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입은 믿음.....(설교)
상처입은 믿음
(마28:16~20)
신앙이 신앙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했다거나 임재의 느낌이 전혀 없다면, 신앙생활이 드라이해지고 무미건조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한다 그럴때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간신히 버티는 신앙생활밖에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체험, 이것은 우리를 강하게 만들고 신선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학교에서 존경하는 분을 소개하라, 단 살아있는 분을 소개하라고 했답니다.
한 학생은 집 없는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주는 해비타트(Habitat) 운동하는 지미 카터, 어떤 학생은 월드비젼에서 섬기는 탤런트 김혜자씨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은 예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살아있는 분들 중에서 말해야 한다고 했더니, 그 학생은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제 안에도 살아계시고 분명히 이 자리에도 계십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장말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계시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말투라든지 어떤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표현하는 방법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예수님을 무덤속에 가두어 놓고 있는 인생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2천년 전에 계셨고, 팔레스타인에 계셨고, 나하고는 별 관계가 없고 성경은 고리타분한 이야기고 지금 내 사는 문제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능력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게 만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를 맛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방법대로 가야 만날 것 아니겠습니까?
1) 예배드릴 때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예배하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28:20)
예수님이 언제 함께 하실까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18:20)
수가성여인과의 대화를 보면,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4:23)
예배드릴 때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예배드리지 않고 딴 짓 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하나님 보기를 원한다면 어불성설입니다.
교회가 성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를 강력하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를 지혜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느끼도록 예배가운데 성도를 이끌어 가야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성도들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사람을 이끌어가기위한 유인책이거나 당근일뿐, 빵을 준다거나 개발바닥 소발바닥 한다고 변화되지 않습니다.
긍극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변화가 됩니다.
설교를 왜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 만나게 할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배때 만나 주시니까 예배에 목숨 걸어야 합니다.
은혜받은 사람의 특징은 집에 안간다는 것입니다.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이 있습니다.
가슴아파서 숨 못쉬는 사람 뻥 뚫리고, 가슴답답한 사람 다 내려가고, 고통스런 생각에 불면증있는 사람이 다 회복이 됩니다.
4시간 동안 울던 형제는 자기의 아픔과 죄악이 다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육체적인 질병의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고 날마다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배가 살아야 합니다. 에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까? 예배가 살아있는 교회입니까?
이것이 본질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정통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2.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마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막16:20) 제자들이 나아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복음증거할 때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가 있습니다. 증거할때 성령이 강하게 임합니다.
자기입술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다가 증거하는 입술가운데 주의 성령이 임재한 것입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증거하다가 눈물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목사는 이것을 여러번 느낍니다.
목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는 말씀증거하기 위해 기도하고 말씀증거하기 위해서 말씀을 많이 봐야 합니다.
또 하나는 현장속에서 부족함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성령의 기름부음이 느껴집니다.
그 때 내죄부터 기억나게 되고 간절히 증거하게 됩니다.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힘차게 증거하게 됩니다.
성도로 하여금 성령의 임재를 느끼게 할려면 복음증거의 현장으로 이끌어가야 합니다.
능력있는 교회는 예배를 드려서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게 하고 복음증거하다 다 깨져버리게 합니다.(예배+선교현장)
우리는 파이프입니다. 흘려보내는 파이프입니다.
증거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복음증거하는 현장을 떠나지 마십시오. 그것이 성령충만해지는 첩경입니다.
3. 고난의 현장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예수믿으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원론적으론 맞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하나하나 인간적인 모든 문제가 해결되느냐 그건 아닙니다. 예수님 믿어도 예수님의 임재가 있어도 여전히 문제는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도 육체의 가시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도 가시가 있습니다.
그런데 가시 중에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해주실 때 우리의 문제가 다 풀리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안풀릴 수도 있습니다. 고난이 여전히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재중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습니다. 오히려 사라지지 않는 고난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더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몸이 아픈데 하나님의 임재를 더 강하게 느낍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것, 그것이 주님께서 임재하시는 방법이십니다.
어머니와 딸이 있는데, 딸이 큰 다리수술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딸의 다리가 낫는데 직접적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딸이 다리낫는데 그 고통가운데 어머니의 임재를 가장 크게 느꼈을 것입니다.
능력이 없고 못해도 옆에 있는 것이 임재입니다. 고통이 사라지지않아도 사랑이 제일 깊어집니다.
고난은 설명이 안됩니다. 죄때문이다, 연단을 위해서다, 말은 쉽습니다.
고난은 신비입니다. 모릅니다. 미스테리입니다. 뭐라고 정의 내리기 힘듭니다. 잘모르겠습니다.
고난이 왜 오는지 고난의 정의가 무엇인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난 중에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치있는 일입니까? 고난중에도 깊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누릴 수 있는 것이 나쁜 것입니까?
그 병을 낫게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고통당하는 사람 옆에서 같이 있어주고 신경안쓰는 척 해주고, 같이 밥먹어주고, 이게 의미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께서 옆에 계시면서 나의 삶을 고쳐주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하나님의 임재를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는 그런 모습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불행중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불행하다 그러는 것은, 내가 추구하는 것이 없는 것이 불행이라고 합니다. (돈, 명예, 결혼, 예쁘길 원한다.)
불행감을 느낄때 또 하나 얻는것은 다른 무엇을 추구해야 되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불행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저는 청년들이 약간은 불행했으면 좋겠습니다. 엉뚱한 것에 행복감을 느껴가지고 헛된인생을 살까봐 두렵습니다.
솔로몬과 같이 헛된 인생을 살까봐 두렵습니다. 바람을 잡는 것 같다 그럴까봐 두렵습니다.
불행을 너무 두려워 하지마십시오. 잘못된 것을 추구했을 때 그것을 못얻어서 생긴 불행은 유익할 수 있습니다.
제 인생이 언제 깊어졌느냐면 불행을 느꼈을 때였습니다. 불행하니까 다른 뭔가를 추구해야겠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심지어 목회를 해도 명예같은 것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돈, 명예 그것 아니네. 딴 것 추구해야겠네'를 불행할 때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왜 나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 주신것이지요. 무조건 불행을 나쁜 것이라 여기지마십시오.
엘리 비젤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음의 위기를 체험했던 사람입니다.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하여 활발한 저작활동을 하고 있는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엘리 비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음가운데 제일 온전한 마음은 상처입은 마음입니다.(시51편) 믿음가운데 가장 온전한 믿음은 상처입은 믿음입니다.
의심도 있고 의혹도 있고 알수 없는, 상처입은 믿음 말입니다. 그 믿음이 진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라고 했을 때 그는 상처받지 않았을까요?
딜레마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왜 이러실까? 주시고 난 다음에 왜 죽이라고 하시는가?
로마서 11장에 나온 것처럼 죽었다가 살리시는 부활을 믿었습니다.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처입은 믿음 속에서 비약하는 믿음, 완성된 믿음, 더 큰 믿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아멘하는, 이런 아무 갈등도 없는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 믿음이 아닙니다.
신앙생활하다보면 내 믿음에 상처를 입습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상처입은 믿음이 온전한 믿음입니다. 그 깊이를 알겠습니까? 그것을 극복하다보면 그것이 진짜 믿음입니다.
예수님 쉽게 믿지 마십시오. 기도했더니, 십일조 했더니 뭐가 생기고 선교 갔다 왔더니 취직이 되고. 그런 단순한 도식이 아닙니다.
신앙은 그것보다 훨씬 복잡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아기의 죽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갓난아기가 죽었다, 설명이 됩니까? 하나님이 하셨다, 하나님이 죽이셨다, 그렇게 믿고 싶지 않습니다.
신학자가 뭐라 하든 내 마음이 동의를 못하겠습니다.
하나님도 어쩔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무능한 하나님. 그 말엔 더 동의 할 수 없습니다.
나도 모르겠습니다. 고난이 있는데 그 자리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고통가운데 같이 계십니다. 울면서 같이 계십니다.
아파하시는 하나님, 고난받는 그 현장에 예수님이 계시고 동일한 아픔을 가지고 아파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중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한가지 가지고 설명할 수 없습니다.
고난은 어떤 가치를 더 가치있게 드러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고난가운데 납득안되는 일이 있습니다. 고난의 자리에서 아름다운 가치가 더 아름답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눈물로 인해 사랑이 더 힘차게 드러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 충성이 그때 더 드러납니다.
믿음이 가장 빛나는 순간은 고난중에 하나님 만났을 때입니다.
이것이 예배중에 하나님 만났을 때나 복음증거하다 하나님 만날때보다 훨씬 더 깊은 것 같습니다.
우리 삶의 무의식속에 있는 많은 아픔들을 회복시키고 깨우치고 풀어주는 능력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고난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입니다.
고난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난중에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인도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시84:5~7)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앞에 나아가서 임재의 느낌을 맛보고 하나님앞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때 눈물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하나님께서 임재해주십니다. 그래서 새힘을 얻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앞에 영광찬미를 돌리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뒤 논리가 맞지 않습니다. 고난중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고난중에 하나님을 더 깊이 깨달은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고백입니다. 신비로밖에 해석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능력있는 성도나 교회가 되기위해서는 예배를 통해서, 복음증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여기까지는 양적인 의미의 임재이고, 음적인 의미의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고 하나님과 내가 혼연일체가 되는 만남은 고난중의 만남입니다.
방언이란 물론 외국어방언도 있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응석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어린아이 옹알이 같이 너무 힘들 때, 애교 부리듯이, 그것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로서의 '으응'이 아니라 너무 가슴이 아프면 말로 표현이 안되는 것입니다.
신음이 나옵니다. 내 신음까지도 들으시는 하나님, 신음이 기도가 됩니다. 그 때 주님의 강력한 임재가 있습니다.
언어로 표현되는 말은 논리가 있어야 되고 뜻이 있어야 하지만 이것은 뜻이 없지만 뜻이 있는 것, 가슴에 뜻을 품고 있습니다.
그 응답에는 분명 하나님의 뜻을 담은 응답이 있습니다. 고난중에 기도할 때 하나님이 임재해 주십니다.
우리의 아픔들과 슬픔들을 회복해 주시는,
그래서 삶의 쓴뿌리가 해결되는 시간이 되는 믿음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