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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움 없는 마무리
강가딘777
2020. 12. 23. 21:38
아쉬움 없는 마무리
신명기 34:1~8
설교) 인생의 마무리에 공통적 소망이 있다. 후회, 아쉬움, 미련이 없는 것이다. 모압평지 느보산 세 봉우리 중 비스가에서 가나안 전체 땅을 내려보도록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끄셨고 말씀하셨다. 너는 거기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저 땅으로 반드시 들어간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히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이다. 네 수고와 헌신과 충성이 헛되지 않았다. 모세의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그 영혼에 확정하도록 보여주신 것이다. 그 확신가운데 마지막 눈을 감도록 은혜를 배푸신다.
모세는 120세임에도 눈이 흐리지 아니하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 그가 죽어서 묻힌 곳은 아무도 몰랐다. 매장한 장소에 와보지도 못하게 하였다. 혹시 무덤이나 시신을 숭배의 재료로 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오직 하나님의 언약의 율법을 붙들고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모세는 한점 아쉬움도 남기지 않고 생을 마감했다.
모세의 그러한 삶의 근거는,
1. 사명 : 기력이 쇠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 주신 사명 때문이었다. 사명이 다했기 때문에 기력이 쇠하지 않아도 가는 것이다. 인생은 사명때문에 존재하고 사명이 끝나면 그 생도 끝난다. 모세에게 괴로움, 슬픔, 실망, 좌절이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그는 약해지지 않았고 주저앉지 않았다. 아무런 아쉬움도 남지 않았다. 그가 사명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물리치는 도구가 사명에 대한 인식이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확증하고 붙듬이 중요하다. 이 사명이 끝나기까지는 하나님이 나를 무너지지 않게 하시리라는 믿음이 두려움을 없앤다. 어떤 것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길을 막지 못한다.
자기인생을 해석하려면 하나님 앞에서 내 인생의 사명을 발견해야 한다. 사명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매우 현실적이고 개별적이다.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작고 소박할 수 있다. 사람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것, 사랑의 사람, 축복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걸음씩 가다보면 그 사명이 명확하게 보인다. 사명의 명사형과 동사형이 있다. 교사가 명사형이면 가르치는 것은 동사형이다. 동사형으로 보면 의미가 더 넓어진다. 작은 것은 웃는 것부터이다. 소요리문답1) 사람의 제일되는 본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즐거워함은 웃는 것으로 나온다.
2. 소망 : 땅만 바라본게 아니라 (히11장)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다. 이생만 바라보면 허무하고 허망하다. 하늘에 있는 기업을 바라봤다.더 복되고 영광스러운 이 세상 너머의 세상을 바라봤다. 그 나라를 자기 영혼에 확정함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래서 아무런 아쉬움없이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맡긴 것이다. 아쉬움이 있지만 영광의 큰 확신이 그 아쉬움을 덮는다. (끝)
설교는 은혜롭고 좋은 내용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아쉬움없이 감당했고, 더 큰 소망을 품고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는 내용은 진한 감동을 주며 신앙의 도전을 불러온다.
그런데 설교를 듣고 그동안 신명기를 읽으면서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왜 모세는 그 땅에 들어갈 수 없었나? 모세는 자기 인생을 돌아보며 한 점 아쉬움이 없었을까?
1) 모세는 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었나?
가나안 정탐(민13장)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하고(신1:26), 원망했다(신1:27). 모세는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도 진노하사 이르시되,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신1:37)" 말한다.
모세는 하나님께 간청까지 했다.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신3:25~28)
모세는 또 같은 말을 한다.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하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이제 더 이상 그일로 말하지 말라.
그리고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하나님은 분명히 확정하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다음 지도자인 여호수아를 준비시키는 것이 네 마지막 일이라고 하신다.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모세는 '그들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지도자인 모세까지도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모세는 그런 백성들에 대해 말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게 하실 때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올라가서 내가 너희에게 준 땅을 차지하라 하시되,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믿지 아니하고 그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여 왔느니라"
(신9:23-24)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29:3~4)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처음부터 주지 않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들은 목이 곧은 백성(신9:13),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32:20)였다.
모세는 자신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너희 때문" 이라고 조금 감정적으로 말하는 느낌을 준다. 주어진 사명이 끝나서가 아니다. 여호와께 그 땅에 들어가길 긴구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음을 보듯이 모세에겐 미련이 남았다.
2. 모세는 한 점 아쉬움 없이 눈을 감았을까?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노라."
(신31:16-22)
모세가 죽기 전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이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김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운데 허다한 재앙과 환린을 당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 내용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 불러서 그 증거로 삼으라고 하신다.
이 예언을 들은 모세는 다음과 같이 백성들을 향해 말하였다.
"내가 너희의 반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오늘 내가 살아서 너희와 함께 있어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 (신31:27)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길을 떠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하게 하므로 너희가 후일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라" (신31:29)
이 내용을 보면서 모세가 한점 아쉬움 남기지 않고 생을 마감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전혀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열심으로 결국 성취되지만(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감), 그 언약의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하나님을 의지하며 섬기며 사랑하고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하나님 백성의 삶). 모세의 수고, 헌신, 충성은 하나님 백성의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해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모세는 아쉬움, 후회 없이 주어진 사명을 다하고 가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 하나님의 불길한 예언의 말씀을 듣고 참으로 자기의 사역에 대한 허망함, 백성들에 대한 못미더움, 백성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 근심과 불안,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한계와 부족함에 대한 회한이 남지 않았을까? 그에게 제일의 목표요 소망은 모든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코 앞에 두고도 이루지 못했다.
백이십세의 나이는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기에는 많았다. (신31:2 내가 더이상 출입하지 못하겠고) 그러나 모세는 여전히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제 "stop"을 외치셨고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치 않으시고,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를 준비시키는 마지막 사역을 명하셨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언급하신다.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 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내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이라" (신32:51)
가나안 정탐 이후 갈렙과 여호수아를 뺀 모든 백성이 40년 세월에 걸쳐 광야에서 죽었다. 그리고 지도자인 모세도 같은 이유로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함은 분명하다.
이스라엘에 더 이상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공과를 나누어 짊어진 한 명의 연약한 인간이었다. 여호수아와 사사기, 왕정시대와 포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함과 화목의 사역이 왜 절실히 필요한지를 점점 더 께닫게 된다.
3. 모세는 소망(더 나은 본향)을 사모함으로, 영광스러운 하늘 기업을 바라보며, 아무런 아쉬움없이 그 소망을 자기 영혼에 확정함으로 만족스럽게 생을 마감했을까?
모세의 마지막 이야기에서(신명기 전체에서도) 그런 뉘앙스를 주는 표현을 한단어도 찾을 수 없다. 여백은 많은 상상력을 불러오고 나름의 해석의 소지를 준다. 히11장에 믿음에 대한 예시로서 모세를 언급하지만, 그것은 출애굽 사건을 시작으로 불확실한 장래의 상황에 대한 모세의 여호와 신앙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모든 믿음의 행위는 궁극적인 소망(본향을 사모함)으로 이어진다는 신학적 결론을 도출한다.
신명기의 문맥을 따라 살펴본 모세는, 아쉽게 눈을 감았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미래를 걱정하며 마지막 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경함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결국은 언약을 성취하시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붙잡아 주실 것, 구원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목이 곧고 패역하고 반역을 밥먹듯이 하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실지 모세는 구체적으로 몰랐겠지만, 40년 광야의 연단 이상의 하나님의 매서운 심판과 그후의 회복이 있으리라는 예견을 갖고 떠나지 않았을까? 복과 저주(화), 생명과 사망(신11:26, 30:15)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에 놓인 동전의 양면이었다.
4. 꼭 다시 생각할 것들
- 문맥을 무시하니 엉뚱한 결론에 이른다.
- 정확한 본문주해를 생략하니 성경의 하나님이 다른 분이 되버린다.
- 사람이 주인공이 되니 하나님이 조연으로 밀려난다.
- 겉만 핥다 보니(피상적) 알맹이까지 가지 못한다(본질적).
신명기에서 모세는 수차례에 걸쳐 반복해서 말하고 또 말한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규례와 법도와 명령을 지키라" 우리에게 지금 시급하고도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의미를 찾는 일이다.
그렇게 기록된 계시인 성경을 읽고 알아가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놀라운 찐 사랑에 눈뜨게 될 것이고, 인위적으로 웃는 연습을 안해도 자연스럽게 웃고 진정으로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주 예수의 제자로 사는 삶을 고민하고 성찰하고 애쓸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향해 크게 웃으실 것이다.
우리가 나쁜 의미로 자주 언급하는 율법주의처럼, 율법의 말씀 그대로를 지키느냐 아니냐를 따질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율법이(또는 구약이) 이제는 필요없는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과 말씀에 대한 무관심을 가져오며,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대한 무지를 가져올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릇된 신앙관을 붙들고 열심을 내는 껍데기 신자들을 만들어내지는 않을까 심히 우려스럽다.
그러므로 율법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의 정신, 의미, 가치를 찾아내고 우리의 현재 삶속에서 그것을 구현해내고 살아내는 것이다. 예수님을 율법을 폐지하러 오시지 않고, 율법을 성취하러 오신 분이시다.(율법을 완전케 한다는 틀린 표현)
예수님의 성경은 구약성경이었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러 오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 뜻은 구약의 본문들을 자세히 샆펴봄 없이는 완전하게 알 수 없다.
우리가 신앙함에 있어, 죄사함과 화목의 사역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이제 그가 행하신 본과 말씀의 내용을 따르는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소망한다.
p.s.)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구약성경을 지칭)의 강령이니라. (마22:36-40)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23:23)
정의: 미슈파트, 올바른 판결, 심판
긍휼: 쩨다카, 공감하는 능력, 공의
믿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함
(덧붙이는 말 : 설교를 듣고 성경본문을 읽으면서 하나씩 메모를 하다보면 결국 이런 글들이 씌여진다. 내용상 설교비평이 되고 누군가에 대한 공격처럼 읽혀지겠다는 걱정이 있다.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수단에는 성경, 예배, 기도, 찬양, 설교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예배 중 설교는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수단이다. 개인적으로 더 자유로워지면 좋겠지만, 여전히 설교는 개신교인이라면 포기할 수 없는 은혜의 도구이다.
그런데 설교를 들으면서 가슴이 철렁하고 충격이 오는 순간이 있었다. 설교가 채택한 성경본문의 내용과 설교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충돌할 때이다. 제목설교나 주제설교를 하면서 본문과는 거리가 먼 내용들로 설교를 구성하는 것은 설교의 성격상 또는 목회적 필요에 따라 그럴 수 있다 본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앞뒤 문맥을 고려하지 않는 자의적인 해석을 내놓을 때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이렇게 성경을 다뤄도 되나 큰 혼란이 온다. 이것을 듣는 신자들은 성경본문이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고 철썩같이 믿고 신앙생활을 해갈텐데 과연 이래도 되는가 심히 우려가 된다.
문맥이 의미를 결정한다고 한다. 한 단어나 일부 구절에서 어떤 중요한 의미를 뽑아내려는 것은, 신령한 영적통찰이 되기 보다는 성경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오역하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는 이단 사이비가 주로 하는 실수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어떤 단어나 구절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면서 문맥을 무시한 전개는 성경에 쓰여있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것, 또는 반대되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이는 성경본문을 문맥에 따른 이해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성경이해를 하는지 대략의 추측은 갖고 있지만 정확히는 모르겠다.
작금의 문제의식의 출발은 이렇게 논할거면 성경이(특히 구약성경이) 도대체 왜 필요하냐는 것이다. 바른 성경주해가 바른 해석을 가져온다는 말을 믿기에, 오늘도 이런 글들이나마 써서 스스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들이 외칠 것만 같다.-신명기를 아쉬움없이 마무리하면서)
신명기 34:1~8
설교) 인생의 마무리에 공통적 소망이 있다. 후회, 아쉬움, 미련이 없는 것이다. 모압평지 느보산 세 봉우리 중 비스가에서 가나안 전체 땅을 내려보도록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끄셨고 말씀하셨다. 너는 거기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저 땅으로 반드시 들어간다,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히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이다. 네 수고와 헌신과 충성이 헛되지 않았다. 모세의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 약속의 성취를 그 영혼에 확정하도록 보여주신 것이다. 그 확신가운데 마지막 눈을 감도록 은혜를 배푸신다.
모세는 120세임에도 눈이 흐리지 아니하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 그가 죽어서 묻힌 곳은 아무도 몰랐다. 매장한 장소에 와보지도 못하게 하였다. 혹시 무덤이나 시신을 숭배의 재료로 삼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오직 하나님의 언약의 율법을 붙들고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모세는 한점 아쉬움도 남기지 않고 생을 마감했다.
모세의 그러한 삶의 근거는,
1. 사명 : 기력이 쇠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 주신 사명 때문이었다. 사명이 다했기 때문에 기력이 쇠하지 않아도 가는 것이다. 인생은 사명때문에 존재하고 사명이 끝나면 그 생도 끝난다. 모세에게 괴로움, 슬픔, 실망, 좌절이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그는 약해지지 않았고 주저앉지 않았다. 아무런 아쉬움도 남지 않았다. 그가 사명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물리치는 도구가 사명에 대한 인식이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확증하고 붙듬이 중요하다. 이 사명이 끝나기까지는 하나님이 나를 무너지지 않게 하시리라는 믿음이 두려움을 없앤다. 어떤 것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길을 막지 못한다.
자기인생을 해석하려면 하나님 앞에서 내 인생의 사명을 발견해야 한다. 사명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매우 현실적이고 개별적이다.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작고 소박할 수 있다. 사람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는 것, 사랑의 사람, 축복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걸음씩 가다보면 그 사명이 명확하게 보인다. 사명의 명사형과 동사형이 있다. 교사가 명사형이면 가르치는 것은 동사형이다. 동사형으로 보면 의미가 더 넓어진다. 작은 것은 웃는 것부터이다. 소요리문답1) 사람의 제일되는 본분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즐거워함은 웃는 것으로 나온다.
2. 소망 : 땅만 바라본게 아니라 (히11장)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다. 이생만 바라보면 허무하고 허망하다. 하늘에 있는 기업을 바라봤다.더 복되고 영광스러운 이 세상 너머의 세상을 바라봤다. 그 나라를 자기 영혼에 확정함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래서 아무런 아쉬움없이 자기 영혼을 하나님께 맡긴 것이다. 아쉬움이 있지만 영광의 큰 확신이 그 아쉬움을 덮는다. (끝)
설교는 은혜롭고 좋은 내용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아쉬움없이 감당했고, 더 큰 소망을 품고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는 내용은 진한 감동을 주며 신앙의 도전을 불러온다.
그런데 설교를 듣고 그동안 신명기를 읽으면서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왜 모세는 그 땅에 들어갈 수 없었나? 모세는 자기 인생을 돌아보며 한 점 아쉬움이 없었을까?
1) 모세는 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었나?
가나안 정탐(민13장) 이후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하고(신1:26), 원망했다(신1:27). 모세는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도 진노하사 이르시되, 너도 그리로 들어가지 못하리라 (신1:37)" 말한다.
모세는 하나님께 간청까지 했다.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신3:25~28)
모세는 또 같은 말을 한다.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하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이제 더 이상 그일로 말하지 말라.
그리고 "너는 비스가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바라보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하나님은 분명히 확정하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다음 지도자인 여호수아를 준비시키는 것이 네 마지막 일이라고 하신다.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령하고 그를 담대하게 하며 그를 강하게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이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모세는 '그들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과 불순종 때문에 지도자인 모세까지도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모세는 그런 백성들에 대해 말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게 하실 때에 이르시기를, 너희는 올라가서 내가 너희에게 준 땅을 차지하라 하시되,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믿지 아니하고 그 말씀을 듣지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여 왔느니라"
(신9:23-24)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신29:3~4)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처음부터 주지 않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그들은 목이 곧은 백성(신9:13),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32:20)였다.
모세는 자신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너희 때문" 이라고 조금 감정적으로 말하는 느낌을 준다. 주어진 사명이 끝나서가 아니다. 여호와께 그 땅에 들어가길 긴구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음을 보듯이 모세에겐 미련이 남았다.
2. 모세는 한 점 아쉬움 없이 눈을 감았을까?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내가 그들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인 후에 그들이 먹어 배부르고 살찌면 돌이켜 다른 신들을 섬기며 나를 멸시하여 내 언약을 어기리니,
그들이 수많은 재앙과 환난을 당할 때에 그들의 자손이 부르기를 잊지 아니한 이 노래가 그들 앞에 증인처럼 되리라. 나는 내가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이기 전 오늘 나는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아노라."
(신31:16-22)
모세가 죽기 전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이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김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운데 허다한 재앙과 환린을 당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 내용을 담은 노래를 만들어 불러서 그 증거로 삼으라고 하신다.
이 예언을 들은 모세는 다음과 같이 백성들을 향해 말하였다.
"내가 너희의 반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오늘 내가 살아서 너희와 함께 있어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 (신31:27)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길을 떠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하게 하므로 너희가 후일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라" (신31:29)
이 내용을 보면서 모세가 한점 아쉬움 남기지 않고 생을 마감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전혀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열심으로 결국 성취되지만(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감), 그 언약의 목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하나님을 의지하며 섬기며 사랑하고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하나님 백성의 삶). 모세의 수고, 헌신, 충성은 하나님 백성의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해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모세는 아쉬움, 후회 없이 주어진 사명을 다하고 가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 하나님의 불길한 예언의 말씀을 듣고 참으로 자기의 사역에 대한 허망함, 백성들에 대한 못미더움, 백성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 근심과 불안,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한계와 부족함에 대한 회한이 남지 않았을까? 그에게 제일의 목표요 소망은 모든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코 앞에 두고도 이루지 못했다.
백이십세의 나이는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기에는 많았다. (신31:2 내가 더이상 출입하지 못하겠고) 그러나 모세는 여전히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제 "stop"을 외치셨고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치 않으시고, 새로운 지도자 여호수아를 준비시키는 마지막 사역을 명하셨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언급하신다.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 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내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까닭이라" (신32:51)
가나안 정탐 이후 갈렙과 여호수아를 뺀 모든 백성이 40년 세월에 걸쳐 광야에서 죽었다. 그리고 지도자인 모세도 같은 이유로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함은 분명하다.
이스라엘에 더 이상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섭리안에서 공과를 나누어 짊어진 한 명의 연약한 인간이었다. 여호수아와 사사기, 왕정시대와 포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죄사함과 화목의 사역이 왜 절실히 필요한지를 점점 더 께닫게 된다.
3. 모세는 소망(더 나은 본향)을 사모함으로, 영광스러운 하늘 기업을 바라보며, 아무런 아쉬움없이 그 소망을 자기 영혼에 확정함으로 만족스럽게 생을 마감했을까?
모세의 마지막 이야기에서(신명기 전체에서도) 그런 뉘앙스를 주는 표현을 한단어도 찾을 수 없다. 여백은 많은 상상력을 불러오고 나름의 해석의 소지를 준다. 히11장에 믿음에 대한 예시로서 모세를 언급하지만, 그것은 출애굽 사건을 시작으로 불확실한 장래의 상황에 대한 모세의 여호와 신앙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모든 믿음의 행위는 궁극적인 소망(본향을 사모함)으로 이어진다는 신학적 결론을 도출한다.
신명기의 문맥을 따라 살펴본 모세는, 아쉽게 눈을 감았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미래를 걱정하며 마지막 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가장 가까이에서 경함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결국은 언약을 성취하시고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붙잡아 주실 것, 구원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목이 곧고 패역하고 반역을 밥먹듯이 하는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실지 모세는 구체적으로 몰랐겠지만, 40년 광야의 연단 이상의 하나님의 매서운 심판과 그후의 회복이 있으리라는 예견을 갖고 떠나지 않았을까? 복과 저주(화), 생명과 사망(신11:26, 30:15)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에 놓인 동전의 양면이었다.
4. 꼭 다시 생각할 것들
- 문맥을 무시하니 엉뚱한 결론에 이른다.
- 정확한 본문주해를 생략하니 성경의 하나님이 다른 분이 되버린다.
- 사람이 주인공이 되니 하나님이 조연으로 밀려난다.
- 겉만 핥다 보니(피상적) 알맹이까지 가지 못한다(본질적).
신명기에서 모세는 수차례에 걸쳐 반복해서 말하고 또 말한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규례와 법도와 명령을 지키라" 우리에게 지금 시급하고도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의미를 찾는 일이다.
그렇게 기록된 계시인 성경을 읽고 알아가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놀라운 찐 사랑에 눈뜨게 될 것이고, 인위적으로 웃는 연습을 안해도 자연스럽게 웃고 진정으로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주 예수의 제자로 사는 삶을 고민하고 성찰하고 애쓸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향해 크게 웃으실 것이다.
우리가 나쁜 의미로 자주 언급하는 율법주의처럼, 율법의 말씀 그대로를 지키느냐 아니냐를 따질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율법이(또는 구약이) 이제는 필요없는 구시대의 유물로 취급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과 말씀에 대한 무관심을 가져오며,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대한 무지를 가져올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릇된 신앙관을 붙들고 열심을 내는 껍데기 신자들을 만들어내지는 않을까 심히 우려스럽다.
그러므로 율법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의 정신, 의미, 가치를 찾아내고 우리의 현재 삶속에서 그것을 구현해내고 살아내는 것이다. 예수님을 율법을 폐지하러 오시지 않고, 율법을 성취하러 오신 분이시다.(율법을 완전케 한다는 틀린 표현)
예수님의 성경은 구약성경이었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러 오신 분이시다. 그리고 그 뜻은 구약의 본문들을 자세히 샆펴봄 없이는 완전하게 알 수 없다.
우리가 신앙함에 있어, 죄사함과 화목의 사역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이제 그가 행하신 본과 말씀의 내용을 따르는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소망한다.
p.s.)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구약성경을 지칭)의 강령이니라. (마22:36-40)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23:23)
정의: 미슈파트, 올바른 판결, 심판
긍휼: 쩨다카, 공감하는 능력, 공의
믿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함
(덧붙이는 말 : 설교를 듣고 성경본문을 읽으면서 하나씩 메모를 하다보면 결국 이런 글들이 씌여진다. 내용상 설교비평이 되고 누군가에 대한 공격처럼 읽혀지겠다는 걱정이 있다. 오해는 없었으면 좋겠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의 수단에는 성경, 예배, 기도, 찬양, 설교 등이 있다. 그 중에서 예배 중 설교는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수단이다. 개인적으로 더 자유로워지면 좋겠지만, 여전히 설교는 개신교인이라면 포기할 수 없는 은혜의 도구이다.
그런데 설교를 들으면서 가슴이 철렁하고 충격이 오는 순간이 있었다. 설교가 채택한 성경본문의 내용과 설교에서 주장하는 내용이 충돌할 때이다. 제목설교나 주제설교를 하면서 본문과는 거리가 먼 내용들로 설교를 구성하는 것은 설교의 성격상 또는 목회적 필요에 따라 그럴 수 있다 본다. 그러나 본문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앞뒤 문맥을 고려하지 않는 자의적인 해석을 내놓을 때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이렇게 성경을 다뤄도 되나 큰 혼란이 온다. 이것을 듣는 신자들은 성경본문이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고 철썩같이 믿고 신앙생활을 해갈텐데 과연 이래도 되는가 심히 우려가 된다.
문맥이 의미를 결정한다고 한다. 한 단어나 일부 구절에서 어떤 중요한 의미를 뽑아내려는 것은, 신령한 영적통찰이 되기 보다는 성경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를 오역하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아주 높다. 이는 이단 사이비가 주로 하는 실수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어떤 단어나 구절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면서 문맥을 무시한 전개는 성경에 쓰여있는 것과 완전히 다른 것, 또는 반대되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이는 성경본문을 문맥에 따른 이해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성경이해를 하는지 대략의 추측은 갖고 있지만 정확히는 모르겠다.
작금의 문제의식의 출발은 이렇게 논할거면 성경이(특히 구약성경이) 도대체 왜 필요하냐는 것이다. 바른 성경주해가 바른 해석을 가져온다는 말을 믿기에, 오늘도 이런 글들이나마 써서 스스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들이 외칠 것만 같다.-신명기를 아쉬움없이 마무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