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편린

'주님은 나의 최고봉 ~'성령'

강가딘777 2010. 8. 27. 12:42

 

 

오스왈드 챔버스의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서 성령을 언급한 내용만 모은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성령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성령세례와 충만에 대한 상이한 주장속에서도

그의 글 속에 나오는 성령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들은 정말 성령안에 있는 사람의 능력있는 말로서,

그 글을 읽는 우리들을 성령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와 친밀한 관계속으로 이끌어 주시네요. 

 

성령은 언제나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깨닫게 하시며, 에수님은 성령과 함께 일하십니다.

예수님과 성령은 각위로 존재하시지만 서로 분리되어 느껴지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그 마음과 생각과 행동속에 온통 예수님으로 가득차게 되고

예수님으로 가득찬 사람은 인생의 여정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찾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충만한 사람, 성령으로 깨어있는 사람, 성령으로 기도하는 사람, 성령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 주님.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01월 03일) 구름과 흑암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 (시 97:2)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단순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령 셰례를 받게 되면 "구름과 흑암이 주님을 둘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가까이 대하게 되면 처음에는 마치 흑암과 같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조명을 따르는 것입니다.
만일 진부한 종교형식에서 발을 뗀 기억이 없고 형식적인 종교의 옷을 벗어버린 경험이 없다면, 또한 종교적 분위기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던 친숙함을 떨쳐버린 경험이 없다면, 우리 정말 주의 존전에 서 있었는지 확인해봐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변덕이 심하고 종교적 분위기에 익숙하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적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깨달음으로 놀라운 환희와 자유함을 맛본 후에는 그분을 깊이 알기 원하지만 정작 그때부터 깊은 흑암이 몰려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하셨습니다.
성경의 많은 말씀들이 처음에는 구름과 흑암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특별한 상황에서 그 말씀들을 다시 하실 때 갑자기 말씀들이 영이 되고 생명이 됩니다.
이것이 환상이나 꿈이 아니라 바로 말씀에 의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언제나 살아있는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01월 05일) 자신을 포기할 때 성령을 받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요13:36)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21:19) 3년 전에도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마4:19) 이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쉽게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매력이 그를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주를 따르는 데 성령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게 되었고 그의 마음은 찢겨졌습니다. 그가 성령을 받은 후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라." 이제 베드로 앞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처음 "따라오라"는 말씀은 신비한 의미가 담겨 있지 않은 단순한 외적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따라오라"는 말씀에는 자신의 자아를 죽여야 하는 내적 순교의 의미가 있습니다.(요21:18)

이 두 부르심의 사이에는 베드로가 저주 및 맹세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건(마26:69-75)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베드로는 결국 자신에 대해 포기하게 되었고 자신 안에는 의지할 것이 없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절망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로부터 능력을 받기에 합당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20:22)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 어떤 변화를 만드시든 결코 변화 자체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이 보내신 성령님만 의지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맹세와 결심은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그것들을 수행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우리 자신을 포기할 때, 우리는 성령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을 받으라." 이는 성령께서 외부에서 들어오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신 이후로 우리 인생에는 오직 한 가지 지표가 생깁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01월 20일)모든 것에 대해 항상 새롭습니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3:3)

때때로 우리는 기도 모임을 위해 마음을 새롭게 하지만 남의 신발을 닦아야 한다고 하면 결코 신이 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실수가 전혀 없으신 하나님의 사역으로써
바람처럼 신비하고 하나님 그분만큼이나 놀라운 사건입니다.
우리는 거듭남이 언제 시작되는지 알지 못하며 그것은 우리 삶 깊이 숨겨져 있습니다.
거듭난 생명은 거듭난 순간부터 언제나 영원합니다.
생각과 말, 모든 삶에서 항상 새롭고 하나님의 생명으로서 끊임없이 감격으로 가득찹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 생기가 사라진 영적 침체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음을 알려줍니다.
"나는 반드시 이것을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이 일을 이룰 수 없어."
이러한 강박관념이 들면 이는 침체의 첫 번째 표시입니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영혼은 새롭습니까?
아니면 마음이 나누어진 가운데 뭔가 해야 한다는 부담때문에 의기소침합니까?
한편 순종은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심같이 우리도 성령의 빛 가운데 머물게 합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지키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된 것 같이 저희들도 하나가 되게 하소서"(요17:2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 둘 사이에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삶을 열어놓으십시오.
주님과 다투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삶의 생기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주님이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하게 될 때 당신은 주께서 떠나시더라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거듭남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공급되는 끊임없는 은혜에 의해 우리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고
우리로 하여금 언제 어디서나 완벽한 생기를 유지하게 합니다.

 



(02월 04일)무엇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고후5:14)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사로잡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보통 자신들의 경험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사로잡고 있었던 유일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강권함을 받는 사람을 보면, 누구나 그 사람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습니다.
성령이 그 사람의 삶 가운데서 자유롭게 역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난 직후에 우리의 주된 간증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를 받고 나면 그러한 간증은 사라지고
"너희가...내증인이되리라"(행1:8)는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즉,예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을 증거하는 초보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 그분의 증인'이 됩니다.
이후 우리는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영광이든 비난이든 핍박이든 칭찬이든
예수님께 친히 발생하는 일처럼 받아들이게 됩니다.
예수님의 인격적인 능력의 영광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이런 자세를 취할 수 없습니다.
이부분이 바로 사역자들이 깨달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끝까지 깨닫지 못하는 부분이 이것입니다.
바울은 그가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혔으며 그 사랑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그의 정신이 온전하지 않다고 쑥덕거려도 그는 신경쓰지 않습니다.
오직 그가 살아가는 단 한가지 이유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자신을 완전하게 내어맡기는 것만이 우리의 삶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비결입니다.
이러한 삶은 내가 얼마나 거룩한 사람인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주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2월 8일)하나님의 관점에서의 거룩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살전 5:23)

당신이 거룩해지기를 기도할 때 성경이 말하는 거룩의 기준을 맞출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거룩'을 너무 가볍게 생각합니다. 정말로 거룩을 위해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치러야 할 대가란 이 땅에서의 관심을 지극히 줄이고 하나님을 향한 관심을 무한히 넓히는 것입니다.
즉, 거룩이란 하나님의 관점을 향한 집중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영.혼.육이 서로 연결된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목적만을 위해 사용되는 것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따로 구별하신 목적을 당신 안에 이루고자 하실 때,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또한 예수님처럼 당신도 하나님께서 당신을 거룩하게 하신 후에 하나님만을 위해 자신을 따로 구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요17:19).
많은 사람들이 거룩의 체험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거룩을 깨닫지 못했기때문입니다.
거룩이란 예수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 예수님을 다스렸던 성향이 우리를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 안에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에 호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주님, 주께서 은혜로 죄인을 구원하심같이 나를 거룩하게 하소서"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인 것처럼 우리가 주님과 하나되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에서 가장 뚜렷하고 유일한 특징은 우리를 예수그리스도와 닮게 만들면서 예수님과 관계없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신다는 점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안에서 역사하시도록 나자신을 따로 구별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03월 12일) 헌신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막10:28)

주님께서 실제로 대답하신 내용은, 제자로서의 헌신이란 주님을 위한 것이지 다른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흥정하려는 장사꾼의 심정을 가진 헌신을 언제나 조심히십시오.
"저는 죄로부터 구원받고, 거룩하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저 자신을 하나님께드립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주님과 바른 관계만 맺어지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보상심리는 기독교의 근본정신도, 참된 헌신도 아닙니다.
상업주의속에서 사는 우리는 뭔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것이 있을 때 헌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위하기보다 저 자신을 더 위합니다.
저는 자신이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주님의 전시장에 놓여져서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 하신 일들을 사람들에게 내보이고 싶습니다."
그러나 참된 헌신은 하나님만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 뭔가를 더 얻으려고 헌신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없는 헌신이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비굴한 장삿속 마음일뿐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 주님께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 등은 진정한 헌신을 할 때 고려되지 않습니다.
참된 헌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내 모든 인격속에서 최고로 사모하는 것입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예수님은 어디 계십니까?
대부분 우리는 주님보다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요, 주님. 저는 주님의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가족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주님과 더 이상 함께 갈 수는 없어요."
이때 주님은 말씀히십니다.
"그렇다면, 너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단다."
주를 향한 진정한 헌신은 언제나 인간관계보다 더 중요해야합니다.
주저하지말고 극복하십시오.
우리가 주님께 온전하게 헌신하면 그분은 우리의 헌신가운데 상처입은 주변 사람들의 아픔까지 완벽하게 책임지십니다.
주님께 헌신하다 중도에 멈추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실제로는 헌신하지 못하고 비전만 찾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00월 00일)하나님을 최고로 두십시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읗-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항을 온전히 이루어 (고후7:1)

나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정당하게 요청할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편에서만 그렇습니다.
당신이 하나님편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본다면 주님의 요구사항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를들어, 정말 우리는 우리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란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의 빛을 분명히 드러내는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성화란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안에 형성되는 것입니다.
나의 할 일은 주님을 향한 순종을 통해 자연적인 삶을 영적인 삶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소한 일까지도 간섭하시며 교훈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양심의 가책을 주실 때는 혈육과 의논하지 말고 당장 자신을 정결케 하십시오.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십시오.

나의 육신과 영혼이 모두 하나님의 속성과 완전한 조화를 이룰 때까지
영과 육의 온갖 더러운 것으로부터 자신을 깨끗케 해야 합니다.
내 영과 마음은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과 온전히 일치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지식을 내세워 불순종합니까?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던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도 내 마음속에 형성하고 있습니까?
또한 예수님께서 끊임없이 자신의 영을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신 것처럼 우리도 깨어 있는 마음을 유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영을 주의 성령과 온전히 일치시킬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면 점차적으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그분의 삶의 수준으로 끌어올리실 것입니다.
그 삶은 다른 어떤 것에도 전혀 마음을 주지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드려진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이러한 거룩을 완성시키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주의 길을 내셔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통해 점점 더 하나님을 보기 시작합니까?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고 나머지 것들은 사소하게 여기기 바랍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최고로 두십시오.

 



(03월 23일)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까?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전 3:3)

자연인은 육신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거듭날 때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께서는 우리 육체의 소욕을 대헝하시고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대항합니다.
바로 성령을 대항하는 이 세력이 육신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아니하리라"(갈5:16).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면 이 육신이 사라집니다. 당신은 사나우며 사소한 일들에 쉽게 분노합니까?
그리스도인이라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증상을 그들 속의 육신과 연결시킵니다.
성경 안에 당신을 짜증나게 만드는 진리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는 당신이 지금 육에 속한 상태임을 증거합니다.
만일 성화하는 과정에 있다면, 그러한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 성령께서 당신안에서 뭔가 잘못된 것을 발견하시면
당신에게 그 잘못을 시정하라고 부탁하는 대신 빛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하십니다.
주님이 당신의 잘못된 것을 바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떼 빛의 자녀들은 당장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듯이 서게 됩니다.
그러나 어둠의 자녀들은 변명합니다.
"오, 저는 그렇게 할 만한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요"
빛이 들어와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면 빛의 자녀답게 죄를 자백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잘못된 부분을 다루실 것입니다.
자신을 변론하려고 한다면 당신은 스스로 어둠의 자녀임을 시인하는 것이 될뿐입니다.

육신이 떠났다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결코 스스로 속지 마십시오. 육신이 떠난 가장 확실한 증거는 실제로 현실속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역사를 통해
당신의 육신이 떠났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실질적인 확인이 곧 육신이 제거된 유일한 증거입니다.
"이 일이 전에 발생했다면 분명 내 안에 짜증과 분노가 있었을텐데...."
당신은 내면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며 놀라게 될 것입니다.

 



(03월 31일)주의하는 것입니까, 위선입니까?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요일 5:16)

우리 안에서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에 대해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위선자들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죄 범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우리의 분별력을 사용해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기보다 비판하며 조롱하기 쉽습니다.
계시는 지성의 예리함보다 성령의 직접적인조명하심에 의해 임합니다.
계시의 원천되시는 성령님께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는 비판만 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잊게 될 것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님께서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짓는 자들을 위한 마음을 당신에게 주시리라."
당신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구하기 전에,
다른 사람을 비판의 입술로 바르게 세우려고 당신의 모든 시간을 사용하는 위선을 행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주신 미묘한 부담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영혼에 대해 분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가지를 보여주시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다른 영혼의 짐을 지게 하시고
그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중보기도를 하면,
주께서는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 지은 자들을 위하는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만지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기도가운데 들어올려서 중보 기도 대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주님의 영이 탄식하시는 것을 보고계십니까?
주님과 온전히 일치되어 우리의 마음이 들어올려져서 중보기도하는 그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과 일치되지 않으면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중보 기도하는 우리로 인해 크게 만족하실 수 있도록,
우리는 전심으로 중보기도하는 것을 바르게 배워야 합니다.


(04월 01일)따뜻한 마음입니까, 무관심한 마음입니까?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해 간구하심이니라 (롬 8:34,27)

중보기도자가 되어야 할 필요에 대해 이보다 더 확실하게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까?
곧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하시고, 성령께서 성도를 위해 중보 기도하십니다.
당신은 성령님께 교육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동료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드리는 관계속에서 살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가 속한 상황에서부터 중보 사역을 시작하십시오.
가정, 사업, 나라, 지금 우리와 다른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현재의 위기상황 등이 당신을 짓누르고 있습니까?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주님의 존전에서 밀어내고 그분을 경배할 시간이 없게 만듭니까?
그렇다면 잠깐 멈추고 하나님과 먼저 살아 있는 관계를 맺으십시오.
그래야만 우리가 다른사람을 위해 중보기도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되고,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기적을 행하십니다.

주의 뜻을 이루고 싶은 간절한 소망 때문에 주님보다 앞서는 것을 주의하십시오.
우리는 수천 수만의 행사 가운데 주님보다 앞섭니다.
결국 사람들과 어려운 일들에 치여 주님을 경배하지 않게 되고 중보기도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만일 여러 짐들과 압박에 눌려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게 되면 서서히 우리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강퍅해질 뿐 아니라 우리 영혼은 좌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 우리를 우리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로 인도하십니다.
이때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상태가 아니라면 우리가 그들에게 행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는 그들을 차갑게 대하는 것입니다.
한두 마디 뼈아픈 성경 구절을 던져주거나 틀에 박힌 신앙 상담을 하고 차갑게 떠납니다.
따스함이 없는그리스도인은 분명 주님께 커다란 아픔일 것입니다.
증보하시는 주님과 성령의 마음에 일치되어 있습니까?


(04월 20일)감히 걱정함으로 하나님을 모욕합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후 l:20)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능력에 대해 오판할 가능성을 경고하기 위해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마25장).
이 비유는 자연적 재능들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오순절에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사건과 관계됩니다.
우리는 영적 역량을 교육 또는 지능으로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영적 역량은 하나님의 약속(성령)에 의해 평가되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만큼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오래지 않아
우리는 하인이 주인을 비방한 것처럼 주를 비방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제가 일할 수 있는 능력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당신은 제게 너무나 많은 것을 요구하시기에 이제 이 상태로는 당신께 충성할 수 없습니다."
전능하신 성령과 관련해 절대로 "저는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결코 자연적인 능력의 한계를 끌여들여 핑계치 마십시오.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역사가 우리안에서 드러나기를 기대하십니다.

하인은 자기가 한 일을 모두 정당화시키면서 모든 면에서 주인을 정죄했습니다.
"당신의 요구는 당신이 내게 주신 것에 비해 말도 안됩니다."
당신은 주님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감히 걱정함으로 하나님을 모욕한 적은 없습니까?
걱정은 정확하게 하인이 의미한 것과 같습니다.
"저는 주께서 저를 곤경에 빠지도록 내버려두신 것을 압니다."
육신적으로 게으른 자는 언제나 "나는 좋은 기회가 한 번도 없었어"라고 불평하고,
영적으로 게으른 자는 하나님을 헐뜯습니다.
게으른 자는 언제나 자기 나름대로의 핑계가 있습니다.

영적인 일들 가운데 우리의 역량은 성령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평가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약속들을 당신에게 이루실 수 있습니까?
우리의 대답은 우리가 성령을 받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05월 06일)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함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5:1)

성령에 속한 사람은 "이것저것을 믿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 당신에게 다가서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예수님의 기준에 맞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믿으라고 강요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계시하는 주님을 믿도록 요청받습니다(요5:39-40).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출하도록 제시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양심이 자유함을 제시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한 자유함을 누린다면 다른 사람들도 같은 자유함을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 자유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통치를 깨달음으로 인한 자유함입니다.

언제나 당신의 삶을 예수님의 기준에 의해서만 평가히십시오.
오직 예수님의 멍에만 메십시오.
예수그리스도의 멍에가 아닌 다른 멍에를 다른 사람의 목에 메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우리의 관점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이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하는 습성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끄집어내시는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이러한 자세는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유일한 자유함은 우리 양심 가운데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자유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옳은 것을 행하도록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오래 참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을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언제나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인내와 온유로 당신을 대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를 조금이라도 희석시키지 마십시오.
진리는 진리로 서게 하고 절대로 진리를 위해 변론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하셨지
"사람들로 네 사상과 의견에 따르도록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5월 23일) '염려'라는불신앙

목숨을 위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해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마6:2s)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진 일반적인 염려를 불신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으면 성령께서 물으실 것입니다.
"자, 이관계속에서, 이 휴가계획에, 이 새로운 책들에, 하나님은 어디 계시지?"
성령은 우리가 주님을 첫째로 고려할 때까지 이 점을 항상 강조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이 아닌 다른 것을 먼저 고려할 때마다 혼돈이 있게 됩니다.

"염려하지말라." 장래에 대해 염려하지 마십시오. 염려는 옳지 않을 뿐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염려란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실제적인 부분을 돌보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불신 외에는 우리를 염려하도록 만드는 것이 없습니다.
당신은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넣어주신 말씀을 질식시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주님의 경고에 주목한 적이 있습니까?
마귀입니까? 아닙니다. 이 세상의 염려입니다. 사소한 염려가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심겨진 말씀을 질식시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눈으로 보지 않으면 믿을수없어!" 이것이 바로 불신앙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이러한 불신앙에 대한 유일한 치료는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위대하신 말씀은 "다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05월 27일) 성령 세례

너희는 위로부더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눅24:49)

제자들은 오순절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자신들의 준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역사적으로 영광을 받으실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주께서 영광을 받으시자마자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행2:33).
따라서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7:39)는 내용은 지금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이미 주어졌으며 주님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기다림이란 성령을 보내시는 하나님의 역사적 경륜에 대한 것이아니라
우리 자신의 성령 세례를 위한 것입니다.

성령의 영향과 능력은 오순절 이전에도 이미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 자신은 이 세상에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셔서 영광을 받으신 직후에 성령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계속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이 지금 여기에 계시다는 계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령을 영접하는 것은 신자들의 한결같은 자세여야 합니다.
성령을 영접할때, 우리는 승천하신 주님으로부터 살리는 영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성령의 세례가 아니라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이 성령을 통해 그 사람의 삶 가운데 임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성경을 거슬러 성령세례와 그리스도를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령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올 수 있는 경험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증거입니다.

성령 세례는 당신으로 하여금 미래 또는 영원을 생각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놀랍고 영광스러운 '현재'를 위한 것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그 분을 지금 알기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영원토록 멈추지 마십시오.


(05월 29일) 방해 받지 않는 관계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요l6:26-27)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곧 주님의 속성에 따라 구하라는 것이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무슨 마술처럼 사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그날에 "너희는 나와 친밀해져서 나와 하나가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날'이란 미래의 어느 날이 아니고 지금  현재를 의미합니다.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는 말씀도 주님과 우리의 연합이 아니라
완전하고 완벽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이 의미는 우리 인생에 외부적 곤경이 없을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이 아버지의 마음과 생각을 알았던 것같이,
주님께서 성령 세례를 통해 우리를 하늘로 올리셔서 하나님의 계획들을 우리에게 보이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요16:23).
'그날'은 하나님과 성도들의 관계에서 아무 방해되는 것이 없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흠 없이 서 계셨던 것처럼,
우리도 성령 세례의 강한 능력에 의해 그와 같은 관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22)

"주께서 당신께 주시리라."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인정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의 능력에 의해, 또한 이 땅에 보내신 성령에 의해,
우리는 아버지와 그러한 관계로 들려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하나님의 완벽하신 주권적인 뜻에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높여진 그러한 놀라운 위치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주님의 속성에 따라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권자가 되셨음을 친히 증거하는 것입니다.

 



(06월 01일) 하나님을 믿기보다 하나님을 위해 일합니까?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겔 37:3)

어떻게 죄인이 성도로 변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망가진 인생이 바로 설 수 있습니까?
대답은 단 한가지입니다. "오주님, 저는 모르지만 주께서 아십니다."
절대로 종교적인 상식을 가지고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오 그렇지요. 좀 더 많은 성경읽기와 묵상 및 기도시간을 통해 가능하다고봅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보다 뭔가를 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우리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바쁜 행사를 보면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님과 '함께'하는 사역자가 너무나 적고
주님을 '위해' 일하는 사역자가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보다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할 수 있다고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망각하는 만큼 우리는 사람들에게 실망합니다.
정말로 너무나 크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경험해서 나 자신이 변했다면
어떻게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실망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당신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루신 하나님의 위대한 영적인 일들을 경험했습니까?
사람들로 인해 얼마나 실망하느냐 하는 것은 개인적인 영적 체험의 부족과 비례합니다.

"나의 백성들아 내가 너희의 무덤을 열 것이라"(겔37:13).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속성이 어떠한 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기를 원하실 때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당신의 모습이 어떠했을지를 성령이 보여주신다면
(실제로 하나남께서는 성령이 역사하실 때 그렇게 하십니다)
당신은 그 어떤 범죄자라 할지라도
당신이 타락할 수 있는 타락의 절반도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무덤'이 하나님에 의해 열리면 우리는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압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을 때 사람의 속성이 얼마나 악한 지를 끊임없이 계시하십니다.

 



(06월 03일) 주님과의 친밀함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시25:14)

무엇이 진정한 친구라는 표시입니까? 가장 비밀스러운 기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에게 자신들의 비밀스러운 슬픔을 고백할지 모르나
진정한 친밀함은 자신의 가장 비밀스러운 기쁨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주님의 기쁨을 당신에게 말씀하시도록 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쉬지 않고 주님께 자신의 비밀만을 말하느라고 주님께서 당신에게 말씀하실 기회를 드리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는 초기에는 우리는 하나님께 부탁만 합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사귐을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한 주님의 목적을 향해 우리를 이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의 본질에 붙들려 있습니까?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마6:10).
이 정신에 붙들릴 때 하나님의 비밀을 붙잡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베푸신 많은 위대한 축복들뿐 아니라 작은 사건들속에서 그 분과의 친밀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 개인의 아주 사소한 일들까지 관심을 가지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주님과 더 깊은 친밀감을 느끼게 됩니다.

"주께서 정하신 길로 나를 가르치소서"(시25:12).
처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의식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속되면 하나님을 풍성하게 의식하면서 우리는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가 없게 됩니다.
다른 뜻을 선택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고 정결해진 후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상적인 선택 속에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것을 선택하려 할 경우는 주님께서 막으실 것입니다.
이때 주의하십시오.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의심이 생긴다면 당장 그 결정을 멈추십시오.
"왜 안 되는 거지?"라고 하며 절대로 자신을 합리화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택을 지도하실 것이며,
우리의 상식마저 인도하셔서 우리로 더 이상 다음 질문을 되풀이하면서 성령을 거스르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 정말로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까?"

 




(06월 14일) 지금 주님 안에 거히십시오!

내 안에 거하라 (요15:4)

예수님의 영은 속죄에 의해 내 안에 들어와 계십니다.
그렇다면 나는 주님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생각을 갖기 위해 인내를 갖고 훈련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절로 내가 예수님처럼 생각하도록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그렇게 해야합니다. 즉, 나의 모든 생각을 주님께 복종하도록 해야합니다.
"내 안에 거하라" 지적인 문제, 돈 문제 등 그것이 무엇이든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일시적이거나 잠깐 인위적으로 사는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방해된다는 이유로 하나님마저도 나의 상황가운데 역사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주제넘은 행동입니다.
당신의 상황이 어떠하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회 못지 않게 다른 상황에서도 예수님안에 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스로 나의 상황을 바꾸거나 조작해서는 안됩니다.
주님과 함께 한다면 나의 내면 세계는 상황에 의해 더렵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몸이 어디에 있든 하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상황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디서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온유한 자세를 취하셨습니다.
주님의 삶 속에 나타난 그 놀라운 여유를 생각해십시오.
우리는 감정적 흥분을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려고 하지만,
거기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안에 감추어진 생명의 평강이 없습니다.

당신으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가 생각해보십시오.
"네, 주님. 잠깐만요. 지금은 이것을 해야 하거든요. 네, 이것을 마치면 주님안에 거하겠습니다.
이주가 지나면, 모든 것이 잘되면, 그러면 거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당장 나아가십시오. 지금 거하십시오. 처음에는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삶의 습관이 되어 무의식 중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주님 안에 거하기로 결단하십시오.

 



(06월 17일) 비판하지 않는기질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마7:1)

예수님께서는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혹독할 정도로 비판적입니다.
비판은 인간의 정상적인 기능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영적세계에서는 그 어느 것도 비판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비판의 결과는 비판받는 자의 여러 능력들을 분산시킵니다.
성령님만이 비판할 수 있는 온전한 위치에 계시는 유일한 분입니다.
그 분만이 상처나 억울함 없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보이실 수 있습니다.
남을 비판하려는 분위기에서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비판하려는 감정으로 인해 당신의 마음은 강퍅해지고 원한을 품게 되며 잔인하게 됩니다.
나아가 당신 자신에게 아첨하며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횔씬 낫다는 우월감에 빠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비판하지 않는 기질을 개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마음을 꿰뚫으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우리는 피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만일 내가 당신의 눈에서 티를 본다면 이는 내 안에 들보가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보는 모든 잘못된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내안에서 찾아내십니다.
내가 비판할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정죄하는 것입니다(롬2:17-20).
다른 사람을 향해 비판하려는 잣대를 버리십시오.
언제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요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은 우리 안의 영적 대청소입니다.
청소 후에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 교만이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나 자신이 얼마나 부패한 존재가 되었을까'를 깨달은 후,
나는 나를 실망시키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07월 11일) 영적인 성도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3:10)

성도의 삶의 동기는 자신의 뜻을 구현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성령이 충만한 성도는 우연한 상황을 믿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종교적인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으로 나누지도 않습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 던져진다고 할지라도 그 상황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게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내려놓습니다.
성령의 뜻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삶의 영역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나지 않으면,
성령님은 계속 우리가 그리스도를 드러낼 수 있도록 같은 상황으로 이끄십니다.
영적인 성도는 자신의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지만,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자들은 자신이 이룬 일을 영화롭게 합니다.

반면에 성도는 그의 모든 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합니다.
먹든 마시든 제자들의 발을 씻든 무엇을 하든,
우리는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실현하려는 동기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분야는 예수님의 생애에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가장 천한 일에서까지 아버지와의 관계를 나타내 실현하셨습니다.
"예수는 ...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
수건을 가져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요13:3-5)
영적인 성도의 목적은 그분을 알려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그 곳에서 주님을 알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믿음의 길에서 실패하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이 땅에 나를 실현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섬길 때에도 종종 그 섬기는 동기가,
뭔가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그것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는 결단코 영적인 성도의 자세가 아니며,
우리의 목적은 언제나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실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07월 20일) 주님 앞에서 걷는 삶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사40:31)

걷는 데에는 스릴이 없습니다. 걷는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건강하고 안정한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는 가장 높은 차원에서 힘을 소유한 것입니다.
"걷는다"는 단어는 성경에서 인격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36).
성경에는 추상적인 것이 절대로 없습니다. 언제나 선명한 실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되라고 하지 않고 내앞에서 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을 때 스릴을 원하게 됩니다.
이러한 스릴을 향한 소원은 육체적으로 성령을 흉내내려할 것입니다.
스릴을 향한 소원은 감정적인 영역에서는 부적절한 애정으로 나아가게 하여 도덕적으로 파멸하게 할 것입니다.
만일 영적인 영역에서도 계속 스릴을 원하여 날개 위에만 오르려고 하면 결국 믿음을 잃고 영적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실체는 어떤 장소에 따른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 앞에 주님을 모시겠다는 결단에 따릅니다.
문제는 우리가 주의 임재의 실체 위에 우리의 삶을 세우기를 거절한다는 점입니다.
시편 기자의 "그러므로 ...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46:1-2)라는 체험 고백은 우리가 주님의 실체에서 있을 때 가능합니다.
실체에 서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를 감상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의 실체를 믿음으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실제로 언제나 그 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필요한 것은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오 주님, 저를 이렇게 저렇게 인도하소서"라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주님은 인도하실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상식적인 결정이 주님의 뜻에 어긋난다면 주님은 가책하시고 막으실 것입니다.
그러한 때 우리는 잠잠히 주님의 임재를 바라는 가운데 그분의 인도하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07월 25일)성령의 폭발적 능력

... 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5:3-10)

우리가 처음에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 너무나 간단하고 평범하여 자연스럽게 우리의 무의식적인 마음속으로 가라앉습니다.
예를들어, 산상수훈은 고상한 사람들에게나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아주 부드럽고 아름다운 금언으로 들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거친 일상생활에서는 전혀 실용성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은 성령의 폭발적 능력을 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터질만한 상황이 되면 산상수훈의 교훈들은 엄청난 폭발력을 발휘합니다.
성령께서 이 산상수훈의 교훈 중 하나를 기억나게 하시면 우리는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가!"라고 감탄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우리의 환경에서 발생하게 될 놀라운 영적 변혁을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께서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산상수훈의 내용을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면 굳이 우리가 거듭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산상수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어린아이들의 장난입니다.
성령께서 주의 말씀을 우리의 상황에 적용하시는 것처럼, 성령에 의해 주의 말씀을 해석하는 것은 성도들이 해야 할 엄중한 작업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과 전혀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가르침은 처음부터 놀라울 정도로 불편합니다.
성령께서 주님의 교훈들을 우리 상황에 적용하실 때 우리도 서서히 예수님의 교훈에 합당한 마음과 언행을 형성해가야 합니다.
산상수훈은 규범이나 율례가 아닙니다.
성령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실 때 삶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진술한 것입니다.

 



(07월 26일) 청결한 삶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 (마15:19)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신뢰하면서 이를 '순진'이라고 부르고 순진을 신뢰하면서 이를 '청결'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혹톡한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움츠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속에서 그렇게 끔찍한 것들 중 하나라도 느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러내시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갖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마음에 대해 최고의 권위자이신지 아니면
그분의 말씀에 조금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인물이든지, 둘 중 하나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주님의 꿰뚫는 말씀을 신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순진한 무지를 더 신뢰하겠습니까?
만일 내가 자신이 순진하다는 의식을 시험대에 올려놓는다면
나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닫고 떨게 될 것입니다.
내 안에 악과 허물의 가능성을 보며 놀라게 됩니다.
내가 순진이라는 피난처 아래에 머무는 동안 나는 어리석은 자의 낙원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악당이라는 사실을 체험해보지 못했다면, 이는 겁 많은 소심함과 문명 생활의 보호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듯이 서게 될 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들을 향한 진단이 옳다는 시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를 보호해주는 유일한 안전책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입니다.
만일 나 자신을 주님께 맡기면 마음속에 있는 끔찍한 죄악의 가능성을 경험할 필요가 없습니다.
청결은 인간적으로 이루기에는 너무나 깊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면 그분은
개인의 삶의 중심부에 예수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서 드러나셨던 그 영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곧 성령만이 더러움이 전혀 없으신 완전한 청결이십니다.

 



(07월 29일) 구름속에서 무엇을 봅니까?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계l:7)

성경에서 구름은 언제나 하나님과 관련됩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통치에 반항하는듯한 우리 개인생활의 안팎에서 일어나는 슬픔, 고통, 궁핍의상황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이 구름들을 통해 우리에게 어떻게 믿음으로 걸을 수 있는가를 가르치십니다.
만일 구름이 없다면 우리에게 믿음도 없을 것입니다.
"구름은 단지 우리 하늘 아버지의 발의 티끌이로다"(나1:3).
구름은 주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증표입니다.
슬픔과 사별과 고통이 하나님과 함께 오는 구름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귀한 계시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구름없이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수 없습니다.
그 분은 청명하게 비치는 가운데 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속에서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치기를 원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구름을 통해 우리가 배웠던 것을 '버리기'를 원하십니다.
구름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정확하게 어린아이처럼 될 때까지
우리의 믿음을 단순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직 중심은 하나님과 나만의 관계요, 다른 사람들은 그림자일 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림자가 될 때까지는 구름과 어둠은 언제나 나에게 임할 것이며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과연 나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점점 더 단순해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섭리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에 비추어 인생의 신비들을 해석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가장 어둡고 암담한 현실을 직접 대하면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 때까지는,
아직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눅9:34).
당신의 구름속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보입니까?
그렇다면 더 어두워질 것입니다.
당신은 "오직 예수님외에는 다른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야만 합니다.

 



(08월 13일) 성령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살전 5:19)

성령의 음성은 미풍처럼 부드러워서 하나님과 완전한 교통 가운데 살지 않으면 결코 그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가책은 가장 부드럽게 오기 때문에 그분의 음성을 감지할 만큼 예민하지 않으면,
당신은 성령을 소멸할 것이고 영적 생활에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성령의 가책은 언제나 잔잔하고 조용한 음성으로 오는 작은소리이기에, 오직 깨어 있는성도들만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간증을 할 때 "구원받은 지가 정말로 꽤 오래되었구나"라고 말하며 과거를 되돌아보아야 한다면 주의하십시오.
당신이 빛가운데 걸으면 과거를 되돌아 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현재 하나님과 나누는 놀라운 교제속으로 묻혀버렸기 때문입니다.
빛에서 벗어나면 당신은 감상적인 그리스도인 되어 과거의 추억속에 살게 됩니다.
따라서 당신의 간증은 딱딱한 금속음을 내게 됩니다.
과거에 빛 가운데 걸었을 때의 경험만을 그리워하면서 현재 빛 가운데 걷는 것을 거절하려는 경향을 주의하십시오.
성렬께서 뭔가 가책하시면 당장 멈추어 서서 그것을 바르게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령을 거스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기상황으로 몰고 가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이 그 위기를 거의 지나갔지만 완전히 끝내지 않을 경우, 하나님께서는 그 위기를 다시 조성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처럼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덜 의식하게 될 것이고 이때도 순종하지 않을 경우 더 큰 부끄러음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계속 성령을 거스르면 위기는 더 이상 반복되지 않는 시간이 올 것이고, 이때가 되면 당신은 성령님을 소멸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위기를 통과하면 당신의 마음과 입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흘러넘칠 것입니다.
하나님을 항상 가슴 아프게 하는 것들에 대해 어떠한 연민도 갖지 미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사라져야하는 것들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를 아프게 하셔야만 합니다.

 



(08월 14일)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12:5)

성령을 소멸시키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주님의 징계를 무시하거나 주님께 꾸지람을 들을 때 낙심해버리면 됩니다.
우리가 얕은 차원의 성화의 경험만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림자를 실체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견책하기시작하실 때 우리는 "아, 이건 마귀의 일임에 틀림없어"라고 말합니다.

결코 성령을 소멸하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 그분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이 부분에 눈을 감지 말라. 네 생각에 네가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있구나.
지금까지 너에게 그것을 보여줄 수 없었지만 이제보여준다."
주께서 이와 같이 징계하실 때 그분의 방법으로 하시도록 순응하십시오.
그분으로 당신을 하나님께 올바르게 서도록 하십시오.

"꾸지람을 받을 때 낙심하지 말라."
우리는 하나님께 볼멘소리를 내며 말합니다.
"오,이런.어쩔 수 없었답니다.저도 기도했는데 잘안 되었습니다. 이제 포기하렵니다."
만일 만사를 이런 식으로 말해버린다면 어떻게 될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분의 능력으로 나를 사로잡으셔서 주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일을 내안에서 하시도록,
나 자신을 주께 맡길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성화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뭔가 해주시기를 원하는 '내 나름대로의 생각'이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친히 나를 위해 무엇을 하실까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주님은 내가 어떠한 희생을 치르는한이 있더라도 나 자신의 온전한 성화를 위해
주께서 역사하기를 바라는 그러한 마음과 영혼의 자세를 취하는 자리까지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08월 15일) 거듭남의 증표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요 3:7)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그가 죽을 수 있을 만큼 나이가 찼을 때 
그의 낡은 주장에 죽고, 자신의 덕, 종교, 모든 것에 죽을 수 있을때, 그래서 전에는 없었던 생명을 자신안으로 영접할 수 있을 때입니다.
새 생명은 의식적인 회개와 무의식적인 거룩함으로 드러납니다.
"영접하는자"(요1:12). 예수님에 대한 나의 지식은 내적인 영적 인식에 의한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에게 들어서 배운 것일 뿐입니까?
내 삶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개인적 구세주로 연결시키는 어떠한 것이 있습니까?
모든 영적 역사는 그 밑바탕에 주 예수님을 체험한 인격적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본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하나님 나라의 표적들을 구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통치를 인식합니까?
새생명은 하나님의 통치를 분별하는 새로운 능력을 줍니다.
그분의 다스림은 그분의 본성에 따라 언제나 진행되어 왔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분의 본성을 받았으며 그분의 통치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요일3:9).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합니까? 아니면 좌를 멈추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났다는 것은 죄를 멈출 수 있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절대로 "그리스도인은 죄를 질 수밖에 없는가?"라고 묻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안의 새 생명의 효과적인 역사는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능력만 있는것이 아니라 죄짓기를 멈춘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9절의 의미는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따라 순종하면 우리는 죄를 지을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08월 22일) '나는...그러나 그는"

나는 너희로 회개하기 위해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마3:11)

"나는 그러나 그는"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까?
이 순간이 올 때까지는 나는 성령 세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코 알지 못합니다.
정말로 나의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나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바로 거기서 일하기 시작하십니다.
주님은 다른 어떤 사람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하십니다.
나는 그분의 오심에 대해 준비되어 있습니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주님 오시는 그 길을 막는 한, 예수님은 오실 수 없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나는 주님께서 내가 잘못한 모든 것들을 빛으로 끄집어내실 것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주님이 오시는 곳이 바로 그 곳입니다.
내가 깨끗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곳마다 주님은 찾아오셔서 일하십니다.
내가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주님께서는그분의 발을 거두십니다.

회개란 죄에 대한 감가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철저한 무가치함을 느끼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회개할 때 내게는 철저하게 아무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나는 주님의 신발을 들기에도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이와 같은 회개를 했습니까? 아니면 나를 변호할 생각들이 아직 마음에 남아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의 삶 속에 들어오실 수 없는 이유는 내가 온전한 회개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요한은 성령 세례를 하나의 경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너희를 세례할 것이요."
성령 세례를 받은 자의 유일한 의식적 경험은 자신의 절대적인 무가치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진실로 별 것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당신이 끝나는 곳. 그러나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행하시는 곳으로 나아가십시오.

 



(9월 14일) 내 논리입니까, 성령의 감동입니까?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항 (고후 11:3)

진실함은 사물을 분명하게 보는 비결입니다.
성도는 한동안 어떤 상황을 전부 이해할 수 없어도 곧 아무 어려움 없이 분명히 보게 됩니다.
당신은 영적 혼돈을 논리적으로 명료하게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 혼돈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더욱 분명하게 순종할 수 있습니다.
지적인 문제라면 논리적으로 생각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는 아무리 생각을 한다고 해도 더 혼란에 빠질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강권하시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순종하고
그 상황과 관련한 당신의 모든 상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대낮처럼 분명하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후에 논리적인 이해도 따라오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논리적인 이해의 차원에서 상황을 보려고 하지 않고 오직 어린아이같이 보려고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세상적 지혜를 구할 때 실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마11:25)

우리의 삶 가운데서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성령의 인도하심에서 벗어난 것을 허락할 경우
그것은 영적 혼돈을 일으키는 데 충분한 원인이 됩니다.
그리고 영적 혼돈은 우리가 시간을 이무리 들여서 논리적으로 생각한다고 해도 결코 명료해지지 않습니다.
영적 혼란은 오직 순종에 의해서만 해결됩니다. 순종하는 순간 우리는 분별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가 영적 혼돈에 빠지게 된 이유가 우리 마음의 어떤 기질 때문임을 알게 되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상황파악을 잘하는 자연적인 능력을 성령님께 드릴 때,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능력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삶은 항상 진실함가운데 머물게 될 것입니다.

 



(9월 26일) 성령의 예리함에 따라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마 5:23)

당신이 제단에 나아갔을 때 당신의 형제가 당신에게 원망할 일이 생각난다면 그것은 병적으로 예민한 탓이 아닙니다.
성령에 의해 당신의 의식 속에 "먼저 가서 형제와 회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는 말씀을 떠올린 것입니다.
성령께서 아주 사소한 일까지 교훈하실 때 성령의 예리한 감수성을 거스르지 마십시오.

주님의 지시는 간단합니다. "먼저 형제와 화목하라"(마5:24)
온 길로 되돌아 가서 주님이 당신에게 지시하셨던 확신에 따라 행하십시오.
당신에게 원망할 것이 있는 그 사람에게 가서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화해할 수 있는 마음과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가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권리에 대해 물어서는 안됩니다.
성도의 표시는 그의 권리를 포기하고 주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4).
화목을 향한 과정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먼저 영웅적인 자기 희생이 있고, 그 다음에 갑자기 성령의 예민함에 의해 마음이 찔리고, 확신의 지점에서 멈추게 됩니다.
그 후 당신이 잘못을 범한 사람에게 찾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무랄 데 없는 마음과 자세로 대하게 됩니다.
그 후 아무 거리낌없이 참으로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당신의 예물을 하나님께 바치게 되는 것입니다.

 



(10월 06일) 거룩한 유전 형질

그를 내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갈1:16)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거듭나게 하시기 위해 해결하셔야 하는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께서는 내가 더 이상 "나는 거룩하지 않고 거룩해질 가능성도 없다"고 말할 수 없는 유전형질을 내게 주십니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거룩해야 한다는 말씀뿐이셨다면 주님의 가르침은 절망외에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을 중생하게하시는 분으로서 내 안에 주님의 거룩한 유전형질을 넣으실 수 있는 분이라면,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해져야 한다고 요구하시는 의미를 알기시작합니다.
구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 안에 있었던 유전적인 성향을 우리에게 넣어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주께서 주신 모든 기준은 우리 안에 넣으신 성향을 전제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 입장에서 결정해야 할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 하나님께서 내리신 나의 죄에 대한 판결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어떤 사람이 영적으로 절박해질 때
하나님께서 성령을 그의 영에 넣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의 개인적인 영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에 의해 힘을 얻게 되면서
그 사람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갈4:19) 됩니다.
구속의 영적인 기적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 새로운 성향을 넣으실 수 있다는 것이요
나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절박하게 되어 나 자신의 한계를 알게 될 때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절박한 그곳까지 가야합니다.
내가 그 필요를 의식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그 성향 곧 책임있게 순종하는 존재를 내 안에 넣으실 수 없습니다.

한 사람에 의해 죄의 성향이 전 인류에게 들어온 것같이, 다른 '사람'에 의해 성령께서 전 인류에 들어오셨습니다.
구속은 죄의 유전으로부터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흠 없는 유전 곧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월 15일) 선교메시지의 핵심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oj라 (요일2:2)

선교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 속죄입니다.
그리스도의 사역 중 아무 부분이나 취해보십시오.
예를들어, 치유사역, 구원 및 성화의 사역 등이 있지만 이러한 사역들은 유한합니다.
그러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의 속죄의 사역은 무한합니다.
선교의 주요 메시지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중요한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선교사는 이 계시에 사로잡힌 사람이어야 합니다.

선교 메시지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친절함이나 선하심도 아니며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심을 드러내주신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우리 죄를 사해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무한한 의미를 가진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선교사의 메시지가 곧 애국적인 것은 아니기에 그것은 특정 국가나 개인을 옹호하지 않으며 온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성령은 나의 편견을 옹호해주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단지 나를 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십니다.

선교사는 자신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위대한 사명에 결속된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견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어린 양'을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를 나누는 소그룹에 속하기가 쉽습니다.
신령한치유, 특별한 성결의 비결, 성령의 세례 등의 신봉자가 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하신 일을 선포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지로다"라고 말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16)라고 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곧 복음입니다.

 



(10월 18일) 내가 사랑하고 헌신할 분, 예수님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해 나가서 (요삼1:7)

주님께서는 주를 향한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다른 사람에 대한 주님의 관심에 당신을 맞추어야지, 다른 사람에 대한 당신의 관심에 주님을 맞추면 안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8절은 사랑의 속성을 알려줍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실질적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랑은 감상적 허상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은 내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으신 성령으로 인해 구속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내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나를 통해 효과적으로 역사합니다.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이러한 성령의 사랑의 사역이 믿어지지 않아 이를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아침안개같은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내 안에서는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나는 주님께 계속 충성하게 됩니다.

선교헌신의 핵심은 이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주님께만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내 마음을 붙드시고 일상적인 일들 가운데 놀랍도록 부지런히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때 내 마음은 주님의 마음과 연결되어 언제나 그 분만 향해 있기에 다른 것에 구속되지 않습니다.
외부적으로만 세상을 멀리하려는 것은 오히려 세상의 뭔가를 향한 비밀스러운 애착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선교사의 충성은 그의 마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집중적으로 열려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보내시는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성령의 은사에 의해 주님께 온전히 헌신된 사람들입니다.

 



(10월 21일)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너회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유1:20)

주님께는 충동적인 면이나 차가운 면이 없었습니다.
결코 당황하지 않으시는 침착한 힘이 있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고 우리의 기질에 따라 신앙을 개발해 나갑니다.
충동적인 행동은 거듭나지 않은 본성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의 삶의 발전을 빙해한다는 이유로 항상 충동적인 행동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이 충동을 어떻게 저지하시는지 주의하십시오.
성령의 저지는 곧바로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을 느끼게 하며, 그러면 우리는 즉시 자신을 변호하려고 합니다.
충동적인 행동은 어린아이라면 이해가 가지만, 성장한 어른에게는 재난을 가져옵니다.
충동적인 사람은 언제나 버릇이 없으며, 연단을 통해 지각을 갖도록 훈련되어야 합니다.


제자훈련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물 위를 걷는 것은 충동적인 담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마른 땅을 걷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향해 걸어가기 위해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땅에서는 멀리 떨어진 채 주님을 따랐습니다.
위기를 견뎌내는데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인간본성과 자긍심만으로도 충분히 견뎌낼 수 있기에 자랑스럽게 위기를 직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매일 24시간을 성도로 살아가는 데에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단조롭고 평범한 삶을 사는 데에도 은혜가 필요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시받는 존재지만 계속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데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위해 아주 예외적인 일들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깊게 뿌리 박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평범한 일들 속에서 예외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곧 시장거리에서 거룩해야하고 일반적인 사람들 가운데서 거룩해야 합니다.
이는 5분내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10월 22일) 성령의 증거하심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롬 8:16).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흥정하려는 마음을 가지려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키시는 일을 수행하기 전에 증거를 원합니다.
"왜 하나님은 자신을 보여주지 않으실까?"
주님은 그렇게 하실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당신이 완전히 주께 내려놓지않는 한, 당신 자신이 주님의 증거를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다내려놓으면 하나님은 자기를 증거히십니다.
주님은 당장이라도 당신 안에 있는 그분의 속성을 증거하십니다.
만일 당신이 실체가 아닌 다른 증거를 가지고 있다면 감상적 감정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구속에 근거해 당신을 내려놓고 주제넘게 따지지않는 즉시 하나님께서는 증거를 주십시다.
당신이 논리와 주장을 내려놓자마자 하나님께서는 주께서 이루신 일들을 증거하십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을 기다리시게 했던 우리 자신의 무례함에 놀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죄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는지 알고 싶으면
주께서 구원하시도록 맡기든지 아니면 주께서는 나를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하십시오.
이사람 저사람의 말을 인용하지 말고, 마태복음 11장 28절을 시도해 보십시오. "내게로 오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면 주께로 오십시오. 만일 당신이 악하다는 시실을 안다면 기도하십시오

성령은 주님의 구속을 증거하십니다. 성령은 다른 그 어떤 것도 증거하지 않으십니다.
그는 우리의 논리를 증거해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연스러운 상식적 결정을 내린 후에 성령의 증거라고 오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자신의 속성 및 구속의 사역을 증거하실 뿐, 절대로 우리의 이성을 증거해주지않으십니다.
만일 성령으로 우리의 이성을 증거하게 하려고 시도할 경우 당연히 어둠과 혼돈가운데 빠지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어리석음을 내버리고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주께서 성령의 증거를 주실 것입니다.


(10월 23일) 편견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l7)

주님은 절대로 우리의 편견을 장려하지 않고 오히려 대적하여 제거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특이한 편견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대하듯이 자신을 다루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엄하게 다른 사람들을 대하셔야 하지. 그러나 물론 주님께서는 나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아실거야."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편견이 주님께 "조금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편견을 지지하는 대신에 오히려 의도적으로 제거해 나가십니다.
우리의 편견을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맡기고 주께서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보는 것은 귀한 영적 훈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 앞에 어떤 편견을 가져오든 별로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단 한가지는, 우리의 무조건적인 항복입니다.

우리가 거듭나면 성령님은 우리 안에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십니다.
이전 옛 모습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는 때가 올 것입니다.
과거의 의식들도 사라지고 사물에 대한 과거의 태도도 사라집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면 욕심도 없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도 않으며 사람들이 주는 상처에 무감각할 수 있는 그러한 생명을 어떻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언제나 온유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그러한 생명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습니까?
오직 한 가지 방법은 옛 사람이 사는 것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단순하고 완전한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보다는 오직 하나님 그분만을 원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다 거두어 가신다고 할지라도 주를 향한 당신의 믿음이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믿는다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에 대해 염려하며 골치릍 썩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이 볼 수 없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우리는 현실적으로 신뢰하기 때무입니다.


(11월 07일) 성령 대신에 나서지 마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링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성도의 삶에 발생하는 상황들은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 우연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은 섭리 가운데 당신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그러한 상황으로 인도하십니다.
오직 성령님만이 그 상황을 이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특정한 장소와 사람들과 환경 속으로 인도하시는 이유는,
당신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중보 기도하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절대로 그 상황을 당신의 손으로 막으면서
"이 상황을 내 힘으로 해결해야겠다. 이 상황을 지켜보며 막아야 하겠다"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당신의모든 상황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중보 기도에 있어서 당신이 해야 할 부분은 중보 기도를 친히 하는 수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허락하신 일반상황들, 일반사람들을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안에 있는 성령께서 그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는 기회를 얻으십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주의 성도들과 함께 온 세상을 휩쓰시는 것입니다.

분명한 자세를 취하지 않음으로 또는 주를 위해 성령 대신에 일하려고 함으로
성령의 역사를 어렵게 하는 것은 아닙니까?
나는 중보기도를 통해 내가 해야 할 부분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처한 상황과 접하는 사람들을, 기도를 통해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나는 내가 의식할 수 있는 삶의 부분을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게 해야 합니다.

당신의 중보기도와 나의 중보기도는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중보기도가 당신의 것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각 개인의 특별한 삶 가운데서 중보 기도를 하십니다.
이러한 중보 기도가 없다면 누군가 영적으로 기갈하게 될 것입니다.

 



(11월 08일) 성령의 간구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우리는 성령에 의해 기도의 힘을 얻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성령안에서 기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성령께서는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기도로 우리 안에서 기도하신다는 시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거듭나 성령께서 거하시게 될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해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간구하십니다.

당신 안에 계신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의식하며 드리는 기도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기도를 찾기 위해서 당신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성령은 중보기도를 드릴 수 있는 성전으로서 성도의 몸을 필요로 합니다.
"너희 몸은 성령의 전이라"(고전 6:19)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실 때 성전 안에서 장사하기 위한 여러 기구들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령께서도 당신이 당신의 몸을 자신의 편의를 위해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사고 파는 자들을 가차없이 쫓아내며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마2l:13)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인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주를 위해 우리 몸을 더럽혀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삶의 부분이 비록 우리 인격성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전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는 무의식적인 부분을 돌보시겠지만,
우리의 의식적인 삶의 영역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11월 09일) 복음의 중심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해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해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1:24).

주님의 일꾼은 희생적 '중보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주님과 구속의 실체에 일치됨으로 주께서 그 일꾼을 통해 계속적으로 생명을 창조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일꾼의 인격이 뛰어나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일꾼의 삶의 요소들를 통해 그리스도의 실체가 다른 사람에게 임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역사 속에서의 주님의 삶과 죽음을 선포할 때 우리의 말씀은 희생적인 요소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포된 이 말씀을 주님의 구속의 바탕 위에 사용하셔서 다른 방법으로는 이룰 수 없는 새 창조를, 그 말씀을 듣는 자들 안에 행하십니다.
만일 예수님에 관한 계시 대신에 사람의 삶 속에 나타난 구속의 결과들을 선포하면,
그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결과는 새 생명이 아니라 세련된 영적 문화입니다.
이러한 선포는 다른 영역에 있는 것이므로, 성령께서 그 메시지를 증거하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할 때 오직 주님만이 그 진리를 듣는 영혼들 안에서
재창조의 역사를 일으키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의도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인격은 참 대단하군! 아주 매력적이야! 놀라운 통찰력을 가지고 있어!"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어떻게 역사할 기회를 얻겠습니까?
즉, 인간적 매력으로 사람을 끄는 것은 복음의 선포와는 무관하기 때문에 복음이 역사할 수 없습니다.
만일 누군가 자신의 인격으로 사람을 끌면, 그의 호소력은 그의 인격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님과 하나가 되면 사람을 끄는 것은 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위험은 언제나 사람이 영광을 받으려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높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1월 14일)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십시오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창24:27)

하나님과 깊게 하나가 되면 주님께 나를 어떻게 인도해 달라고 끊임없이 간구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거룩하게 되었다는 뜻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뜻이며
자녀라면 불순종을 원하지 않는 한 자연스럽게 순종할 것입니다.
불순종을 하면 직감적인 갈등이 생깁니다.
영적세계에서 이 직감적인 갈등은 성령의 경고입니다.
성령께서 이러한 경고를 주시면 당장 멈추고 우리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성령으로 거듭난 후에도 주님께 이렇게 저렇게 나를 인도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경건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 나를 인도하사."
만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난 사람이라면 지난 날을 돌아볼 때 우리에게 놀라운 섭리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 모두 특별한 일들 속에서 하나님을 봅니다.
그러나 모든 상세한 일들 속에서 하나님을 보려면 영적 훈려이 필요합니다.
절대로 우연하게 발생하는 일들이라고 해서 하나님과 무관한 것으로 보지 마십시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고 당신의 신념에 비정상적으로 전념하는 것을 주의 하십시오.
"나는 절대로 그것만은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바로 그것이,
당신이 성도이기 떄문에 해야 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주님은 일관성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변함없는 일관성을 유지하셨습니다.
성도의 단 한 가지 일관성은 원칙이 아니라 신령한 생명입니다.
신령한 생명을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 지를 발견할 것입니다.
주님께 충성된 영혼이 되는 것보다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광신자가 되는 것이 더 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충성할 때 놀라울 정도로 우리를 낮추는 일들,
특히 우리의 종교적 자만을 낮추시는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11월 15일) 성숙한 성도의 삶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시 이르시되 ...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21:21-22)

우리가 배워야 하는 어려운 교훈 중 하나는 다른 사람의 삶에 간섭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교훈을 완강하게 거절합니다.
섣부른 도움이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즉, 섣부른 도움이 다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합니다.
어떤 사람이 고통당하는 것을 볼 때 당신은 말합니다.
"그 사람이 고통을 받아서는 안 돼. 내가 그 사람이 고통받지 않도록 도와야겠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허락된 일을 막으려고 당신의 손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만일 당신이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다면 절대로 그 상태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가 영적침체의 이유를 발견히십시오.
아마도 당신은 당신이 다른 사람의 삶에 간섭했기때문에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제안을 할 권리가 없으면서도 제안했고, 충고할 권리가 없으면서도 충고했던 것입니다.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충고를 해야할 때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 사람을 충고하실 것입니다.
그때 성령은 당신을 통해 그 사람을 충고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이 할 일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분별의 지혜가 당신에게 임해서 당신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위한 복음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의식적인 세계의 한계 내에서 살아갑니다.
의식적으로 섬기고 의식적으로 하나님께 현신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미성숙한 것이며 아직 실제의 삶이 아닙니다.
성숙한 삶은 무의적으로 살아가는 어린이이 같은 삶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면 그 분께 쓰임받고 있다는 의식마저 들지 않습니다.
만일 내가 '찢겨진 빵과 부어지는 포도주'로 쓰임받고 있다고 '의식'한다면, 아직 도달해야 할 단계가 많이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단계에 도달하면 자신에대한,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무엇을 하시는지에 대한 모든 의식이 사라집니다.
성도는 의식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할 뿐입니다.


(11월 18일) 성령에 의해 책망 받을 때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16:8)

죄에 대한 성령의 책망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우리는 잘못했을 때 양심의 가책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성령에 의한 죄의 책망은 땅 위의 다른 어떠한 관계보다 단 한 가지 관계만을 고려하게 하는데,
바로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습니다!"
이와같이 성령에 의해 죄에 대한 책망을 받게 되면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결코 용서하실 수 없다는 것을 양심의 깊은 곳에서 알게 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신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은 하나님보다 더 강한 정의감을 갖고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용서하십니다.
이때 하나님의 용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했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대가로 인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가장 큰 기적은 주께서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에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수 있게 된 것이며,
그 용서는 주님의 속성에 진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말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죄에 대해 책망 받는다면 우리는 다시는 절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갈보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른 곳이 아닌 오직 십자가를 통해 부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실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주님의 십자가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되었습니다.

용서가 의미하는 것은 단지 내가 지옥에서 구원받고 천국의 특권을 얻은 것만이 아닙니다.
아무도 이러한 차원에서 용서를 용납하지는 않습니다.
용서는 내가 죄사함을 받아 다시 새로운 관계에 들어갔다는뜻입니다.
즉, 그리스도인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구속의 기적은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 새로운 성품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넣어주심으로써 거룩하지 못한 나를
거룩하신 주님의 기준에 맞게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11월 26일) 영적 능력의 집중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갈6:14)

만일 당신이 우리의 죽을 육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곧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알기 원한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비극을 묵상해야 합니다.
당신의 삶 속에 나타나는 여러 영적 증상에 개인적인 관심을 갖기보다는 순전한 영으로 하나님의 비극이었던 십자가를 생각하십시오.
그 즉시 하나님의 능력이 당신 안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앙망하라." 객관적인 근원(십자가 및 부활 사건)에 마음을 쏟으면 주관적인 능력(성령의오심)이 임하게 됩니다.
잘못된 것에 집중하면 능력을 잃습니다.
십자가의 효력으로 나타나는 결과는 구원과 성화와 치유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속의 결과들을 선포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선포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선포할 때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말씀 선포에 있어서 하나님의 중심인 예수님을 선포하십시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들이 귀를 귀울이지 않는 것 같아도 그들에게 변화가 오게 될 것입니다.
만일 내가 복음 아닌 내 말을 할 때 당신의 말이 내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내 말은 당신에게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진리를 말할 때 당신은 그 진리를 다시 접하게 되며 나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능력의 가장 위대한 곳, 즉 십자가를 향해 집중해야 합니다.
모든 능력이 거하는 십자가를 접하게 될 때에야 그 능력은 흘러나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영성 훈련 및 영적 체험을 위한 모임들이 있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하기보다
십자가로 인한 결과들에로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연약함으로 인해 비난받고 있습니다. 그 비난은 정당합니다.
그러한 영약함의 단 한가지 이유는, 영적 힘의 근원인 십자가를 향해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갈보리의 비극 및 구속의 의미를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1월 29일) 진정한 예수 없는 경건을 주의하십시오!

그가 내 영광을 니타내리니 (요 16:14)

최근의 경건 운동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경건과 아주 거리가 먼 잘못된 것들입니다.
이들 경건 운동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단지 필요한 것이 있다면 경건한 분위기와 기도와 묵상입니다.
이러한 경건의 체험은 기적적이지도, 초자연적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치르신 고통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어린 양의 피에 적시지도 않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인정되는 증거들도 없습니다.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라"고 고백할만한 진정한 경이로움과 놀라움이 전혀 없습니다.
이러한 경건은 성경에서 말하는 경건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향해 우리의 인격으로부터 나오는 열정적인 헌신과 관련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상관없는 경건의 모양이나 경험은 다 거짓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과 함께 생명을 나누는 중생도 없고 예수님이 계신 천국으로 들어가는 거듭남의 역사도 없습니다.
오직 이들에게 예수님은 그들이 본받아야 할 경건의 패턴일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우리의 본이기에 앞서 구세주이심을 알립니다.
오늘날 경건의 훈련이라는 제목 하에 예수님은 기독교의 상징적인 인물로, 사람들의 단순한 본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분은 우리의 모범이 되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보다 훨씬 더 무한한 분이십니다.
주님은 구원 그 자체이시며 하나님의 복음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요16: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성경의 계시에 나 자신을 맡기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의 선물을 받게 됩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그의미를 내게 알려주시고,
특히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객관적으로 이루신 일들을 내 안에서 주관적으로 적용하십니다.

 



(12월 03일) 사람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이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고전 2:4)

복음을 선포할 때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는 대신에 구원의 방법에 대한 당신의 뚜렷한 지식을 의지한다면
당신은 사람들이 실체 되시는 주님께로 오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선포할 때 언제나 주의해야 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우리 자신이 믿음안에서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고 기반을 내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결코 당신 설교의 정교함을 의지하지 말고, 그 설교에 역사하실 성령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능력만을 확신하십시오. 주께서 사람들의 영혼 안에 주님의 생명을 창조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진정 실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리면 아무것도 당신을 흔들지 못합니다.
만일 당신의 믿음을 체험에 둔다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언제든지 당신의 믿음을 흔들어놓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하나님 또는 구속의 실체를 흔들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오직 예수님께만 두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당신은 영원토록 하나님처럼 안전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교제를 가지는 한, 당신은 다시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의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화를 하나의 체험으로 볼 때 그 체험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성화의 체험 자체도 거룩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요17:19)
주님을 섬기기위해 거룩해진 나의 생명을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주님의 손과 발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12월 05일) 성령의 전

나는 너보다 높은 것은 내 왕좌뿐이니라 (창41:40)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다스림에 내 몸을 굴복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바울은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갈2:21)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적이고 예수님의 구원은 완전한 것으로서 영원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나는 구원을 받고 있는 진행 상태가 아니라 이미 구원받았으며 그 구원은 하나님의 보좌와 같이 영원합니다.
단지 내가 해야할 일은 하나님께서 내 영혼속에 이루신 일을 나의 삶에 이루는 것입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구원을 이루라"(빌2:12)
이는 우리의 책임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몸을 통해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신비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내야합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고전9:27)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몸을 복종시켜 철저하게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몸을 성령의 전으로 삼으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몸을 관리하게 하셨습니다.
나아가 우리의 생각과 감정까지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비정상적인 욕심에 우리 몸을 굴복시켜서는 안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보다 다른사람에게 훨씬 더 엄격합니다.
자신의 약점에 대해서는 핑계하고 합리화시키는 반면,
자신이 적대시하는 다른 사람들의 약점에 대해서는 판단하고 정죄하느라 바쁩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롬12:1)고 말합니다.
결국 나의 몸에 관한 모든 율법은, 내몸은 '성령의 전'이라는 이 한 가지의 계시로 요약됩니다.

 



(12월 21일) 주님보다 체험을 더 좋아합니까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2:12)

실체는 구속 자체이지 구속으로 인한 신앙 체험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속을 나의 의식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할 때까지는, 나 자신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성령께서는 우리를 우리 자신과 자신의 체험에서 끄집어내어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되게 하십니다.
만일 자신의 체험에 사로잡혀 있다면그 체험은 구속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구속에 의해 발생된 체험의 증거는 언제나 '나'라는 존재가 잊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체험을 더 이상 실체의 근원으로 오해하지 않고 오직 그 체험들을 발생시킨 진정한 실체에 관심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체험이 우리를 그 체험의 근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주관적인 체험을 얻기 위해 당신 안에 계신 성령을, 둑을 쌓아 가두려 한다면,
성령께서는 그 모든 둑을 터뜨리시고 당신을 다시 역사 속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믿음을 세우게 하지 않는 영적 체험을 부추기지 마십시오.
그러한 체험은 설령 엄청난 환상을 본 것이라고 할지라도 결국 비기독교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체험의 주가 되십니까?
아니면 당신은 당신의 체험을 예수님보다 앞세웁니까?
혹시 주님보다 체험을 더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까?
주님께서 당신의 주가 되셔야 합니다.
주님이 주가 되시지 않는 그러한 체험에는 절대로 신경을 써서는 안 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 자신의 체험에 대해 대단하게 여기지 않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내가 뭘 체험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는 단지 주님만을 확신합니다."

항상 자신의 체험을 말하고 있다면 자신을 엄하게 다루십시오.
믿음 자체를 확신하는 믿음은 이미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확신하는 믿음만이 유일한 참된 믿음입니다.

 




(12월 24일) 감추어진 생명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골3:3)

성령은 하나님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진 우리의 새 생명이 얼마나 진실하고 영원토록 안전한 것인지를 증거하십니다.
바울의 서신들은 계속 이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위태로운 삶인 것처럼 말합니다.
사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가장 안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거룩한 삶에, 그리고 그 삶의 뒤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불안정한 삶은 하나님없이 살아보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거듭난 사람들이라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사는 삶이 가장 쉽습니다.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 빛 기운데 거하기를 주의한다면,
오히려 죄를 짓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죄로부터 구원을 얻고 성령으로 충만하며 빛가운데 행하는 삶을
마치 커다란 높은 산꼭대기에 서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 여기 이렇게 높은 곳에서는 그렇게 오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곳에 이르면 그곳은 산꼭대기가 아니라 마음껏 뛰고 쉬며 성장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의 평지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내 걸음을 넓게 하셨고 나를 실족하지 않게 하셨나이다"(시18:36).

당신이 정말로 주를 보게 될 때 진짜 주님이신지 의심해보십시오.
그분이 거기에 정말로 계시다면 의심을 하거나 근심하는 것은 도덕적(의지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당신이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에 들어가는 모든 순간에 그분의 말씀은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14:27).
이 평안은 거부할 수 없는 평안이요 우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넘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었음이니라."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이 당신에게 부여되는 것입니다.

 




(12월 26일) 빛 가운데 거하면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1:7)

죄에 대해 의식적인 차원에서 자유함을 느끼는 것과 속죄에 의해 죄로 부터 구원받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그 누구도 거듭나기 전까지는 무엇이 죄인지 알 수 없습니다.
죄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위에서 대면하신 것입니다.
내가 죄로부터 구원받은 증거는 내 속에 있는 죄의 진정한 속성을 아는 것입니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해 마지막까지 대항합니다.
마침내 속죄의 절대적 완전하심이 그 사람에게 부여되면 그때서야 그 사람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속죄를 의식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무의식적인 영역에도 적용하십니다.
오직 우리안에 계신 성령의 절대적 능력을 붙잡을 때에만 우리는 요한일서 1장 7절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기서 죄란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죄뿐 아니라 우리안에 계신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깊은 죄성들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만일 우리가 빛 기운데 거하면,
내 양심의 빛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거한다면, 아무 것도 감출 수 없는 그 상태에서 놀라운 계시를 보게 될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로부터 나를 깨끗케 하셨다는 것이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책망하실만한 것이 내 안에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한편 이 빛은 내 의식세계에서 죄가 무엇인지에 대한 예리하고 뼈아픈 지식을 동반합니다.
내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나로 하여금 내 안에 거룩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한 성령의 미워하심으로 그것들을 미워하게 만듭니다.
빛 가운데 걷는다는 의미는 어둠에 속한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더욱 빛의 중심으로 나아가게 함을 의미합니다.

 



(12월 27일) 영적 전쟁의 승리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렘4:l)

영적 전쟁의 성패는 외부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지라는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판가름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사로잡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적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기 전에는 우리는 매번 패배합니다.
영적 전챙이 몇 분이 걸릴 지 또는 몇 년이 걸릴 지는 하나님께 달린 것이 아니라 내게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이 의지의 전쟁은 하나님 앞에서 나 홀로 치러야 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서 영적전쟁을 치르는 성도를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영적 전쟁의 상황에 처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때 하나님을 시험해봐야지"라고 말하는 사람은 영적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먼저 아무도 간섭할 수 없는 내 영혼의 가장 비밀스러운 의지라는 장소에서 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 후 영적전쟁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으로 나아갈수 있습니다.
만일 영적 전쟁에서 지면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재난과 비참과 요동함이 분명히 임하게 됩니다.
영적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이유는 먼저 외부 세계와 싸워 이기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동행하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이 싸움을 먼저 치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이 싸움을 단 한번에 영원히 해결하십시오.

다른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서도 언제나 '의지'의 문제까지 그들을 이끌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의지'로 하나님께 항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가끔 우리를 삶의 극한 상황으로 이끄십니다.
그 곳은 삶의 가장 큰 분기점이 있는 지점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게으르고 쓸모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든지 아니면 더욱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타오를 수 있습니다.
최상의 주님께 당신의 최선을 드리십시오!

 



(12월 28일) 교만과 완고함을 버리십시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18:3)

주님의 이 말씀은 처음 거듭날 때에도 해당되는 진리이지만 우리의 인생가운데서도 계속 적용되어야 하는 진리입니다.
곧 우리는 어링아이와 같이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 대신에 자신을 의지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책임을 추궁하실만한 문제들을 일으킬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우리 몸이 새로운 조건에 접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자연적인 삶이 성령의 명령에 순종하는지를 주시해야 합니다.
한번 그렇게 했다고 해서 계속 그렇게 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것의 관계는 계속적인 변형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하는 한가지입니다.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 가운데서 성령은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주님의 구원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만일 우리 자신을 변형시키기를 거절하면 하나님께서 매번 우리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를 거절하는 이유는 의도적인 완고함 때문입니다.
자연적인 생명이 우리를 다스려서는 안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셔야 합니다.

영적인 삶의 장애는 우리가 계속적으로 변화되지 않는 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침을 뱉는 우리의 교만과 완고함이 "절대안돼"라고 하며 변화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교만과 완고함을 신성화시켜 잘못된 이름을 붙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완고함을 결점으로 보실 때 우리는 그 완고함을 '힘'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는 아직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은 부분들이 잔뜩 남아 있습니다.
이 부분들은 오직 계속적인 변화에 의해서만 순복될 수 있습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을 성령의 터전으로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12월 29일) 참된 제자입니까?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요6:66)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원하시는 바를 말씀을 통해 성령으로 비전을 주시면 당신의 마음과 영혼은 감격하며 흥분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만일 그 비전의 빛 가운데서 행하지 않으면 당신은 주님께서 갖지 않으신 관점에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주께서 주신 하늘의 비전에 불순종할 때, 당신의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어울릴 수 없는 세상적 관점의 노예로 전락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보며 이렇게 말하지마십시오.
"저런 관점들을 가지고 형통하는 것을 보니 나라고 저런 관점을 갖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어?"
당신은 당신에게 주신 비전의 빛 가운데서 걸어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비전과 자신의 것을 비교하거나 세상사람들의 비전을 판다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비전은 하나님과 그들 사이의 문제일 뿐입니다.

만일 우리가 즐겨하던 어떤 가치관이 하늘의 비전과 상충될 때 여전히 그 가치관을 지키려고 하나님과 다툰다면
당신 마음속에서 뭔가 자라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곧 물질에 대한 소욕과 자기 주장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가치하게 여기시는 것에 대한 욕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욕심들을 예수님과 전혀 어울릴 수 없는 모든 것들의 뿌리로 여기고 대항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눅12:15).
만일 우리가 이 진리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는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졌던 멋지고 풍성한 과거 경험의 기억 속에 안주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빛에 의해 성경에서 한 가지 기준이 계시되었을 때, 당신은 당신이 그 기준에 이르지 못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기준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는 영적 침체의 시작입니다.
그 이유는 당신의 양심이 더 이상 진리에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알고 난 후에 당신의 인생은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진리를 알게되면 예수그리스도의 참된 제자로 더욱 앞으로 나아가든지 뒤로 물러나 포기하는 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08월 06일)기도하는 이유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요16:26)


우리는 십자가를 생각할 때 우리가 통과해야 할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뭔가를 얻기 위해 십자가를 지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단 한가지를 위한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온전히, 그리고 완벽하게 절대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됨은 그 어떤 것보다 기도를 통해 실현될 수 있습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8)
그렇다면 왜 구합니까? 기도의 개념은 하나님께로부터 어떠한 응답을 얻기 위함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온전하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응답을 원하여 기도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허탈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응답은 언제나 옵니다. 그러나 항상 우리가 원하는대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 허탈감은 우리가 기도를 통해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를 통해 주님과 하나님의 은혜의 살아있는 증거품으로 이 땅에 존재합니다.

"그날에 ...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16:26-27)
당신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로 인해 당신이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만큼 하나님과 친밀합니까?
주님의 대속의 삶이 당신의 생동력 있는 삶이 되고 있습니까?
'그날에' 당신은 예수님과 너무나 일치가 되어 주님과 당신 사이에 구별이 없을 것입니다.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 같을 때, 다른 사람에게 구실을 찾아 비난하려는 자세를 주의하십시오.
이것이 언제나 사탄의 올무입니다.
응답되지 않는 기도를 통해 언제나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당신에게 깊은 교훈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 성령 하나님에 대한 좋은 내용들을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