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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믿음은 무엇인가2
강가딘777
2020. 5. 9. 23:25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의 비극과 그 후에 나타난 교회의 반응을 보면서 견고해 보였던 기존의 신앙관은 여지없이 박살나버렸다. 피해자들의 해아릴 수 없는 아픔을 깊이 공감하려 노력하고 약자에 대한 보호와 사회적 구조악에 대한 개혁의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를 제도권에 대한 불경한 도전과 개인의 탐욕스런 요구 정도로 인식하는 참담함에 동조해버린 교회의 주류적 분위기는 참을수 없을 만큼 어리석게 보였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복음서의 예수님의 가르침하고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맹렬히 분투하면서 간절히 은혜의 주님을 부르는 기도에는 열심을 내는 이 양면성은 어떻게 된 것일까? 이는 겉 다르고 속 다른게 아닐 것이다. 그것은 깊숙히 내재된 잘못된 신앙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점점 강하게 든다.
예수의 존재를 주와 구주로 고백하며 믿고 그분의 말씀을 따른다 늘상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분이 하신 말씀에 관심이 없거나 가볍게 여기거나 잘 모르고 있어서 결론적으로는 그분의 말씀을 안 따르고 있다.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대하며 읽기에 아주 열성을 다하지만, 실제론 그 내용이 무엇이며 그 말씀의 빛이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비추이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다. 예수님의 약속으로 임하신 성령의 도움과 동행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현실의 환경과 관계속에서 세밀한 음성을 민감하게 들으려는 노력은 거의 없어진 것 같다.
또한 기독교진리를 수호하기 위함이라는 경고문을 앞세운 이들의 종북, 이슬람, 동성애 혐오는 차별과 폭력성만을 각인시켰다. 불행하게도 이들은 교권주의를 공고히 하려는 자들이고, 이들이 특별하다고 오랬동안 잘못 교육받아온 많은 추종자들의 맹목성도 이 사태에 한몫을 했다. 그 오래된 울타리에 본의아니게 갇혀있는 많은 이들은 어떤 것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는 (사실은 진실에 도달하는) 길을 차단당했다. 이는 새로운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심을 주고 결국 진리에 도달할 수 없게 만든다.
(진리는 하나님과 그의 하신 일과 그가 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평생을 진지하게 탐구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본 뜻,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와 의지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예수님의 주와 구주되심,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우리에게 그것을 가능케 한다.)
요즘 정치권에서 공산주의식 모델이라고 폄훼받는 부동산 공유제가 있다. 사실 그 기초는 구약성경의 희년토지법에서 나오는 것임을 교회사람들은 이상하리만치 언급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제 사회적 불평등과 경제적 양극화의 큰 원인 중 하나가 부동산 투기와 그로부터 나오는 불로소득임을 경제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다 알게 되었다.
일련의 기본적인 성격적 사실에 입각해 따라가다 보면 어떤 결론에 어쩔 수 없이 도달하게 된다. 세속화에 믈든 교회는 권력과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신자유주의의 신봉자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동안 교리를 지키려 경건의 형식에 충성을 다하는 신자들을 양산했지만, 경건의 능력과 내용에는 전혀 관심없는 외식적 신자들이 되었을 뿐이다. (참고로 성수주일이나 십일조헌금, 주님을 부르는 뜨거운 찬양과 열렬한 기도가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의 능력이 아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경건의 능력이다.)
사람의 생명과 존엄성이 중심이 아닌 누가 어떤 힘을 가졌는지가 중심인 곳. 그곳에서는 하나님을 최상위 힘을 가진 존재로서 오늘도 경배드리는 것은 아닐까? 그들이 하나님의 본 뜻,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과 사람 되기에 관심이 없고 실제로는 하나님의 편에 속해 떨어지는 떡고물에만 관심있다면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마음과 뜻과 목숨과 정성을 다하여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한 네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려면 하나님의 마음과 그분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내 자신에게 하듯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공감하고 돕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세월호의 비극과 그 후에 나타난 교회의 반응을 보면서 견고해 보였던 기존의 신앙관은 여지없이 박살나버렸다. 피해자들의 해아릴 수 없는 아픔을 깊이 공감하려 노력하고 약자에 대한 보호와 사회적 구조악에 대한 개혁의 입장에서 바라보지 않고, 그들의 목소리를 제도권에 대한 불경한 도전과 개인의 탐욕스런 요구 정도로 인식하는 참담함에 동조해버린 교회의 주류적 분위기는 참을수 없을 만큼 어리석게 보였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복음서의 예수님의 가르침하고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맹렬히 분투하면서 간절히 은혜의 주님을 부르는 기도에는 열심을 내는 이 양면성은 어떻게 된 것일까? 이는 겉 다르고 속 다른게 아닐 것이다. 그것은 깊숙히 내재된 잘못된 신앙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이 점점 강하게 든다.
예수의 존재를 주와 구주로 고백하며 믿고 그분의 말씀을 따른다 늘상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 분이 하신 말씀에 관심이 없거나 가볍게 여기거나 잘 모르고 있어서 결론적으로는 그분의 말씀을 안 따르고 있다.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대하며 읽기에 아주 열성을 다하지만, 실제론 그 내용이 무엇이며 그 말씀의 빛이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비추이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다. 예수님의 약속으로 임하신 성령의 도움과 동행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현실의 환경과 관계속에서 세밀한 음성을 민감하게 들으려는 노력은 거의 없어진 것 같다.
또한 기독교진리를 수호하기 위함이라는 경고문을 앞세운 이들의 종북, 이슬람, 동성애 혐오는 차별과 폭력성만을 각인시켰다. 불행하게도 이들은 교권주의를 공고히 하려는 자들이고, 이들이 특별하다고 오랬동안 잘못 교육받아온 많은 추종자들의 맹목성도 이 사태에 한몫을 했다. 그 오래된 울타리에 본의아니게 갇혀있는 많은 이들은 어떤 것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는 (사실은 진실에 도달하는) 길을 차단당했다. 이는 새로운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심을 주고 결국 진리에 도달할 수 없게 만든다.
(진리는 하나님과 그의 하신 일과 그가 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평생을 진지하게 탐구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본 뜻,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와 의지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예수님의 주와 구주되심,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우리에게 그것을 가능케 한다.)
요즘 정치권에서 공산주의식 모델이라고 폄훼받는 부동산 공유제가 있다. 사실 그 기초는 구약성경의 희년토지법에서 나오는 것임을 교회사람들은 이상하리만치 언급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이제 사회적 불평등과 경제적 양극화의 큰 원인 중 하나가 부동산 투기와 그로부터 나오는 불로소득임을 경제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다 알게 되었다.
일련의 기본적인 성격적 사실에 입각해 따라가다 보면 어떤 결론에 어쩔 수 없이 도달하게 된다. 세속화에 믈든 교회는 권력과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신자유주의의 신봉자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동안 교리를 지키려 경건의 형식에 충성을 다하는 신자들을 양산했지만, 경건의 능력과 내용에는 전혀 관심없는 외식적 신자들이 되었을 뿐이다. (참고로 성수주일이나 십일조헌금, 주님을 부르는 뜨거운 찬양과 열렬한 기도가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의 능력이 아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경건의 능력이다.)
사람의 생명과 존엄성이 중심이 아닌 누가 어떤 힘을 가졌는지가 중심인 곳. 그곳에서는 하나님을 최상위 힘을 가진 존재로서 오늘도 경배드리는 것은 아닐까? 그들이 하나님의 본 뜻,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과 사람 되기에 관심이 없고 실제로는 하나님의 편에 속해 떨어지는 떡고물에만 관심있다면 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마음과 뜻과 목숨과 정성을 다하여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한 네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려면 하나님의 마음과 그분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내 자신에게 하듯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공감하고 돕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