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선 선하게 살지만 교회일엔 무관심한 성도보다, 세상에선 엉망으로 살아도 교회안에선 잘하는 성도가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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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선 선하게 살지만 교회일엔 무관심한 성도보다, 세상에선 엉망으로 살아도 교회안에선 잘하는 성도가 더 낫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의 상황에 따라 이 말의 의미에는 달라지겠지만, 아무래도 이 말이 강조하는 것은 사람들의 성품이나 삶의 성실성과 진실성이 어쩌냐를 따지기 이전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테두리 안에 있느냐 없느냐가, 사실은 어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선한 삶을 살지만 교회일에 신경안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겠고, 세상에서 개판(!)으로 살아도 교회에서의 행실은 칭찬받는 사람은 어쩌면 진정으로 거듭나지 못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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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교회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그리스도가 머리되시고 성도들이 각각 지체가 되는, 건물이나 장소나 조직이 아닌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
교회는 함께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예배하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배우며 주를 향한 찬양과 성도의 교제와 봉사와 섬김으로 각자 믿음의 성장과 삶의 변화를 갇도록 훈련시키는 곳입니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무장한 성도들이 각자 처해있는 세상의 자리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그리스도가 전하는 구원의 복음을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성도들을 세상으로 내보내기 위한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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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에 교회는 안주하며 머물러 있기 위한 곳이 아닙니다.
물론 교회공동체는 회복과 치유를 위한 쉼터이며, 변화와 성장을 위한 샘터이며, 섬김과 교제가 이루어지는 삶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한 몸을 이룬다는 목적 하에 은연중 교회안에 갇혀지내는 성도들을 양산해내는 것은 지양해야만 합니다. 교회안에서의 전통적인 형식에만 충실하는 것을 믿음의 좋은 열매인양 스스로 오인하게 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우리의 삶의 가치관과 양태는 세상사람과 분명 구별되어야 하지만, 우리 믿음의 성장을 통해 나타나는 성품의 성숙과 삶의 열매들은 어디에서나 똑같아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변화받는 것이지, 교회가 원하는 피상적인 모습을 교회안에서만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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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면, 세상에서 엉망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또한 교회일에 무관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아직도 그런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아마도 믿음이 온전히 장성치 못한 젖먹이 같은 사람이거나, 성도에게 꼭 있어야 할 거듭남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은 사람일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문제일 수도 있지만, 공동체적인 책임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선하나 교회에선 얼굴보기 힘들다거나 교회에서 잘하나 세상에선 엉망인 사람이 만약 교회안에 있다면, 우리는 같은 교회공동체의 지체들로서 동일한 책임감을 가지고 그 사람이 바르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길을 걷도록 주께서 붙잡아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또한 그를 위해 사랑의 권면과 성령의 지혜로 애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