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인가?
오래 전부터 마음에 품고가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와
'우리가 온전한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외치고 있건만 왜 자꾸만 흔들리는 인생을 살아갈까요?
물론 수많은 이유와 설명들이 있겠지요.^^
앞의 김집사님의 나누는 글을 읽으며 평소 마음에 갖고있는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대단한 말은 아니지만 어제 새벽기도 시간에 이런 단어들의 조합이 떠올랐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생각들과 이해들이 믿음의 길을 가는데 많은 도움을 줍니다.)
# 우리는 ~ "자유의지를 가진 피조물"
저 자신을 가만히 살펴보면, 제 자신이 하나님께 지음받은 피조물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4영리에도 나와 있듯이 우리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닌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이라고 배웠지만,
우리의 삶은 언제나 '나'을 중심하고 자신을 주인공으로 삼으려는 본능이 숨어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자아는 항상 독특하며 개별적이고 독립적입니다.
그러기에 남들과 다른 개성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추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은 이런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가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물론 의도적이지는 않겠지만) 하나님을 내가 어려울 때(만) 개입하며 도움을 주시는 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습게도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께 때때로 보조적인(?) 역할만을 부여하는 때가 좀 많지 않습니까?
이것은 믿음의 삶속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할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창세기에서 마귀는 하와에게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 곧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하려고 꼬일때,
그 열매를 먹으면 너희가 결코 죽지 않고, 너희 눈이 밝아지고, 선악을 알게 되어 결국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유혹하였습니다.
또 이사야서에, 하늘에서 떨어져 땅에 찍힌 아침의 아들 계명성을 이야기할 때,
스스로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고,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고,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겠다는 마음을 품은 자라고 표현하였습니다.(사14:12~14)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은 바 되었다고 하셨지만
우리의 분명한 위치와 본질을 말씀하실 때는 여러번 토기장이와 진흙과의 관계로 언급하셨음을 기억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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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패역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이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사29:16)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이와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진저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너는 무엇을 만드느냐 또는 네가 만든 것이 그는 손이 없다 말할 수 있겠느냐
아버지에게는 무엇을 낳았소 하고 묻고 어머니에게는 무엇을 낳으려고 해산의 수고를 하였소 하고 묻는 자는 화 있을진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사45:7~12)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사64:8)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렘18:3~6)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롬9: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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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피조물로써 제한적인 환경속에서 살아갑니다.
물리적인 한계가 있는 세상의 조건들속에서 삶을 이어갑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나라나 인종이나 부모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스스로 바꿀 수없는 삶의 한계속에서 사주팔주나 운명론, 숙명론에 빠져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피조물로서의 제한된 폭이지만 진정한 생명의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자유의지에 따른 모든 선택은 김집사님 말씀처럼, 반드시 책임이 뒤따르며, 그 결과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의 삶을 압박하며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유를 빼앗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커다란 복입니다.
피조물로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을 내려주신 것이지요.
불완전한 사람이 악에 빠질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것은,
인간의 가장 큰 고귀함이 이 자유의지에 있으며 참다운 생명의 필수요건이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으로
저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가 피조물임을 마음속 깊숙히 인정할 때,
저의 끝없이 반복되고 높아지던 생각의 파도가 잠잠해졌습니다.
하나님앞에서 책임져야 할 자유의지를 가진 자임을 인식할 때에,
참다운 삶에 대한 관점에 눈뜨게 된 것 같고 온전한 믿음생활에 대해 스스로를 점검할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사랑하는 존귀한 자,
하나님의 아들까지 희생시키시며 구속하시고자 하는 자,
주의 성령을 보내 연약함과 상처를 회복시키시며 동행코자 하는 자.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우리들인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또 다른 단어의 조합이 떠오르네요.
# 우리는 ~ "자신의 삶에 책임을 져야하는 하나님의 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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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임지는 삶'에 대한 의도하지 않는 부담감을 갖을 것 같아서 덧붙여 올립니다.
어느 누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인생을 완벽히 감당하며 떳떳하며 자랑할 수 있는 삶을 살까요?
우리가 스스로의 인생을 전적으로 책임지기에 도대체가 역부족임을
주님앞에서 시인하며 오직 주님만 의지하기를 고백할 때에야,
우리는 우리 주이신 그리스도안에서 긍휼히 여김을 받으며 살아가는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 (마11:28~30)
이것이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주신 가장 복된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안에서 종된 모습으로, 자녀된 신분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참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oldgirl님, 풀어내기 어려운 일이 거듭해 닥칠 때 더욱 주님께 의뢰하시기를.....
Do it in Chris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