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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성도들을 '다 된자'로 여기지는 맙시다.

강가딘777 2009. 11. 15. 09:15

 

 

한 교우님이 계십니다.

그 분은 마음이 어린아이같이 여리고 순수하신 면이 많으셔서 그런지 주변 분들의 말 한마디에 감정적으로 반응하고 또 상처받기도 하십니다. 언제가 본인이 겪은 일에 대해 설명하시면서 '믿는 사람이 나에게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느냐'고 하시기에 "우리는 이미 완성된 자도 아니고 다 된자도 아닙니다. 서로 긍휼히 여겨주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루어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며 다른 성도들을 대할 때 왜 ' 이미 다 된자 '로 여기는 듯한 느낌이 들까요?

여기서 '다 된자'라는 말은 예수님으로 인해 거듭난 자들이 당연히 행하는, 회복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라는 뜻입니다.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며 바라보는 것은 좋은 믿음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더딘 믿음의 성장으로 인해 안타까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 사람의 변화와 성숙을 조용히 인내하고 기다려주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관점으로서가 아니라,

" 스스로 알아서 잘하겠지 ", 

" 내가 왜 다른 사람의 인생에 신경써야 하나, 내가 왜 괜한 관여를 해야 하지? ",

" 내게 주어진 다른 일 하기도 바빠요.",

" 나도 부족한데 누가 누굴 가르치나? 내가 무슨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나서나? " ,

이런 말들을 하며 그럴 필요를 제한하는 모습이나, 그런 저런 이유를 말하지만, 같은 믿음의 공동체속에서 서로를 더 변화되고 더 깊어질 수 있는 한 인격임을 기대하며 대하지 않는, 사실은 서로에 대한 거리감에서 오는 주저함과 차가운 무관심이 아니지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예전에 이애실사모님의 '어 성경이 읽어지네'를 읽고 지금도 성경을 읽을 때 도움을 받는 두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은 세상의 힘있는 왕을 원했지만 진정한 우리의 왕은 하나님이시라는 것,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꾸준히 말씀하시는 진정한 인간됨은 바로 ' 나는 너고, 너는 나다. ' 라는 것을 항상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은 성경 전체를 일관되게 꿰뚫는 주제이고, 믿는 자의 하나됨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드러나는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시다 우연히 만난 12년된 혈루병 앓은 여인을 고치시는 사건은 믿는 자의 하나됨이 어떤 것인지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막5.25-34, 마9:20-22)

이 장면속에서 그 누구보다 소중했을 딸의 목숨이 긴박한 상황속에서, 예수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그 비천한 여인을 야이로는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아무리 좋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도 '미천한 이 여자때문에 귀한 내 딸이 죽게생겼구나!'하며 그 여인에 대해 분노하며 상황에 대한 낙담이 그 마음에 교차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결국 딸이 죽었다고 기별이 옵니다.

예수님은 그 촉박하고 심각한 상황속에서 야이로의 믿음을 시험하셨을까요?

그 여인은 부정한 병으로 인해 사회적 사형선고를 받게 된 후, 사람들이 접근할 때는 부정한 여인이라 스스로 외치며 오랜 기간 정상적인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상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구원의 간절함에 남모르게 손을 뻗어 예수님의 겉옷을 만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특별한 것은 군중들의 물결속에서 예수님이 그 여인을 일부러 찾으시는 장면입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깜짝 놀라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게 되었고, 예수님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몹쓸 병에서의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병든 여인이 모든 사실을 말했다고 했는데 무엇을 말했을까요?  

그녀가 지금까지 살아온 구구절절한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자기가 어디 사람이고, 누구집 딸이며, 언제 이런 병에 걸렸으며, 병을 고치려고 온갖 노력을 했으며, 점차 살 소망을 일고 낙심속에서 살았으며, 그러던 중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으며, 마지막 희망을 갖고 예수님 만나기를 기다렸고, 예수님의 겉옷 자락이라도 만지겠다고 결심했으며, 마침 사람들이 미는 틈을 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고, 그에게서 능력이 나옴을 느꼈고,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속일 수 없는 분이심을 이제 알았다,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 그 여인의 어쩌면 장황하고 길었을 이야기를 많은 군중과 함께 들으시려고 시간을 충분히 내어주신 것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혈루병이라는 부정한 병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분리되어 내쳐졌던 그 여인이 육신의 병만 고침받는 것에 그치지 않게 하시고 수많은 증인들 앞에서 사회적으로도 온전히 회복시키시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딸의 죽음을 통보받고 무너진 마음을 주체못해 후둘거리며 서있던 야이로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아이가 죽지 않고 잔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비웃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예수님은 소녀를 일으켜 세워셨습니다.

의미있는 것은 혈루병걸린 여인이 죽음과도 같은 고통을 겪었던 시간과 예수님이 일으킨 그 아이가 세상에 살아온 시간이 똑같이 12년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속 '액자같은' 이 장면에서, 예수님은 야이로에게 어쩌면 이런 말씀을 마음으로 전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 야이로야, 보아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귀한 네 딸이나, 네 딸을 네 눈으로 보며 즐거워했던 그 시간만큼 처절한 고통속에 몸부림친 이 여인이나, 나에게는 다 귀하고 소중한 존재들이다. 너도 앞으로 이와 같이 다른 이들을 네 혈육처럼 사랑하고 존중하거라.

이것이 바로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깊이 심기워주신 공동체성의 적절한 표현이 바로 이 말이 아닐까 합니다.

' 나는 너고, 너는 나다. '

 

 

우리는 예수공동체, 한 몸의 지체들, 하나님의 한 가족입니다.

가족이란 아무 조건없이 같이 있음으로 마냥 기뻐하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되시는 우리는,  그 아버지를 아는 지식속에서 그 영광을 통해 우리는 하나됩니다.

주님의 부어주시는 사랑안에서 서로 사랑합니다.

령의 은혜안에서 함께 시간을 보냅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너무 부족해 참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그러나 왜 내가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해야 하는지, 또 그럴러면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를 여전히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각자 삶속의 질문들을 통해 더 깊고 능력있는 삶과 열매맺는 삶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서로 사랑함, 그리고 함께 있음으로 즐거워지는 것은 그냥 한 공간에 집어넣기만하면 저절로 생겨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동일한 믿음의 울타리안에서 서로에 대한 깊은 관심과 많은 헌신된 시간의 흐름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점검해야겠지만, 먼저는 우리 교회공동체가 하나되는 응집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다함께 기도해야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참, 오랜시간 드리는 기도의 가장 큰 유익은 무엇일까요?

처음에는 극히 이기적인 목적으로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있는 내용의 기도를 시작했어도, 성령께서 우리가 기도하는 시간동안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키심으로 우리가 진짜 해야 할 올바른 기도를 하도록 교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8:26)

 

예수님의 몸된 교회는 곧 유기체적 공동체입니다. 그러기에 서로 유기적으로 소통하고 협력해야합니다.

한 몸으로서의 유기적인 소통과 협력과 하나됨을 이끌어내는 것은 그것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자의 몫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각자의 은사들이 긴밀하고 능력있게 잘 사용되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이루며, 언제나 영적 긴장감과 민감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마다 생명력이 넘치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그렇게 되게 해주시옵소서.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