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님, 능력있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매일성경 (요일1:1-3)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저는 직업이 서비스계열의 직종인지라 아무래도 고객응대와 고객만족에 대한 교육을 수시로 받고 또 실제 결과에 대한 평가를 당합니다.^^
처음엔 이렇게 인위적이고 기계적인 교육을 받는다고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마음과 몸이 따로 노는 너무 가식적인 행위가 아닌가 하는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답니다.
그냥 회사에서 직원들을 더 정당하게 대우해주고 귀하게 여겨주며 현실적인 면에서 급여인상이나 인센티브 지급, 복지혜택 등으로
그들의 마음을 즐겁고 만족케 한다면, 고객에 대한 친절이 저절로 나올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더 강했죠.
그런데 제 생각은 일견 맞는 듯하지만 한편으론 완벽한 생각일 수 없다고 요즘은 느낍니다.
그 이유는 먼저, 사람들에게 좋은 여건과 대우와 환경을 조성해주어도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품과 오래 전 형성된 좋지 않은 습관들과 기질들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
또 인격의 성숙없이 주어지는 풍요와 만족과 성취는 오히려 사람들을 게으름과 향락과 안일에 빠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누누히 경고하시고 근심하시며 애타하신 말씀이 바로 이런 결과때문이었지요.
형제님, 하나님께서 절기와 규례를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날 주일과 예배와 교회를 주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이 세상 사람들이 일정하게 정해진 틀 속에서 살지 않는다면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혼탁함 그 자체일 것입니다.
'알아서 잘 살겠지'라는 말은 지금의 인류에게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아요.
법이 없는 자유가 방임과 방종을 가져오지만 법안에서의 자율은 질서와 조화를 가져다 줍니다.
사람들 눈에는 동물들의 세계가 약육강식으로 이루어진 무법천지의 세계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선을 넘지 않고 참으로 기가막힌 균형과 조화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세계의 질서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죠.
같은 의미로, 사람들에게 삶의 규칙과 일정한 제한을 두고 살아가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정하신 질서인 것입니다.
개인의 삶을 살펴봐도, 그 삶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 몸의 건전한 습관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굉장히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됩니다.
꾸준히 운동하고 건강에 신경을 써야 몸의 건강이 유지되듯이 믿음에 있어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지요. 저절로 그렇게 되는 법은 없지요.
온전한 믿음을 찾고 유지하고 더 성숙케 되려는 생각과 의지와 태도, 그리고 몸의 노력이 더불어 가지 않는다면,
믿음은 머리속 생각의 차원에 머무르며 심각한 불균형속에서 마음의 곤고함만을 가져다 줄 겁니다.
물론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를 언제나 붙들어주시고 인도해 주시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자발적이고 강한 의지를 가지고 나아가지 않으면 거의 지금 있는 그 자리에 머물러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내적인 씨름을 했기에 그 말에 힘이 있는 것이며,
그렇게 발견한 하나님의 진리를 내 삶에서 살아내려는 싸움이 있었기에
그 작은 행동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너무 너무 중요한 것임을, 많은 것을 알아갈수록 더 강하게 와닿습니다.
저도 사는 것보다 말이 더 많은 사람이기에 여기에 대해 참 부끄럽네요. --
(마태복음에) 예수님께서 경건의 요소들인 기도, 금식, 구제에 대해 바리새인들을 강하게 질책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것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자기를 증명하려고, 자기를 알아달라고, 자기를 자랑하려고 한 행위가
결코 그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경건케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지혜의 원천이신 예수님의 이 말씀이 어쩌면 그렇게 사람들의 본질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는 것에 놀랄때가 많아요.
사회성을 가진 인간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는 기초적이며 끈질긴 욕구를 갖고 있기에,
이런 기본적인 성향의 추구가 잘못된 행위라고 정죄해서는 안되는 거지만, 예수님은 일반론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고 이해합니다.
하나님을 올바르고 깊이있게 섬기는 삶을 살면서 선도해야 할 위치에 있는 너희들이(당시 바리새인들을 포함한 종교지도자들)
개인의 욕심을 따라 세상의 명예와 대중의 인기를 추구하는 거짓된 믿음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신 것이죠.
결국 그들의 마음과 시선은 하나님께 향하지 않고 땅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종교적인 행위에 몰두했을 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로서의 참다운 거룩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되 경건의 능력은 없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아픈 자각이...)
이야기가 너무 멀리서 돌아다니고 있네요.^^
제가 직장에서 고객들에게 친절하기 위한 노력들이 너무 가식적이라는 생각은 한가지 다른 마음을 품으니 극복되었습니다.
그것은 크고 작은 불편함을 호소하고 어떤 필요들을 요구하는 그 고객의 입장에 내 자신이 처해있다 여기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내가 그 사람이 되는 공감의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내가 사용할려고 할 때 제대로 사용이 안되니 얼마나 불편할까, 얼마나 짜증나고 화가 날까'라고 생각해보면,
내가 그 고객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이 확연히 달라지게 됨을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살아가는 곳이 어디일지라도, 우리는 건강하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성경적 원리를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고상하기만 하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 것이 아니며 허상이 아닙니다.
믿음은 실제적인 것이며 생활이요, 삶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어떤' 특정한 것을 꼭 행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며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살아가는" (롬12:2) 형제님과 저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침에 묵상하는 중에 두서없이 써서 잘 정리되지도 않은 긴 글이지만, 형제님과 나누고 싶어 그냥^^ 막 보냅니다.
그럼 이따 예배때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