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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실패와 불행
강가딘777
2020. 8. 2. 14:29
이스라엘의 실패와 불행
창37:18~36
1.요샙이 형들 손에 죽을뻔 하다가 노예로 팔려간 나이는? 17세
야곱의 역사는 이러하다.열일곱 살 된 소년 요셉이 아버지의 첩들인 빌하와 실바가 낳은 형들과 함께 양을 치는데, 요셉은 형들의 허물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곤 하였다.(창37:2,새번역)
2.형들이 미워한 3가지 이유는?
1) 요셉의 꿈때문에 (11곡식단,해달11별)
2) 아버지 야곱의 편애때문에 (라헬)
3) 요셉의 고자질때문에
3.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닌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14:17 (하나님의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닌,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새번역)
4.AI(인공지능) 컴퓨터가 못하고,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사람 마음을 (공감)하는 일
5.이스라엘 자손 자체는 죄에게 지는 인생이어서, 의와 소망은 그 후손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만 있다.
~성경의 인물들의 행적을 따라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삶의 연관관계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인류를 향한 구원역사에 기록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직접적인 간섭과 사람들의 일상에 대한 하나님의 방관은 굉장히 대조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이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아내를 빼앗기게 되는 사건은 현실이 얼마나 척박한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손에 대한 관점에서 아내를 지켜내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그럼에도 아내를 빼앗기기까지 무관심해 보이는 하나님이시다. 물론 사건이 발생하자 재빨리 초월적인 해결책을 보여주시긴 했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흘러내려온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속한 사람들로 이 세상에서 주어진 삶을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처럼 결코 녹록치 않은 삶의 무게감과 현실의 냉정함은 우리를 언제나 짓누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그 상황들을 각기 감당해나가야만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며 주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그리면서 분투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그 안에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와 주님의 복음의 능력이 임하고 있음을 굳건히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요구된다.
구약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하나님의 언약과 은혜와 믿음으로 살아가기라는 동일한 패턴이 반복된다. 그런 의미에서 볼때 요셉의 이야기는 조금 더 특별하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요셉이 애굽땅에 팔려갔고, 야곱가문은 가뭄을 피해 애굽땅으로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미 예고한 일이기도 하다. (창15장)
희생제물에 대한 잘못된 제사법(비둘기를 반으로 쪼개지 않음, 솔개가 날아듬, 큰 흑암과 두려움에 짓눌림)이 문제였는지 다른 심각한 이유가 있었는지는 정확치 않으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타국에서 사백년간 나그네가 되어 종살이를 하며 괴로움을 당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형제를 죽이려 모의하고 상인에게 노예로 팔아버린 이 불행한 가족사는 야곱의 험악한 인생을 대변하는 것인가? 이처럼 인간은 죄와 동행하며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라는 교훈만을 얻을 것인가?
그러나 창세기 15장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구원사의 큰 그림으로 보면, 그분의 섭리안에 미리 계획된 일로도 보인다. 요셉에게 꿈으로 계시하셨고, 어쩔수 없는 상황속에서 요셉을 이집트로 가게 하시고 평범치 않은 여러 경험들을 거쳐 이집트의 총리대신까지 이르게 하셨다. 이는 개인적인 경험으로 일상을 살아가는듯 보이지만, 긴 시야로 보면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바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배우는 것은, 우선적으로 어떤 사람의 경험을 알고 그것을 본받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행위들을 바라보면서 장구한 역사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를 펼쳐나가시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는 다음과 같다. 수많은 자손, 약속의 땅, 복의 근원으로서의 역할. 그런 방향속에서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사백년 하게 하신 이유로, 가나안땅의 아모리 족속의 죄가 아직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셨다.(창15:16)
나중에 출애굽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상징이 된다. 홍해를 건너고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광야에서 40년을 지낸후 요단강을 건너 마침내 약속의 땅을 받았다. 아브라함은 생전에 약속의 땅을 소유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졌다. 또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약속 또한 예수님을 통해 완전히 이루어졌다.
성경은 똑같은 사건을 두가지 의미로 읽혀지게한다. 각자의 일상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통해 그 은혜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현실의 무자비함이 우리를 삶의 질곡속으로 떠내려가게 할지라도 말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특별한 역사적 사건을 동반한다. 그안에 포함된 본질적 의미는 지금 개인의 작은 삶가운데 동일하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의 능력과 은혜는 삶으로 그 믿음을 드러내길 애쓰는 모든 믿는 자에게 역사한다.
한가지를 덧붙이면, 우리의 모든 삶의 행위는 개인적인 선택의 연속이지만, 그 모양안에 하나님의 약속, 주님의 복음의 말씀이 현실화되는 과정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이 활동하심을 고대하고 수용하는 것이 우리가 할 최소한의 일이다.
요셉이야기는 특별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 요셉의 삶에 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속에 포함된 하나님의 섭리의 신묘막측(신통하고 묘하여 미리 추측할 수 없음)함 때문이기도 하다.
형제가 형제를 죽이려 하고 노예로 팔아버린 야곱일가의 불행한 가족사는 십여년 동안 이어졌다. 요셉과의 재회에서 기근으로부터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섭리를 확인하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사백년 나그네살이에 대한 예언을 이루시는 일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실패와 불행은 현실에 대한 그들의 그릇된 반응(죄악으로 여겨지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읽혀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의 큰 그림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이중적 이해가 필요하다.
창37:18~36
1.요샙이 형들 손에 죽을뻔 하다가 노예로 팔려간 나이는? 17세
야곱의 역사는 이러하다.열일곱 살 된 소년 요셉이 아버지의 첩들인 빌하와 실바가 낳은 형들과 함께 양을 치는데, 요셉은 형들의 허물을 아버지에게 일러바치곤 하였다.(창37:2,새번역)
2.형들이 미워한 3가지 이유는?
1) 요셉의 꿈때문에 (11곡식단,해달11별)
2) 아버지 야곱의 편애때문에 (라헬)
3) 요셉의 고자질때문에
3.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닌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14:17 (하나님의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닌,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새번역)
4.AI(인공지능) 컴퓨터가 못하고,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사람 마음을 (공감)하는 일
5.이스라엘 자손 자체는 죄에게 지는 인생이어서, 의와 소망은 그 후손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만 있다.
~성경의 인물들의 행적을 따라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섭리와 인간의 삶의 연관관계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로서 인류를 향한 구원역사에 기록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직접적인 간섭과 사람들의 일상에 대한 하나님의 방관은 굉장히 대조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이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아내를 빼앗기게 되는 사건은 현실이 얼마나 척박한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손에 대한 관점에서 아내를 지켜내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그럼에도 아내를 빼앗기기까지 무관심해 보이는 하나님이시다. 물론 사건이 발생하자 재빨리 초월적인 해결책을 보여주시긴 했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흘러내려온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속한 사람들로 이 세상에서 주어진 삶을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처럼 결코 녹록치 않은 삶의 무게감과 현실의 냉정함은 우리를 언제나 짓누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 그 상황들을 각기 감당해나가야만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며 주님이 원하시는 세상을 그리면서 분투하는 모습이 필요하다. 그 안에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와 주님의 복음의 능력이 임하고 있음을 굳건히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요구된다.
구약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곳에서 하나님의 언약과 은혜와 믿음으로 살아가기라는 동일한 패턴이 반복된다. 그런 의미에서 볼때 요셉의 이야기는 조금 더 특별하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요셉이 애굽땅에 팔려갔고, 야곱가문은 가뭄을 피해 애굽땅으로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미 예고한 일이기도 하다. (창15장)
희생제물에 대한 잘못된 제사법(비둘기를 반으로 쪼개지 않음, 솔개가 날아듬, 큰 흑암과 두려움에 짓눌림)이 문제였는지 다른 심각한 이유가 있었는지는 정확치 않으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타국에서 사백년간 나그네가 되어 종살이를 하며 괴로움을 당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형제를 죽이려 모의하고 상인에게 노예로 팔아버린 이 불행한 가족사는 야곱의 험악한 인생을 대변하는 것인가? 이처럼 인간은 죄와 동행하며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라는 교훈만을 얻을 것인가?
그러나 창세기 15장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구원사의 큰 그림으로 보면, 그분의 섭리안에 미리 계획된 일로도 보인다. 요셉에게 꿈으로 계시하셨고, 어쩔수 없는 상황속에서 요셉을 이집트로 가게 하시고 평범치 않은 여러 경험들을 거쳐 이집트의 총리대신까지 이르게 하셨다. 이는 개인적인 경험으로 일상을 살아가는듯 보이지만, 긴 시야로 보면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바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배우는 것은, 우선적으로 어떤 사람의 경험을 알고 그것을 본받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행위들을 바라보면서 장구한 역사를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를 펼쳐나가시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는 다음과 같다. 수많은 자손, 약속의 땅, 복의 근원으로서의 역할. 그런 방향속에서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를 사백년 하게 하신 이유로, 가나안땅의 아모리 족속의 죄가 아직 많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셨다.(창15:16)
나중에 출애굽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상징이 된다. 홍해를 건너고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광야에서 40년을 지낸후 요단강을 건너 마침내 약속의 땅을 받았다. 아브라함은 생전에 약속의 땅을 소유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졌다. 또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약속 또한 예수님을 통해 완전히 이루어졌다.
성경은 똑같은 사건을 두가지 의미로 읽혀지게한다. 각자의 일상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통해 그 은혜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현실의 무자비함이 우리를 삶의 질곡속으로 떠내려가게 할지라도 말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특별한 역사적 사건을 동반한다. 그안에 포함된 본질적 의미는 지금 개인의 작은 삶가운데 동일하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의 능력과 은혜는 삶으로 그 믿음을 드러내길 애쓰는 모든 믿는 자에게 역사한다.
한가지를 덧붙이면, 우리의 모든 삶의 행위는 개인적인 선택의 연속이지만, 그 모양안에 하나님의 약속, 주님의 복음의 말씀이 현실화되는 과정이 포함된다는 것이다.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새롭게 하시는 성령님이 활동하심을 고대하고 수용하는 것이 우리가 할 최소한의 일이다.
요셉이야기는 특별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이 요셉의 삶에 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속에 포함된 하나님의 섭리의 신묘막측(신통하고 묘하여 미리 추측할 수 없음)함 때문이기도 하다.
형제가 형제를 죽이려 하고 노예로 팔아버린 야곱일가의 불행한 가족사는 십여년 동안 이어졌다. 요셉과의 재회에서 기근으로부터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에 대한 섭리를 확인하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사백년 나그네살이에 대한 예언을 이루시는 일이기도 했다.
이스라엘의 실패와 불행은 현실에 대한 그들의 그릇된 반응(죄악으로 여겨지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읽혀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의 큰 그림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이중적 이해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