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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힘과 방법5
강가딘777
2020. 8. 27. 13:25
6. 관점의 변화가 없다.
성경인물들의 관점에서만 설교를 구성하다보니 모든 의미가 결국 개인에게 귀결된다. 물론 적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말씀과 하신 일에 대한 의미와 뜻을 헤아리고 살펴보는데 먼저 집중하지 않고, 성경 본문을 배경삼아 그저 인문학적, 윤리적 적용점만을 매번 찾는다면 문제가 있다.
7. 성경본문을 포함하는 전체 맥락에 대한 세밀한 점검이 부족하다.
앞서 여러번 거듭 말하고 있지만, 구체적 내용들의 통합적이고 정확한 이해가 없는 설교는 신뢰감에 깊은 내상을 입힌다. 요셉이 노예생활 처음부터 형들은 용서했다고 했는데, 요셉은 진심으로 형들을 용서했을까? 창세기50장에서는 이와는 다른 관점이 있을 수 있다고 이미 이야기했다. 요셉이야기는 창세기 37장에서 50장에 걸쳐 나온다. 설교자가 특정본문을 가지고 한 주장이 이어지는 본문의 사실과 자꾸만 충돌한다면, 설교내용에 대한 믿음이 현저히 낮아질 것이다.
상황윤리적 접근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리시는 큰 그림안에서 먼저 설명되어야 한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의 연장선에서 야곱집안의 이야기, 요셉의 이야기를 풀어가야 한다. 요셉은 30세에 이방나라의 총리에 임명된후 그것은 생명을 구원하기 위함이고, 야곱가문을 애굽땅에 이주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임을 분명하게 깨달았을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뚜렷하게 알게 되는 것은,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요셉에게 임했으며, 이는 인간적인 요셉의 감정과 생각을 뛰어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을 생략하고 인간 요셉의 신앙이나 마음만을 살피는 일은 완전히 촛점에서 어긋난 것이며, 끄집어 낸 교훈들은 결국 피상적인 성경 묵상의 결과물로 버려지게 될 것이다.
결언)
설교자의 인품과 성정은 참으로 훌륭하시다. 언제나 온유하고 사랑의 섬김이 삶에 배여있는 분이다. 그러기에 이런 글을 쓸 때 늘 마음에 갈등이 생긴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그럼에도 해야 한다, 두 생각이 맹렬한 다툼을 한다. 그러나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만용일지 모를 용기를 내어본다.
성경적 우민화하는 말은 사용하고 싶지 않는 말이다. 교회에 다니는 연차와 상관없이, 성경을 가까이 하지만 그 내용엔 관심없고, 성경을 늘 읽지만 알지는 못하는 것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가르치는 자는 교리의 단편적, 피상적 적용이 믿음의 전부가 아님을 배우는 자들이 알게 해야 한다.
믿음의 공동체는 사랑의 관계를 지향하지만, 경험상 공동체를 벗어나는 순간 그 사랑은 쉽게 식어버린다. 결국 교회는 말씀의 빛 아래 주님이 머리되시는 믿음의 관계로 서로 맺어진다고 봐야한다. 문제는 그 말씀의 빛이 단순히 교리의 경직된 적용, 기독교 전통의 형식지킴으로 치환된다면, 교회의 근본적 변화는 요원할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교회는 성도 개개인에게 성경의 내용을 스스로 잘 살펴볼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세상을 꿈꾸도록 요구하신다. 그 '어떤'이 바로 성경에 들어있다. 이것에 집중할 때 종북이나 이슬람, 동성애 이슈에 매몰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예수님의 제자된 삶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이 땅에서 끝까지 살아갈 수 있다.
무례하고 몰상식한, 사랑이 없는 교회여, 성도여, 나여.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이 참으로 요상하게 변질되었지만 스스로는 자신의 흉한 몰골을 보지 못하는 눈 멀고 헐벗은 한국 교회에 임하시기를 소망한다.
추천서적>
-설교/팀 켈러/2016.9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고든피 더글라스 스튜어트/2016.9
-일곱문장으로 읽는 구약/크리스토퍼 라이트/2020.5
-교회됨/2010.11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2018.9
스탠리 하우어워스
성경인물들의 관점에서만 설교를 구성하다보니 모든 의미가 결국 개인에게 귀결된다. 물론 적용이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분이 하신 말씀과 하신 일에 대한 의미와 뜻을 헤아리고 살펴보는데 먼저 집중하지 않고, 성경 본문을 배경삼아 그저 인문학적, 윤리적 적용점만을 매번 찾는다면 문제가 있다.
7. 성경본문을 포함하는 전체 맥락에 대한 세밀한 점검이 부족하다.
앞서 여러번 거듭 말하고 있지만, 구체적 내용들의 통합적이고 정확한 이해가 없는 설교는 신뢰감에 깊은 내상을 입힌다. 요셉이 노예생활 처음부터 형들은 용서했다고 했는데, 요셉은 진심으로 형들을 용서했을까? 창세기50장에서는 이와는 다른 관점이 있을 수 있다고 이미 이야기했다. 요셉이야기는 창세기 37장에서 50장에 걸쳐 나온다. 설교자가 특정본문을 가지고 한 주장이 이어지는 본문의 사실과 자꾸만 충돌한다면, 설교내용에 대한 믿음이 현저히 낮아질 것이다.
상황윤리적 접근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리시는 큰 그림안에서 먼저 설명되어야 한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의 연장선에서 야곱집안의 이야기, 요셉의 이야기를 풀어가야 한다. 요셉은 30세에 이방나라의 총리에 임명된후 그것은 생명을 구원하기 위함이고, 야곱가문을 애굽땅에 이주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임을 분명하게 깨달았을 것이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뚜렷하게 알게 되는 것은, 강력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요셉에게 임했으며, 이는 인간적인 요셉의 감정과 생각을 뛰어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이것을 생략하고 인간 요셉의 신앙이나 마음만을 살피는 일은 완전히 촛점에서 어긋난 것이며, 끄집어 낸 교훈들은 결국 피상적인 성경 묵상의 결과물로 버려지게 될 것이다.
결언)
설교자의 인품과 성정은 참으로 훌륭하시다. 언제나 온유하고 사랑의 섬김이 삶에 배여있는 분이다. 그러기에 이런 글을 쓸 때 늘 마음에 갈등이 생긴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그럼에도 해야 한다, 두 생각이 맹렬한 다툼을 한다. 그러나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만용일지 모를 용기를 내어본다.
성경적 우민화하는 말은 사용하고 싶지 않는 말이다. 교회에 다니는 연차와 상관없이, 성경을 가까이 하지만 그 내용엔 관심없고, 성경을 늘 읽지만 알지는 못하는 것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가르치는 자는 교리의 단편적, 피상적 적용이 믿음의 전부가 아님을 배우는 자들이 알게 해야 한다.
믿음의 공동체는 사랑의 관계를 지향하지만, 경험상 공동체를 벗어나는 순간 그 사랑은 쉽게 식어버린다. 결국 교회는 말씀의 빛 아래 주님이 머리되시는 믿음의 관계로 서로 맺어진다고 봐야한다. 문제는 그 말씀의 빛이 단순히 교리의 경직된 적용, 기독교 전통의 형식지킴으로 치환된다면, 교회의 근본적 변화는 요원할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교회는 성도 개개인에게 성경의 내용을 스스로 잘 살펴볼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세상을 꿈꾸도록 요구하신다. 그 '어떤'이 바로 성경에 들어있다. 이것에 집중할 때 종북이나 이슬람, 동성애 이슈에 매몰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예수님의 제자된 삶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이 땅에서 끝까지 살아갈 수 있다.
무례하고 몰상식한, 사랑이 없는 교회여, 성도여, 나여.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이 참으로 요상하게 변질되었지만 스스로는 자신의 흉한 몰골을 보지 못하는 눈 멀고 헐벗은 한국 교회에 임하시기를 소망한다.
추천서적>
-설교/팀 켈러/2016.9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고든피 더글라스 스튜어트/2016.9
-일곱문장으로 읽는 구약/크리스토퍼 라이트/2020.5
-교회됨/2010.11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2018.9
스탠리 하우어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