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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말씀의 관찰과 문맥이해

강가딘777 2019. 5. 29. 09:10

 

 

<위의 내용은 참고자료>

 

 

역대상17장..잘 익은 인생

 

(본문요약)

다윗왕이 백향목 궁전을 지은 후 하나님께 송구한 마음에 성전을 짓기를 계획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의 성전 건축을 금하신다. (그 이유는 22장에)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그의 왕조에 대한 언약을 하신다. 다윗은 감격해 하나님 앞에 가서 감사의 기도와 간구를 드린다.

 

(설교 요약)

다윗의 기도 : 자신의 삶과 이스라엘에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의 기도다. 강대상에 수국이 색이 바래며 질 준비를 한다. 예쁘게 익어가길 기도했다. 인생이 잘 익어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다윗을 보면서 감사로 익어가는 인생이 성숙하고 원숙한 인생이겠다 결론을 내렸다.

 

감사한 마음에 여유와 평안이 깃들고, 감사를 잃으면 불만과 짜증, 미움과 원망이 생긴다. 감사가 없는 사람이 집중하는 것은 자기자존심 세우기와 자기변호. 이런 사람이 어떤 관계에서도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 때 진정성이 없게된다. 감사가 사라지면 미움과 적대감이 남는다.

 

감사는 배부른 자의 여유가 아니다. 여전히 힘들고 고단한 삶속에서도 하나님앞에 감사로 익어가기를 소망해야 한다. 다윗처럼 은혜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은혜의 하나님이 먼저 다가오시고 다윗을 향한 큰 은혜가 주어졌다. 언약의 말씀, 은혜의 말씀을 성취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하신 하나님이 영원한 나라를 선물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맛있게 잘 익으려면 시간과 사랑의 수고가 필요하다. 기다림과 인내의 과정이 필요하다. 감사로 익어가는 미래를 꿈꾸면서 소망가운데 살아가려면 지금 이 순간에 감사를 쌓아가야 한다. 감사가 충만하지 않으면 마음의 여유와 평안도, 진정한 사과도 나올 수 없다.

 

우리 인생은 감사로 익어가야 한다. 모든 감사의 출발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함으로 시작된다. 하나님이 주신 사람에게도 감사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어떤 상황에도 감사하라. 감사로 인해 너그러운 허용과 따뜻한 포용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은혜로 주셨음을 감사하라. 삶의 모든 순간에 감사를 새겨넣으면서 감사로 익어가는 인생이 되기를 축원한다.

 

 

(본문이해)

언제나 설교의 내용은 마음에 새길만하다. 감사의 삶!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은혜로 생명과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므로 당연한 삶의 태도이다. 내가 받고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햬임를 감사한다.

 

신경쓰이는 것은 변함없는 두가지.

1. 제목이나 어떤 단어를 중심으로 이야기 풀어가기

2. 그 결과 본문의 내용이 배경처럼 흐려진다.

 

한번 꽃힌 제목이나 단어가 중심이 되다보니('감사' '익어가는') 설교를 듣는 청중이 하나님이 하신 말씀과 행하신 일에 대한 관심이 없어진다. 그 결과로 본문이 포커스가 맞춰지지 않은 배경처럼 흐릿해진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성전건축을 금했지만 3가지 놀라운 약속을 하셨다. 1. 다윗의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주겠다. 2.백성들을 한 곳에 심으시고 보호해주겠다. 3. 다윗왕조를 세워주겠다.

또한 다윗의 후손에게도 약속을 하셨다. 1. 네 후손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할 수 있도록 허락하겠다. 2. 그의 왕좌를 영원히 세워주겠다. "나는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될것"이라는 감동적인 언약을 하셨다.

 

이에 감격한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기도로 간구할 마음이 불타올랐다. '이 모든 큰 일' '이 좋은 것' 이라고 표현한 하나님의 약속이 '영원한 복'이 되길 다윗은 간구했다.

 

사실 다윗의 인생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는 놀라운 것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행하심은 더욱 감사할 일이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온 다윗의 감사기도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다윗 자신에게 주신 엄청난 선물같은 약속이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를 하게 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본문을 통해 감사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고 그것을 설교의 주제로서 내세운 설교를 듣는 것은 해석의 다양성 측면에서 충분히 수용할 만하다. 그런데 항상 매일성경의 순서를 따라 차용되는 설교본문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문맥이해가 아쉽다는 생각은 여전하다.

 

삶의 경험에서 촉발한 어떤 '제목'이나 '주제' 그리고 어떤 '단어'에 대한 집중을 가지고 전하고자 하는 바를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그 과정속에서 희생당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본문에 대한 면밀한 검토속에서 다루어진 역사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그때 거기에서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하신 일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어서 그 사건의 의미들을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통해 잘 이해함과 동시에 그 의미들이 지금 여기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를 깊이 숙고하는 과정이다.

 

설교자는 이런 과정에 숙달되지 않은 신자들에 대한 안내자 역할을 한다. 하지만 설교에는 여러 종류가 있고, 매번 주해설교나 강해설교를 해야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설교에서 자동적으로 끼워넣어진듯한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을 빼면 마치 인문학적인 강의 같다는 느낌은 성경본문의 하나님의 역사성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

 

설교의 스토리는 대체로 비슷한 틀를 가진다.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려라. 좋은 감정을 지키고 나쁜 감정을 잘 해소하라.

-주변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 주변인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존중하라.

-가족들에게 잘 대해라. 사랑과 배려로 자식들을 양육하고 부모를 공경하라.

-우리에게는 옛본성적 악함과 약함이 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속의 은혜만을 기억하라.

 

미리 언급했듯이, 단어나 주제에 과하게 집중된 설교로 인해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성경역사의 이해가 왜곡되거나 흐려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지만 읽지 않고 성경을 이해하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다만 성경이 성경답게 다뤄지길 소망한다. 성경을 내 중심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과 행하신 일을 중심에 놓고 보자.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 주님과의 사귐이 되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이 땅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출발점이 된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열심을 내기 전에, '하나님을 아는 일'에 먼저 힘쓰는 하나님의 백성, 예수님의 제자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