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어가시니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이르시되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의 한 사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17.11~19)
본문은 예수님께서 나병환자 10명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고침받은 그들 중에 딱 한 사람만이 돌아와 에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개처럼 취급하고 아예 상종하지 않았던 사마리아 출신이었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 다른 관점을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예수님게서 나를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고 예수님께 나오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만이 문제를 해결해주신다.' 그것을 바라고 나오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한계를 뛰어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에만 머무르면 절대 안됩니다.
믿음에만 머무르면 아픔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해결되는데 남아있는 아픔을 치유할 수 없습니다.
"현재의 축복에 감사하는 자만이 과거의 고통을 잊을 수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감사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과거의 상처, 아픔을 치유하지 못하고 그냥 덮고 넘어갈 뿐입니다.
우리는 다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있지만, 아픔과 상처가 있어, 그것때문에 잠을 깊이 이루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의식의 세계에서는 다 사라졌다고 생각하는데 무의식의 세계속에 아픔과 상처가 있습니다.
잠잘때마다 악몽을 꾸는 사람이 있고 과거의 기억이 다 잊혀진 줄 알았는데 불연듯 불연듯 떠오르기도 하고,
어떤 사건을 바라보고 난 다음에 아픔이 떠오를때도 참 많이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권위로부터 상처받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권위가 아버지, 선생님입니다.
과거 어렸을 때의 권위 앞에 상처받았던 것을 남에게 표출하게 되면 관계가 깨지니까 숨겨놓은 것이 있습니다.
권위로부터 받은 상처들이 또 다른 권위앞에 서게 되었을 때 불연듯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가볍게 조크를 던져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사건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옛날에 숨겨져 있는 아픔과 상처가 들쳐졌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그런 반응을 하는지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믿음으로 치유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다 용서했다고 생각합니다.
지나놓고 보면 치유된 것이 아닙니다.
감사로까지 나아가지 아니하면 절대로 그 아픔은 치유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내가 회개했습니다. 분명히 내가 용서했습니다. 다 극복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잘안되네요.
왜 자꾸만 이것이 사라지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끊어지지 않는 쓴 뿌리인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것을 끊을 수 있습니까?
반드시 믿음위에, 용서위에 감사로까지 나아가야 아픔이 흉터없이 온전히 치유될 수 있습니다.
상처입은 대표적인 사람이 요셉입니다.
피를 나눈 형제가 죽일려고 했고 노예로 팔아먹고 13년간의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45:5)
요셉은 용서할 뿐만 아니라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감사의 시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감사의 시각이란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게 겉으로 볼 때 좋은 것, 나쁜 것 모두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생각하면 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는 믿음에 이르지 않으면 절대 감사로까지 나갈 수 없습니다.
믿음만을 내세울 때 대개 딱딱해집니다. 있다 없다의 구조가 되버립니다.
믿음에만 머물러 있으면 나도 모르게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 믿음은 좋고, 내 기도는 좋고, 내 헌신은 좋고 나는 잘하는데, 너는...'
이럴 때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려워집니다.
'나는 하는데 너는 안한다. 나는 있는데 너는 없다.' 자기도 모르게 그러게 됩니다.
믿음위에 한걸음 더 감사로 나아갈 때,
'너 때문에 내가 더 기도하게 되네, 너를 돌볼 수 있기에 내가 더 풍성해진다.' 이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믿음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반드시 감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를 정죄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 어려움을 주었던 사람들, 요셉이라면 형들이나 보디발의 아내에게
"나를 넘어뜨린 사람이지만 내가 너를 용서한다"하고 그치면 그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습니다.
'나를 어렵게 만든 사람이 나를 성공시키고 나를 성장시키는 사람이다.' 이것이 감사의 시각입니다.
'형들이 팔았기에 애굽에 가게 되었고 보디발의 아내가 나쁜 짓 했기에 내가 감옥에 가서 바로왕을 만난 것 아니냐'
나를 어렵게 만든 사람이 나를 성공시키는 사람이다, 나를 돕는 사람이다. 음으로 양으로 나를 도와줬다 생각할 때 그것이 감사의 시각입니다.
그래야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고 아픔을 치유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말씀하시길, 두 부류의 성도가 있다고 합니다.
기도해주는 성도가 있고, 자기로 하여금 기도케 하는 성도가 있습니다. 이것은 감사의 시각입니다.
그 성도의 어렵게 만듬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께 겸손하게 무릎꿇게 만드니까 그것도 유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감사로 나아가야만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받을 수 있습니다.
"나는 성처가 있어요. 나는 아픔이 있어요. 이 쓴뿌리가 쉽게 없어지지 않네요. 나는 과거에 이랬어요."
이렇게 이야기할 때 진솔해지고 솔직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의 신앙에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는 애기입니다. 믿음에만 머물러 있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10명의 나병환자가 병고침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 감사로 나아가야 상처가 다 치유받습니다.
그래야 마귀가 여러가지를 가지고 우리에게 장난칠 수 없는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도 흘러넘치는 감사로 말미암아 문제가 해결될 뿐만아니라
우리의 상처, 아픔까지도 온전하게 치유받는 믿음의 신실한 종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감사는 아픔을 치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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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목사님의 설교문중의 일부분입니다. 여러번 읽어보는 중에 하나님께서 저의 숨겨놓은 아픔과 상처를 보게 하시네요.
또 가볍고 알량한 제 믿음을 드러나게 하시고 모든 것에 감사하지 못하는 믿음의 연약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합니다.--
진정으로 감사하는 삶이 우리로부터 자연스럽게 드러나 이 땅위에 따뜻하고 거룩한 빛을 능력있게 비추이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