 있을까. 흔히 레위기가 선언하는 희년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제도라고 말한다.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희년만이 아니다. 여호와를 왕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역설적일지 모르나, 우리가 소예언서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로 이어지는 예언자들에 대한 공부를 계속 할수록, 여호와 신앙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막막함은 커져 갔다. 그러한 막막함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언서들 안에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던 회복과 구원의 날에 대한 말씀이었다. 현재 우리가 지닌 예언서는 그때의 죄악을 폭로하는 책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회복을 경험하며 기다리는 공동체에 어떻게 하나님과 더불어 회복된 일상을 살아갈지 알려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예수께서 끊임없이 ‘나를 따르라’ 명령하실 때, 예수를 따르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생하게 보여 주는 것이 예언자들의 선포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소예언서를 읽는 것은 오늘 주님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모색하는 것이다.”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2: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 요나·미가·나훔·하박국의 메시지에서 그 길을 찾다
책소개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 요나서, 미가서, 나훔서, 하박국서에서 그 길을 찾다!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나란히 배열된 이 네 권의 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열방 가운데 어떻게 행하시는지를 증언하고 있다. 악에서 돌이킨 니느웨는 살아나지만(요나서), 거짓과 포악, 탈취를 행하는 니느웨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다(나훔서). 이 원칙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도 적용된다. 악을 행하는 사마리아가 무너질 것이며, 정의를 굽게 하고 시온을 피로 건설하는 유다는 갈아엎은 밭과 흙무더기가 될 것이다(미가서). 하나님은 유다의 악으로 인해 바벨론을 들어서 심판하시지만, 바벨론의 악에 대해서도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다(하박국서). 이처럼 폭력을 행하는 자에게 심판이 악으로부터 돌이키는 자에게는 회복과 긍휼의 은혜가 주어지는 원리는,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것이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는 것이었듯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도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더 강하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하던 악에서 떠나는 것임을 천명한다.
책 속으로
소예언서는 폭력을 행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악으로부터 돌이키는 자에게는 회복과 긍휼의 은혜가 주어짐을 명확히 증언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것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는 것이다(욘 3:8). 오늘 우리 교회에 요구되는 것도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더욱 강하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하던 악에서 떠나는 것이다.
---「들어가는 말」중에서
한 가지 더 놀라운 것은, 요나의 말을 들었음에도 사공들이 여전히 나에게 모든 책임을 물으며 위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대적인 신앙에 사로잡혀 있었다면, 그들이 할 다음 수순은 당연히 신의 진노를 불러일으킨 사람을 묶어 신에게 바치는 일이다. 그러나 그 배의 사공들은 요나에게 달려들지 않으며 위협하지 않는다. 요나는 이방 니느웨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싫어하여 도망가지만, 이방인 사공들은 요나의 목숨을 결코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하나님, 요나, 그리고 사공들(요나 1:1-16)」중에서
우상숭배가 문제라면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만 경배하라는 권면이 이어져야 하지만, 미가서에서 그런 권면은 찾아볼 수 없다. 도리어 미가는 줄기차고도 일관되게 권력층에 의해 자행되는 불의와 억압을 고발하며(3:1-12; 6:10-12; 7:2-4),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권면한다(6:8). 그러므로 우상숭배가 가져오는 실질적인 결과는 사회적 불의와 억압의 증대라고 말할 수 있다. 우상숭배로 대표되는 헛된 것을 경배하는 세상은 필연적으로 이웃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이웃에게 일어나는 재난에 무관심하고 정의를 저버린 세상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우상숭배의 반대말은 그저 ‘여호와를 섬기기’가 아니라, ‘정의와 인자를 행하며 하나님과 동행하기’라고 할 수 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임할 심판과 애곡(미가 1:2-16)」중에서
나훔서는 용서와 인자하심에 방점이 찍혀 있는 출애굽기 구절을 활용하여, 반드시 임할 진노와 분노, 심판을 강력하게 강조한다고 볼 수 있다. 출애굽기 34:6-7은 요나서(4:2)와 미가서(7:18)에도 쓰였고, 나훔서 첫머리에도 쓰였다. 그 점에서 히브리어 성경 배열에 따를 경우 나란히 놓인 이 세 책은 모두 출애굽기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 나름대로 주석하고 적용했다고 볼 수 있다. 요나는 이 구절로 인해 하나님이 니느웨에 은혜 베푸실 것을 두려워했으나, 미가는 이 구절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에 베푸실 은혜를 기대했으며, 이제 나훔은 이 구절을 조금 바꾸어 표현하면서 니느웨에 임할 심판을 기대한다. 요나가 두려워했던 니느웨의 회복은 니느웨 백성들이 왕부터 가축에 이르기까지 베옷을 두르고 그 악한 행실을 고쳤기 때문이며, 미가 역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합당한 삶으로의 돌이킴에 대해 여러 번 언급했다. 이렇게 볼 때, 나훔이 선포하는 니느웨에 임할 재앙과 심판은 그들이 결국 그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나훔서 3장은 니느웨에 가득한 죄악상을 상징하는 말로 니느웨를 일러 “피의 성”이라 부른다(나 3:1).
---「복수하시는 하나님(나훔 1장)」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끝’을 향한 것, 성취를 향한 것이다. 하박국의 진술은 구약이 말하는 ‘종말’을 도드라지게 보여 준다. 종말은 단순히 세상의 끝, 이 땅 역사의 끝이 아니다. 종말은 시간의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이 되는 순간, 하나님이 그 약속하신 것을 마침내 이루시어 그 땅의 역사 속에 현실이 되게 하시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종말은 역사 바깥의 어떤 시간이나 이 땅에서의 삶 너머의 어떤 시간이 아니다. 종말을 기다리는 것은 ‘내세’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종말을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며, 그 하신 말씀이 땅에 떨어지지 않고 거짓되지 않음을 굳게 붙잡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신약 시대에 이르러 ‘내세’와 부활을 기다리는 신앙의 정수(精髓)라고 해야 할 것이다. 죽은 다음의 세계를 믿는 것이 부활 신앙의 정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이 부활 신앙의 정수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땅에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이루시는 분(렘 9:24)임을 굳게 믿고, 불의와 폭력 가득한 세상에서 그 정의와 공의를 사모하고 확신하고 기대하며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종말’을 기다리는 신앙이라 할 것이다.
---「악인이 의인을 삼키는 세상(하박국 1장)」중에서
출판사 리뷰
“소예언서를 읽는 것은 오늘 주님을 따르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모색하는 것이다!”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2』는 열두 권의 소예언서 중 네 권(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을 그 순서에 따라 설명한다. 미가서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반면, 요나서와 나훔서, 하박국서는 모두 이스라엘을 둘러싼 열방과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네 권의 책이 나란히 배열되어 있다는 것을 통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행하심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열방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이건 열방이건, 악을 행하는 이들은 멸망하지만 그 행하던 악에서 돌이키는 이들은 언제라도 건짐을 받는다. 악에서 돌이킨 니느웨는 살아나고(요나서), 거짓과 포악, 탈취를 행하는 니느웨는 반드시 멸망한다(나훔서). 그리고 이 원칙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도 해당된다. 악을 행하는 사마리아가 무너지며, 정의를 굽게 하고 시온을 피로 건설하는 유다는 갈아엎은 밭과 흙무더기가 된다(미가서). 유다의 악으로 인해 하나님은 바벨론을 들어서 심판하시지만, 바벨론의 악에 대해서도 반드시 심판하신다(하박국서).
이처럼, 요나서는 열방을, 미가서는 유다를, 나훔서는 다시 열방을 다루고, 하박국서는 열방을 통해 심판받는 유다를 다룬다는 점에서 서로 잘 연결되어 있다. ‘폭력’이라는 단어가 요나서와 미가서, 하박국서에 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모티프는 요나서와 미가서, 나훔서에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2』는 나란히 배열된 이 네 권의 책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열방 가운데 어떻게 행하시는지 증언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라고 하여 어떤 특혜를 받거나 죄에서 면책 받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명확히 볼 수 있음에도, 어느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신앙이 세상 사람과 다른 혜택이나 복을 받게 할 거라는 생각에 젖어 있는 듯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2』는 네 권의 예언서가 폭력을 행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악으로부터 돌이키는 자에게는 회복과 긍휼의 은혜가 주어짐을 증언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들 예언서에 따르면, 이스라엘에게 요구되는 것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는 것이었다(욘 3:8).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도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더욱 강하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하던 악에서 떠나는 것이라고 김근주 교수는 말한다. 또한 그럴 때, 비록 우리에게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더라도,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게 될 것이며(합 3:18), 하나님은 모든 것이 사라져 보잘것없는 우리의 발을 사슴 같게 하셔서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실 것이라고, 가장 약해진 그때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군사로 싸우게 하실 것이라고 설파한다.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3: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스바냐·학개·스가랴·말라기의 메시지를 통해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꿈꾸다!
책소개
원문에 충실한 해석과 한국 교회를 향한 적실성 있는 메시지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매듭 짖는 세 번째 책!
김근주 교수의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원문에 충실한 해석과 한국 교회를 향한 적실성 있는 메시지로 사랑받아 온 책이다. 2015년에 호세아서, 요엘서, 아모스서, 오바댜서를 해설한 제1권을, 2016년에 요나서, 미가서, 나훔서, 하박국서를 해설한 제2권을 출간한 데 이어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3』을 출간함으로써 드디어 12예언서 전체에 대한 해설을 마친 저자는, 제3권에서 스바냐서(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학개서(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스가랴서(만군의 여호와의 나라), 말라기서(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해설을 꼼꼼하게 풀어내고 있다.
책 속으로
하나님이 예언자를 보내셨다는 것은 세상에 문제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것도 보통 문제가 아니라 나라가 멸망하게 되는 문제를 지닌 시대였다. 멸망해 가는 나라에서, 예언자들은 어떻게 견디고 버티며 살 수 있었을까? 예언서에 온통 ‘그날에’, ‘그때에’라는 표현이 가득한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언자들을 살게 한 것은 현재의 참상에도 불구하고 다가올 새로운 날에 대한 기대, 희망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모든 가치가 땅에 떨어진 시대를 살면서 예언자들은, 강하고 단호하게 부당함과 불의를 맞서고 규탄하고 거부했지만, 이 모든 참상 너머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꿈꾸었다. 12예언서의 마지막에 놓인 스바냐서, 학개서, 스가랴서, 말라기서에는 특히 이러한 기대가 넘쳐난다.
_들어가는 말 중에서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의 반대말은 “교만하여 자랑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참으로 교만한 자들을 낮추시고 겸손한 자들을 세우신다. 야고보서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잠 3:34)을, 지금 웃는 삶과 지금 우는 삶(약 4:9-10), 지금 부하여 금과 은을 쌓고 삯을 제대로 주지 않는 부자와 가난한 이들의 대조(약 5:1-4)로 설명하는데, 이는 정확히 스바냐서와 구약성경이 말하는 바이기도 하다. 곤고함과 가난이 싫어서 재물을 쌓고 힘을 길렀지만 도리어 그 힘과 재물이 그들을 망하게 했으므로 곤고함과 가난함이야말로 그들을 참으로 살게 하는 역설이 있다. 그들의 강함은 그들을 넘어지게 하고 그들의 약함은 그들을 안전하고 견고하게 한다. 우리네 교회의 약함이 우리를 하나님만 의지하게 할 것이며, 우리네 교회의 강함이 우리를 세상에 대해 위협하고 오만하게 만들 것이다.
_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스바냐 3장) 중에서
솔로몬 성전은 참으로 대단한 위용의 성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전의 근본적인 본질은 여호와 하나님이 그 이름을 두신 곳이다. 이러한 본질이 성전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지, 성전의 규모나 위용이 본질을 이끌어 갈 수는 없다. 새로 지어지는 성전이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의 눈에는 보잘것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정말 보아야 할 것은 겉으로 드러난 위용이 아니라 속에 담고 있는 본질이다. 이와 연관해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 구절에 있는 ‘너희는 그것을 이제 어떻게 보고 있느냐’ 하는 질문이다. 이미 1장에서도 학개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 가운데 ‘이제까지 걸어온 길들을 유의하고 살펴보라’는 명령이 두 번이나 반복되었고(1:5, 7), 이제 이 구절에서도 현재 지어지는 성전 재건을 백성들이 어떻게 보고 있는지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중요한 내용 가운데, 과거와 현실을 바라보는 우리의 숙고와 안목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방적으로 선포되는 내용만이 아니라 이처럼 우리의 숙고와 반성과도 관련이 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의 초라함 속에 있는 본질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그 백성들에게 찾으신다.
_온 땅을 진동케 하실 하나님(학개 2장) 중에서
열방에 대한 심판으로 시작한 9장은 열방의 회복과 시온에 좌정하신 다윗의 후예에 대한 선언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은 열방의 교만을 치시되,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하신다. 시온에 임하는 왕은 공의롭고 겸손하며 모든 무기를 없애고 이방에 평화를 전할 것이다. 9장 곳곳에 전쟁 이미지가 있지만, 여호와께서 행하실 때 갇힌 자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고 그들을 통해 열방을 치신다. 이것은 전쟁과 무력에 의한 평화가 아닌, 약한 자를 통해 이루어지는 평화다. 마침내 그날에 하나님은 곤고했던 이스라엘로 왕관의 보석처럼 빛나게 하시고 그들을 형통하고 번성하게 하실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온에 임하는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면서 또한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기도 하다.
_시온에 임하는 왕과 그의 백성(스가랴 9장) 중에서
말라기서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표현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로, 모두 23회 나타난다(1:2과 3:13에서만 ‘여호와가 말씀하셨다’로 되어 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표현하는 것은 학개서와 스가랴서에서도 발견되는 특징인데, 말라기서도 이 표현을 반복하면서, 말라기를 통해 선포된 말씀이 다른 누구의 것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강조한다. 이에 따르면, 말라기의 시대야말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빛나는 시대다. 사람들은 여호와를 신뢰하지 않은 채 불신과 체념 속에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들을 가벼이 여기고 소홀히 여길 뿐 아니라, 율법을 통한 규례도 지키지 않고 십일조도 도둑질하기 일쑤지만,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거듭 그 이름을 밝히시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의 확실성을 말라기를 통해 증거하신다. 어둡고 미래가 불투명하고 현실 세계에서의 삶이 어려울수록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빛이 난다.
_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리라(말라기 2:17-4:6) 중에서
--- 본문 중에서
출판사 리뷰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의 메시지를 통해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꿈꾸다!
하나님이 예언자를 보내셨다는 것은 세상에 문제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것도 보통 문제가 아닌,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 정도의 심각한 문제였다. 예언자들은 멸망해 가는 나라에서 어떻게 견디며 살 수 있었을까? 예언자들을 살게 한 것은, 현재의 참상에도 불구하고 다가올, 새로운 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었다. 예언서가 온통 ‘그날에’, ‘그때에’라는 표현으로 가득한 것도 그 때문이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모든 가치가 땅에 떨어진 시대를 살면서 예언자들은, 강하고 단호하게 부당함과 불의에 맞서고 규탄하고 거부했지만, 이 모든 참상 너머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꿈꾸었다. 12예언서의 마지막에 놓인 스바냐서, 학개서, 스가랴서, 말라기서는 특히 이러한 기대가 넘쳐나는 책이다.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3』는 열두 권의 소예언서 중 마지막 네 권(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을 그 순서에 따라 설명한다. 스바냐서는 아직 나라가 멸망하기 전 요시야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이어지는 학개서, 스가랴서, 말라기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온 시대를 배경으로 하기에, 12예언서의 마지막 네 권은 나라가 망해 가는 중에 혹은 나라가 망한 후에 그 쉽지 않은 현실 속에서 공동체가 어떤 소망을 가지고 살았는지를 잘 보여 준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보면 소망하기보다 절망하기 쉬운 게 사실이다. 국가는 망하지 않았을지라도 기독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지 오래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살기에 결코 녹록치 않은 현실에 놓여 있다. 이런 우리에게 『소예언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3』는 어렵게만 느껴지던 스바냐서, 학개서, 스가랴서, 말라기서를 다시 펴고 읽게 할 것이다. 그리고 예언자들이 소망하던 그 나라를 우리도 꿈꾸게 할 것이다.
* 출처 : 예스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